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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주영/ 그릇과 상자와 풍경, 존재가 분기되는 지점들

고충환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그림은 작가의 자화상일 수 있다. 아예 자화상을 그린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이러저런 사물대상이나 자연현상에 자기감정을 이입한 경우들이다. 이런 알만한 형상을 소재로 한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외관상 어떤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추상회화에서마저 형식논리와 같은, 그림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반영돼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기하학적 형식의 그림에서는 에토스(내적질서의식)를, 추상표현 형식의 그림에서는 파토스(생명의 본성과 격정)를 반영하는 식이다. 외관상 객관적 현실을 재현한 것으로 보이는 현실주의 그림에서마저 사실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입장이 반영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회화의 다양한 형식은 말하자면 저마다 자기관념이 분기되는 지점들이며, 자기욕망 내지 표현이 등록되는 좌표들로 보아야 한다. 


표주영, 시간이 머문 자리


표주영, 시간이 머문 자리


그렇다면 작가 표주영의 그림은 어떤가. 그림은 내 자신의 일기라거나, (그림 속 공간은) 나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공간이라거나, 나는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자신을 그림으로 나타낸다는 작가의 고백은 분명 이런 사실 곧 모든 그림은 작가의 자화상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그림 어디에도 작가는 없다. 다만 상자와 그릇이 소재로서 등장할 뿐이다. 상자와 그릇이라는 사물대상에다가 자기감정을 이입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그림으로 하여금 개별적인 경험을 대리하게 하는 한편으로, 개별적인 경험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장 심화시킨다. 주관성과 객관성, 특수성과 보편성이 그 경계 너머로 상호작용하는 차원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알다시피 상자와 그릇은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이다. 그리고 상자는 자기만의 방이 변주된 것이다. 상자와 그릇은 말하자면 자기에 해당하며, 그 자기용기에다가 세상을 담는 것이다. 이런 독해는 작가에게만 해당하고 한정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상자와 그릇을 세상을 담는 용기와 그러므로 자기와 동일시하는 경우는 보편상징일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개별상징을 넘어 보편상징을 아우른다. 이런 사실은 특히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자신을 그림으로 나타낸다는 작가의 고백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공간과 시간은 존재가 위치하고 살아지는, 존재론적 조건이 등록되고 표기되는 좌표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를 그리면서, 동시에 존재론적 조건이 등재되는 좌표를 그리고 있었다. 작가의 그림이 쉽사리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며 지점으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꿈꾸는 그릇을 그리고, 시간이 머물다간 자리를 그리고, 닫히고 열리는 상자(닫힘과 열림 사이)를 그린다. 꿈을 그리고, 흔적을 그리고, 자기(상자 혹은 방으로 대리되는)를 그린다. 태도로 치자면 자기 반성적이고, 시간으로 치자면 과거 지향적이다. 그런 만큼 형식도 이를테면 색감이며 질감도 여기에 맞춰진다. 부연하자면 작가가 꾸는 꿈은 미래를 지향하기보다는 기억을 반추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시간이 머물다간 자리에는 부재와 흔적만이 남는다. 부재를 매개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한때 존재했었음으로 나타난 과거시제를 통한 존재증명이다. 

이 존재증명을 위해 얼룩이, 자국이, 흔적이 동원된다. 실제로 작가의 그림엔 알 수 없는 스크래치와 비정형의 얼룩들이 화면의 전면에 두루 포치하고 있는데, 아마도 시간이 머물다간 자리에 남은 존재의 흔적인 것이며, 마치 지문과도 같은 존재의 자국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얼룩과 자국과 흔적을 만드는데 고심하는 편이고, 그렇게 조성된 화면에선 존재 자체보다는 존재의 흔적이 부각되면서 특유의 분위기가 강조되는 편이다. 이를테면 상실한 것들, 미미한 것들, 박약한 것들, 흐릿한 것들, 애매한 것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 시간의 풍화에 정면으로 노출된 것들, 그래서 어쩌면 덧없는(아마도 삶이 꼭 그럴) 것들에게 고유의 형태와 구조를, 색감과 질감을 부여해준 느낌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탈은폐의 상태로 은폐된 것이라고 보는데, 결국 이 모순율에 존재표현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의미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얼룩을 매개로 드러내면서 숨기는, 숨기면서 드러내는 작가의 그림 역시 이 기획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여하튼, 그렇다면 이 도저한 분위기는 뭔가. 그리고 그 분위기는 어떻게 가능해진 것일까. 작가는 분위기를 만든다. 분위기를 만든다? 이를테면 작가는 마치 판화에서의 콜라그래프나 프로타주에서처럼 이러저런 오브제를 이용해 종이에다가 거실거실한 질감과 함께 마치 배채법에서 보는 것과 같은 희끗희끗한 색감을 조성한다. 그렇게 원하는 질감과 색감의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나면 마침내 재료가 준비된 셈이다. 재료? 작가는 이렇게 조성된 종잇조각을 화면에다 오려붙이는 방법으로 선을 만들고 면을 만든다. 그릇을 만들고 상자를 만든다. 화병을 만들고 화초를 만든다. 열매를 만들고 낙엽을 만든다. 일종의 콜라주 기법으로 보면 되겠다. 

뭔가 찍혀져 나온 질감이며, 칼로 오려붙인 가장자리 선이 바탕화면에 조성된 비정형의 얼룩들과 어우러져 친근하면서도 낯선(양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기와 만들기, 찍기와 오려 붙이기와 같은 상호간 이질적인 기법과 방법이 하나의 화면 속에 혼용되고 있는데도 희한하게 억지스럽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생각이다. 회화적 분위기(아마도 구조와 형태, 색감과 질감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일)를 장악하는 감각적 능력이 뒷받침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자체 회화를 확장하면서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봐도 되겠다. 

작가의 그림엔 그릇과 상자가 등장한다고 했고, 그릇과 상자는 작가 자신을 대리하고 존재 일반을 대신한다고 했다. 그릇도 그렇지만 특히 상자가 이런 개별상징이며 보편상징으로는 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경우일 것이다. 여기에 서두에서도 말했듯 상자는 자기만의 방(존재의 방)이 변주된 경우란 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런데 작가가 그림으로 제안하고 있는 상자의 꼴이 예사롭지가 않다. 상자 같기도 하고 전개도 같기도 한, 열린 것 같기도 하고 닫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 일련의 상자그림들에 닫힘과 열림 사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있다. 상자는 방이 변주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방은 집이 변주된 것이다. 상자와 방과 집은 말하자면 주체가 분기되고 변주되는 상징적인 지점들이며 좌표들이라고 보면 되겠다. 주체가 살고 있는 집은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이를테면 집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나를 고립시킨다. 보호하면서 고립시킨다. 그렇게 나는 집을 닫고 싶고 열고 싶다. (기꺼이) 불통하고 싶고 소통하고 싶다. 타자와의 관계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이율배반을 의미한다. 부조리한 존재(존재론적 조건)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의 개별적인 경험을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장시켜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율배반이며 부조리 속에서도 꿈을 꾸고 꽃을 피운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제스처(꿈꾸는 삶)로 봐도 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율배반과 부조리를 긍정하는 삶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풍경적인 요소를 끌어들인다. 이를테면 블라인드가 쳐진 창을 통해 본 풍경이다. 장르로 치자면 정물화로 범주화될 다른 그림들에 비해 스케일이 큰 만큼 화면구성도 좀 더 복잡하고 유기적인 편이다. 각각 그릇과 상자에 자기를 담아낸 소극 형태의 서사(자기고백? 내면적인 독백?)가 타자를 향해 열리는(창을 통해 내다보는) 계기 혹은 전기로 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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