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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준/ 흙의 본성으로 일군 그림

고충환



정형준의 그림을 본 첫 인상은 흙바닥에 낙서한 것 같고 턱턱 갈라진 논바닥 같다. 그렇게 갈라진 틈새로 알듯 모를 듯 형태들이 빼곡하다. 빼곡하지만 복잡하지는 않다. 흙색에 바탕을 둔 중성적인 무채색조의 색감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서 통일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선 흙의 질감이며 색감이, 그리고 흙의 심성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의 그림은 흙으로 그린 그림이다. 작가는 일반적인 캔버스 대신 올이 굵고 성근 마대 천을 지지대로 사용하는데, 거칠고 질박한 질감이며 색감이 흙의 심성을 닮아서이다. 이런 흙의 심성과 함께 화면의 물성을 강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보다 실질적으로는 작가의 주요 작화재료인 흙의 접착력을 강화시켜주는 것도 이유가 되겠다. 그 대략적인 과정을 보자면 반죽 상태의 흙(점토)을 평평하게 편 다음 캔버스에 접착시키고, 뾰족한 도구나 칼을 이용해 원하는 이미지며 화면을 만든다. 그렇게 화면에 흙을 짓이겨 빈 올을 채우기도 하고, 화면 위로 돋을새김(릴리프) 된 무분별한 형상들이 어우러지게 한다. 그렇게 오밀조밀한 비정형의 형태들로 빼곡한 모노톤의 단일색상계열로 화면을 채운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면, 얼핏 무채색의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이며 무분별한 크랙으로 이루어진 추상회화(단색화?) 같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화면 속에 알만한 형상들이 빼곡하다. 알만한 형상으로는 전작에서는 얼굴들이 주로 등장하는데, 온갖 얼굴들이며 표정들이 다 들어있다.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며,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익명적인 초상을 그린 것이다. 근작에 오면 형상은 점차 얼굴에서 탈피해 일상적인 서사에 해당하는 각종 모티브들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경우로 바뀐다. 이를테면 사람, 동물, 자동차, 비행기, 건물, 집, 돌담, 길, 파도, 구름, 나무와 같은. 각종 집기와 기물들이 일상적인 모티브와 뒤엉키고, 여기에 개인적인 가족사와 무분별하게 어우러진 형태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티브들을 재현하는 방법이 유아의 설익은 낙서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무분별해 보이기도 하고, 설익어 보이기도 하고, 분방해 보이기도 하는 그림들이다. 낙서를 드로잉으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아마도 작가의 개인사적인 신상에서 유래한 그림일 것이고, 이후 신상변화(이를테면 자신만의 가족이 생긴 것과 같은)에 연유한 그림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외관상 형식논리를 따른 회화의 외양 속에 마치 그림일기와도 같은 소소한 생활사를 숨겨놓고 있었다. 


이런 사실의 인식에 대한 보충이 되겠지만, 작가 특유의 화법에 나타난 낙서는 흙 놀이라는 주제와도 무관하지가 않다. 엄밀하게 흙 놀이는 주제라기보다는 작가의 작업 전체를 지배하는 전제에 해당한다. 실제로 이런 전제에 부수되는 작은 주제로서 작가는 근작을 섬 소년이라고 따로 명명하기도 한다. 아마도 제주도를 고향으로 둔 작가의 자기정체성 문제를 의식하고 의미한 것일 터이다. 여하튼, 작가의 작업은 흙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마른 나뭇가지로 이러저런 낙서를 하며 놀았던, 그리고 점토를 조물조물해 이러저런 형상들을 빗어 만들면서 꿈꾸었던 유년의 추억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 추억이 꼭 흙 놀이일 필요는 없다. 프루스트에게 마들렌이 유년의 추억을 일깨워준 것처럼 작가로 하여금 무엇이 유년의 추억을 되불러오게 만드는 계기로서 작용하느냐는 점이고, 작가의 경우에는 그 계기가 우연하게 흙 놀이였다는(유년의 추억을 대변하는 흙 놀이) 사실에 주목하면 될 일이다. 이로써 작가는 일종의 존재론적인 기억이며 원형적인 기억을 현재 위로 되불러오는 것에서 그림을 위한 계기며 동력을 얻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유년의 기억을 역추적하고 복원하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자신만의 유년의 기억이 자신을 닮은 아이의 현재와 오버랩 되고 있는 경우(흙바닥에 낙서를 하는 작가와 공책에 낙서를 하는 아이)로 볼 수도 있겠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얼핏 무분별한 그리고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과 자국과 흔적들로 이루어진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어떤 의미내용으로서보다는 회화의 자족적인 형식논리를 따른 그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개인사와 생활사에 연유한 자신만의 서사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말하자면 자신만의 현실인식을 반영한 것이란 점에서 진정성을 얻고 설득력을 얻는다. 그리고 여기서 개인사란 것이 알고 보면 대동소이한 것이어서 쉽게 공감을 얻는다. 비록 작가 자신만의 개인적인 경험을 그린 것이지만, 그 경험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란 점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지적하자면 이처럼 놀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작가의 작업이 놀이 자체의 양가성을 반영하고 있는 점이다. 말하자면 놀이는 놀이 자체에 몰입하게 만들고(무위), 동시에 놀이를 계기로 원초적인 혹은 의미 있는 뭔가를 표현하게 만든다(위). 위와 무위, 의식적인 차원과 무의식적인 경우, 행위 자체와 행위의 의미가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것. 작가의 그림으로 치자면 모노톤으로 드러난 무분별한 흙 자국이 행위 자체에 몰입하게 만드는 무위에, 그리고 화면이 그 속에 품고 있는 알만한 형상들과 서사적인 측면이 행위의 의미를 찾고 이를 재구성하게 만드는 계기(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놀이를 매개로 위와 무위, 의식과 무의식, 행위 자체와 행위의 의미를 묻는 행위가 날실과 씨실로 긴밀하게 짜인 직조에 비유할 수가 있겠다. 부지불식간에 놀이의 문명사적인 개념을 실천(최소한 무의식적 반영)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의 작업에서 특이한 것은 마대 천을 캔버스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일종의 오브제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주목된다. 이를테면 작가는 마대 천에 구김을 내 굳히는 방법으로 비정형의 알 수 없는 형태(덩어리)를 만든다. 터실터실한 표면질감과 어우러진 비정형의 구김이 만들어낸 형상은 얼핏 알 수 없는 미지의 대상처럼 보이지만, 정작 작가는 여기에 엄마의 초상을 오버랩 시킨다. 실제로 그 위에 초상을 그려 넣는 대신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고 보면 되겠다. 말하자면 질박하고 터실터실한 보푸라기며 비정형의 구김살을 가지고 있는 형상 그대로 흙의 심성(흙덩어리)을 닮았고, 흙의 심성을 닮은 엄마의 삶(엄마의 유비적 초상)을 닮았다고 본 것이다. 일종의 알레고리며 유비적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 밑에 각각 엄마는 힘들어도 내가 보면 웃는다거나, 우리 엄마 얼굴은 매일 흙투성이라는 문구를 써넣어 이런 유비적 표현을 뒷받침하게 했다. 거듭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작업이 개인사와 생활사에 바탕을 둔 자기정체성 서사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임을 재확인시켜주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한편으로 이 작업에서 보는 것과 같은 캔버스 천의 오브제화에 대해서는 미술사적으로 쉬포르 쉬르파스와도 통한다. 캔버스에서 분리된(해방된) 지지대와 지지체 자체가 이미 자족적인 의미를 갖는 물질이며 질료라고 본 것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회화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일련의 평면작업과 오브제 작업과 함께 작가는 근작에서 영상작업을 따로 제작해 선보이기도 한다. 영상은 하나지만 복수의 서사줄기가 하나로 중첩돼 있다. 각각 작가가 작업하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과, 제주도의 풍경을 찍은 영상, 작가가 쉼 없이 밭을 일구는 영상, 그리고 여기에 고향 제주도에서의 가족사를 기록한 영상들이다. 영상 속에서 작가는 왜 쉼 없이 밭을 일구는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쉼 없이 밭을 일구던 엄마 따라 하기다. 쉼 없이 밭을 일구던 엄마를 따라 지금은 작가 자신이 쉼 없이 밭을 일군다. 엄마의 삶에 대한 오마주고, 대물림되는 혈육에 대한 끈끈한 확인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오래 전에 지금도 살고 있는 집을 직접 지으셨다. 그래서 애착이 많다. 최근에 그 집이 헐릴 위기에 처했을 때 아버지는 그 집을 지켜냈다. 담과 도로가 최소한의 간격도 없이 들러붙어있는 집이다. 밭이 엄마의 전부였고 집이 아버지의 전부였다. 그래서 점차 밭이 엄마를 집이 아버지를 닮아갔다. 그렇게 작가는 아버지와 엄마로부터 자신에게로 그리고 재차 자신의 새로운 가족에게로 대물림되는 가족사를 영상에 담았다. 


그렇다면 작가의 제작과정을 기록한 영상물은 이런 가족서사와는 겉도는 것인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영상 속에서 작가는 앞서 본 오브제(마대 천을 오브제처럼 사용한)를 확장시킨 작업을 제작 중이다. 제주도 지형 그대로를 재현해 만든 형상이다. 작업 속에서 작가는 제주도를 짓는다. 자신의 삶(과거와 현재의 삶)을 짓는다. 그렇게 작가가 짓는 삶 속에 엄마의 삶이, 아버지의 삶이, 새로운 자신만의 가족의 삶이 하나로 녹아든다. 그렇게 작가는 나를 형성시켜준 계기들이며, 나를 만들어준 동기들을 자신의 작업 속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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