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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결정, 움직이는 좌표에서 본 달 항아리

고충환

아마도 한국미의 원형으로서 조선시대 백자 달 항아리를 드는데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각양각색으로 달 항아리에 함축된 미의식을 분석했다. 그 중 미술사학자 고 최순우 선생의 분석이 꽤나 혹은 가장 함축적일 수 있겠다. 폭넓은 흰 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낸 백자 항아리의 흰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산 배꽃이나 젖 빛깔에도 비길 수 있는 순정어린 흰빛의 조화...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아름다움...계산을 초월한 아름다움...신기스럽고도 천연스러운 아름다움(백자 달 항아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최순우). 


김효선, 달항아리 6-1


김효선, 달항아리 6-1


분석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달 항아리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토로한 것에 가깝다. 달 항아리를 설명하기 위해 분석적인 어휘 대신 수사적 표현에 기대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미술사학자로서 요구되는 분석적 어휘의 엄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수사적 표현의 맛깔에 차이가 있을 뿐 분석적이라고 할 만한 다른 예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봐서 단순한 결여로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수사적 표현으로서 분석적 어휘를 대신(대체)하는 경우로 봐야 하고, 그럼으로써 달 항아리의 미학적 가치를 오히려 더 잘 포착하고 드러낼 수(분석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달 항아리의 특징으로서 흰 빛과 둥근 형태가 제시된다. 그런데 그 흰빛은 폭넓은 흰빛이고 둥근 형태는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둥근 형태다(이외에 다른 수사적 표현들이 있지만, 하나같이 이 기본형을 뒷받침하는 동어반복의 경우로 봐야 한다). 도대체 분석적인 어휘로는 붙잡을 수 없는 빛깔이고 형태다. 도대체 누가 폭넓은 흰빛과 부정형의 둥근 형태를 분석적인 어휘를 사용해서 분석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당신 스스로도 형언하기 힘든 형태라고 하지 않는가. 세세한 차이를 도외시한다면 여기서 부정형은 비정형으로 고쳐 읽어도 무방하겠다. 이로써 섣부른 결론을 내리자면, 달 항아리는 부정형과 비정형으로 나타난 한국미의 원형의식을 함축하면서 대변하고 있었다. 


이처럼 달 항아리는 부정형과 비정형으로 나타난 한국적 미의식을 함축한다. 여기서 좀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그렇다면 그 결과는 성공적인가 아니면 실패한 것인가. 작가 김효선의 달 항아리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은 바로 이 뜬금없는 질문과 더불어 시작된다. 뜬금없는? 진지한? 돌발적인? 모든 진지한 질문은 뜬금없이 온다. 돌발적이다. 상식을 건드리고 당연을 깨고 들어오는 것이다. 바슐라르라면 불연속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부정형과 비정형으로 나타난 달 항아리는 성공적인가 실패한 것인가. 적어도 미의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성공적이다. 부정형과 비정형이 인위적이지 않음과 자연스러움으로 나타난 에피스테메(당대의 지배적인 지식체계)에 부합하는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 유교사상(장식에 대한 거부)과 도교사상(무위 곧 위에 대한 거부)이라는 시대감정에 한정되는 점은 있다. 시대감정이란 것이 변하기 마련인 것임을 인정한다면, 미의식 역시 가변적인 것임을 뒷받침하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부와 비가 말해주듯 정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형이 뭔가. 특히 달 항아리와 관련해서 정형은? 작가가 보기에 정형은 완벽한 형태 곧 엄격한 좌우대칭에다가 처짐이 없는 형태다. 그런데 실제로는 불완전한 형태 즉 물레를 사용했음에도 좌우대칭이 아닌 형태며, 상하부를 따로 만들어 이어 붙인 흔적이 여실하고(차라리 흔적에 무심하고), 여기에 한쪽으로 처진 느낌마저 준다. 

이런 불완전한 형태며 공공연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대의 미의식에는 부합한다? 여기서 작가는 미적 기준의 상대성이며 성공과 실패의 임의성과 자의성 문제를 건드린다. 미에 대한 기준은 상대적이다. 칸트는 미를 취미라고 부른다. 그리고 알다시피 취미란 개별적이다. 원체는 개별적이지만 공통감각을 매개로 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정형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부 혹은 비정형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떤 시대가 어떤 형태를 정형 혹은 비정형이라고 정의하느냐는 것이다. 정형 비정형 자체도 그리고 정형 혹은 비정형에서 미의식을 느끼는 미적 감정도 시대 초월적이지가 않다. 그 배경에 정의 문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 

이처럼 언제나 정의가 문제다. 그렇다면 다시, 정형이 뭔가. 정형이란 올바른 형태다. 올바른 형태? 누가 올바른 형태를 정의하는가. 정형을 미학적으로 보면 올바른 형태가 되고, 사회학으로 풀면 올바른 태도가 된다. 그렇다면 다시, 누가 올바른 형태며 태도를 정의하는가. 이 문제는 미셀 푸코의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제에 연동된다. 푸코에게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제는 지식과 권력의 문제에 연동된다. 사회학적으로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제는 미학적으로 정형 비정형의 문제에 연동된다.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제가 이데올로기(혹은 헤게모니)이듯 미의식(그리고 개별적인 취미)마저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굳이 말을 하자면 당대의 예술계에 의해 공공연한 합의에 이른(제도화된) 결과물이고, 부르디외의 논법으로는 상징투쟁과 인정투쟁의 소산이다. 제도가 개별주체의 마음을 훔치고 무의식을 파고드는 것이며, 나아가 미의식마저도 결정하는(최소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처럼 미에 대한 기준이 상대적이라면, 그렇게 흔들리는 기준에 근거한 성공과 실패 역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임의적이고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가변적이고 가역적일 수밖에 없다. 흔들리는 기준? 흔들리는 경계? 작가는 이런 흔들리는 기준이며 경계가 미의식의 또 다른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가는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일부러(의도적으로?) 실패한 작품, 부 혹은 비정형의 작품을 만든다. 작가의 논법(차라리 상식적인 논법)으로 성공적인 작품은 정형 곧 완벽한 형태 곧 엄격한 좌우대칭에다가 처짐이 없는 형태다(그런데 그 완벽한 형태가 정작 미의식과는 어긋난다. 여하튼). 이 형태가 가능해지기 위해선 프로세스 상으로 일정한 룰이 지켜져야 한다. 이를테면 흙의 점도가 균질해야하고, 항아리를 빚을 때 그 두께가 일정해야 한다. 소성과정에서 불의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하고, 열이 항아리 전체에 고르게 전달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재임할 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항아리가 서로 들러붙지가 않는다. 각각 흙의 성질과 불의 온도, 성형방법과 재임과정에서 요구되는 조건들이다. 이 조건들을 충족시킬 경우에 소위 완벽한 형태의 달 항아리를 얻을 수가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 조건을 최소한으로만 적용하거나 아예 드러내놓고 무시한다. 의도적인 방임과 계획된 우연으로 필요충분조건을 대신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저앉은, 깨지고 터진, 들러붙은 형태를 얻는다. 얻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얻어진 작가의 형태는 부정형이고 비정형인가. 실패한 작품인가. 


다시 말하지만 하나의 달 항아리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흙의 성질과 불의 온도, 성형방법과 재임과정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요구되어지는 필요충분조건이 낱낱이 수행되어져야 한다. 작가는 그 수행을 기계적인 과정이라고 본다. 그리고 우연적이고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현상과 결과에 대한 억압의 과정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흙은 휘거나 말리거나 주저앉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불은 화소를 따라 흐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소성과정에서는 더러 금이 가거나 아예 깨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 과정 과정을 자연 상태 그대로 열어두었을 때 생길 수도 있는 변수들이다. 

변수들? 가능성들? 여기서 작가는 기계적인 과정 대신 가능성들의 변수에 주목한다. 질료가, 과정이, 질료와 과정의 상호작용이 저마다의 본성을 실현하는 차원에 주
목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기계적인 과정은 자본주의의 대량생산체제에나 걸맞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그 결과를 완벽한 형태라고 정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굳이 공장에서는 불량품을 걸러낸다는 말을 해야 할까).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는 미의식의 상대성과 함께 그 이면에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나아가 미의식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물신에 대한 비판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중요한 건 질료가, 과정이, 존재가, 현상이 저마다의 본성을 실현한 상태(하이데거 식으론 존재가 존재다움을 실현한 상태)에 미의식이 연동된다고 보는 것이다. 

달 항아리는 다름 아닌 부정형과 비정형 탓에 비로소 완벽한 형태가 될 수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상품화 기획에서라면 아이러니고 모순이지만, 미의식의 관점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다. 미의식으로 봤을 때 완벽한 형태는 결정적인 지점을 가지고 있지 않고, 고정된 좌표로 등재되지도 않는다. 흔들리는 결정, 움직이는 좌표, 유격이 있는 기준에 연동되는 미의식은 말하자면 사물의 다른 존재방식을 열어놓는 형식실험에 비유할 수가 있다. 작가는 그렇게 달 항아리를 보는 다른 존재방식(사실을 말하자면 달 항아리를 보는 전통적인 미의식과도 통하는)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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