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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진달래,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 바치는 그리움의 헌사

고충환

 

 

처음에 김정수는 문명 비판적이고 체제 비판적인 작업을 했다. 사과에 검은 래커 칠을 한. 깨진 소주병 조각을 합판에 붙인. 여기서 사과는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을 상징하며, 사과의 겉을 검은 래커 칠로 코팅한 것은 생명을 죽이는 문명이며 체제를 상징한다. 깨진 소주병 조각을 조형을 위한 소재로서 도입한 것은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소주병으로 상징되는 청춘에 바치는 헌사였고, 무기력한 젊음을 달래는 송가였다. 그리고 1983, 작가는 불현듯 도불한다. 형식실험이 왕성했던, 행위와 설치미술이 개념미술의 이름으로 호명되던, 그런, 국내화단이 제2의 아방가르드를 맞이했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만약 그때 작가가 도불하지 않고 계속 국내에 머물렀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여하튼 그렇게 도불한 작가는 현지에서 뜻하지 않게 백남준을 만난다. 그때까지 입체와 설치 작업을 위주로 한 작가가 평면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도 한동안 문명 비판적이고 체제 비판적인 그림을 그렸다. TV와 같은 문명의 이기들이 폐기된 채 버려진 황량한 풍경들이다. 문명 비판적이고 체제 비판적인 주제의식이 문명을 살고 체제를 사는 예술가들의 공통적인 자의식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그림들은 그곳에서도 통했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입체작업들과 설치작업들 그리고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그림들을 인식의 윤리 시리즈라고 불렀다. 인식의 윤리? 인식에도 윤리가 있다? 인식에도 윤리가 있어야 한다? 알다시피 인식은 사실여부를 따지고 이해여부를 캐묻는 쪽과 관련이 깊고, 윤리를 따지는 쪽은 사는 문제며 삶의 실천논리 내지 존재론적 자의식에 가깝다. 적어도 알려진 것대로라면 그렇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는 피가 뜨거웠던 시절에 생각과 사는 문제를, 인식론적 문제와 존재론적 자의식을 자신의 작업 속에서 하나의 층위로 합치해놓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정체성 문제에 맞닥트린다. 향수병이라고 해도 좋고, 연어와 같은 회귀본능이라고 해도 좋고, 존재의 근원을 역추적 하는 뿌리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향수도 회귀도 뿌리도 하나같이 과거를 향하는 것에 주목할 일이다. 현재에 반응하던 작가는 이제 과거형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는 것들, 상실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오히려 더 아득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들에게서 자기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만나진 것이 진달래 그림이었다. 유년시절에 어머니는 방황하던 어린작가를 꾸짖는 대신, 언젠간 너도 저 꽃처럼 활짝 필 날이 올 것이라며 격려했고, 꽃을 하늘에 흩뿌리며 아들 잘 되기를 빌었다. 그때 그 꽃이 진달래였다.

이처럼 작가에게 진달래는 작가로 하여금 유년시절의 추억으로 되돌려주는 타임머신이었고, 어머니의 사랑을 되불러오는 타임캡슐이었다. 요새 식으로 치자면 프루스트효과가 되겠다. 그렇게 진달래는 작가의 존재론적 원형이었다. 그리고 원형은 작가의 유년을 넘어 미처 작가가 태어나기도 전에서부터 작가에게 유전되고 작가를 예비했을 만큼 먼 과거로 소급되는 것이기도 하다. 진달래는 말하자면 작가의 개인사에 연유한 것이면서, 동시에 존재론적 원형이라고 하는 보편적 가치와 공감을 얻는다. 작가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동시에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보편적 상징인 것이다. 작가가 진달래를 그리는 이유이며, 진달래 그림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라고 보면 되겠다. 잃어버린, 상실한,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의 원형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사람들 저마다 하나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을 섬이며 고향으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진달래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진달래를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각각 이 땅의 어머니들 시리즈, 기억의 저편 시리즈, 그리고 축복 시리즈라고 불렀다. 이 주제 혹은 제목들은 각각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고 봐야 하고, 그림들 역시 상호 호환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 자체 결정적인 것이 아닌, 편의적인 구분으로 보면 되겠다. 먼저 이 땅의 어머니들 시리즈 그림을 보면, 화면의 대부분이 빈 화면인 채로 비어있다. 바로 하늘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며, 화면 아래쪽으로 길게 도시와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다. 하늘도 그렇지만 도시며 시골풍경이 단색조의 모노톤으로 그려져 있어서 흡사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시골은 물론이거니와 도시마저 현재로서보다는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고, 과거의 일부분인 것 같다.



이처럼 사라지면서 현전하는 풍경이 기억의 속성을 닮았다. 기억은 분명한 모든 것들을 흐릿하게 한다. 이처럼 분명한 것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으로 치자면, 곧 존재하는 것들을 부재하게 만드는 것으로 치자면 기억이 있고 시간도 그렇다. 바로 기억이 시간이다. 시간을 반성하는 것이며, 시간을 역으로 거슬러 오르는 것. 작가는 말하자면 그리움의 원형을 상징하는 진달래를 구실 삼아 기억을 조형하고 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기억과 시간이 조력해 그리움의 원형을 밀어 올린 그림으로 이해해도 되겠다. 그렇게 밀어 올린 그리움의 원형 위로 꽃비가 내린다. 바로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한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보통사람들의 생활사와 함께 해온, 그리고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한국근현대사의 역사적이고 서사적인 풍경에 아로새겨진 어머니들의 희생을 상징한다. 흐릿한 풍경과 유일하게 자기 색을 가지고 있는 진달래와의 대비에서 보듯 어머니들의 희생과 사랑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텅 비어있으면서 충만한 빈 화면만큼이나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이 가없고, 덩달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가없다.



작가의 그림은 보기에 따라서 기억을 조형하고 시간을 형상화한 그림이라고 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기억의 저편 시리즈에 연이어진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끄집어낸 것이다. 그래서 그림이 흐릿하고 아득하고 가없는 이유가 해명이 되겠다. 이 시리즈에서 눈에 띠는 경우로 치자면, 징검다리 그림이다. 징검다리 위로 꽃비가 내리거나, 아예 그 위에 진달래 꽃잎이 내려앉아 덮인 그림이다. 여기서 징검다리는 경계를 상징한다. 과거와 현재를 가름하는. 기억의 이편과 저편을 나누면서 연이어주는. 혹 현세와 내세며,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봐도 무방하겠다. 경계가 없으면 그리움도 없다. 그리움은 언제나 이쪽이 아닌 저편을 향하는 법이다.



그리고 작가의 진달래 그림은 근작에서 축복 시리즈에 이른다. 바구니 아님 소쿠리 위로 담뿍 담긴 진달래 꽃잎이 인상적인 그림이다.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이 축복으로 넘쳐나는 걸 표현한 그림이다. 다른 시리즈 그림과 눈에 띠게 차이 나는 부분이 바로 이처럼 무슨 고봉마냥 소복한 진달래 꽃잎이다. 그래서 마치 소쿠리가 밥그릇처럼 보이고, 진달래 꽃잎이 밥처럼 보인다. 고봉처럼 소복한 꽃밥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는 진달래 꽃잎을 그리면서 사실은 아님 은연중에 밥을 그리고 있었다. 밥을 그린다? 꽃잎을 그리면서 밥을 그린다? 꽃잎으로 밥을 그린다? 꽃밥? 밥신? 소박하게 말하자면 보통사람들의 밥상을 그린 것이고,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한국근현대사를 관장해온 역사적이고 서사적이고 주술적인 밥신을 그린 것이다. 밥신의 주술적 의미가 자본주의 시대의 물신풍조를 비판하고 있다면, 진정성이 허례의식을 겨냥하고 있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진달래 꽃잎은 색깔을 내기가 어렵다. 색이 너무 짙으면 철쭉이 되고, 너무 옅으면 벚꽃이 되는, 그리고 푸른색이 지나치면 패랭이꽃이 되고 마는, 그런, 오로지 진달래 색을 재현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재현된 진달래 꽃잎이며 꽃잎 색을 매개로 작가는 자기정체성을 그리고, 존재론적 원형을 그리고, 원형적 그리움을 그리고 있었다. 어머니를 향한,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 바치는 그리움의 헌사를 그리고 있었다. 불현듯 유년시절 어머니가 아랫목에 개어놓은 이부자리 속에 고이 묻어두었다가 꺼내준 밥사발의 온기가 그립고, 자기를 밥사발에 내어준 당신의 체온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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