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임현정 / 지금보다 더 비전형적인, 비선형적인

고충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원형 이미지로 이루어진 동화적이고 원초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다. 자신의 그림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함축한 작가 임현정의 말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주제의식을 뒷받침하기 위해 칼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과 원형 개념을 가져온다. 융에 의하면 자아는 원형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있다. 그리고 근작의 주제가 Islands of the Mind이다. 융식으로 옮기자면 마음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있는 자아(들)를 그린 것이다. 여기서 자아는 원형에 연동되고 마음에 연장된다. 그 자체가 메를로 퐁티의 의식의 지향호 개념과 통한다. 의식이 길어 올려지는, 의식이 무분별하게 쌓이는, 의식의 원료인 선의식들이 침묵에 잠겨 있거나 들끓고 있는 의식의 자궁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의식은 선의식의 영향을 받고, 의식의 자궁의 생태학(아님 생리학?)에 지배된다. 

여기서 원형은 전형과 다르다. 사회화될 때, 제도화될 때, 문법으로 환원될 때 원형은 전형이 된다. 관념과 관습, 통념과 풍습, 이성과 합리, 상식과 논리가 전형이 고착되는 지점들이며, 그 끝에 물신사회의 가장 강력한 준칙인 클리세(고도로 제도화된 의미, 공인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어쩜 원형이란 의식화되지 않는 것,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것, 자기를 의미화하고 의식화하려는 모든 기획에 저항하는 것, 전형화의 기획에 저항하는 것, 의식과 의미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 행간에 등록되고 기술되는 것, 자크 라캉의 오브제 아(모든 사물에는 결코 오브제 곧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사물의 전모를 알 수는 없다)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얼핏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으로 구조화된 작가의 그림 앞에 서 있다.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라고는 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어쩜 알만한 이미지들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정작 작가의 그림을 낯설게 하는 것은 이런 이미지 자체라기보다는 이미지를 배열하고 배치하는 것에서 오는 생경함에 연유하는 것 같다. 예술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다. 의미는 사물에 내포된 성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이 놓이는 관계로부터 온다. 화용론이다. 사물의 의미란 그것이 놓이는 상황, 전제, 문맥, 맥락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 맥락이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작가의 그림을 낯설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예사롭지 않은 관계에 의한 것이며, 상식을 벗어난 맥락에 연유한 것이다. 

다시, 사물의 전치다. 초현실주의다. 그 선배에 해당하는 일군의 화가들이 알브레히드 뒤러, 피터 브뤼겔, 히에로니무스 보쉬로 대변되는 북유럽르네상스의 환상파 작가들이다(아마도 프랑수아 라블레 읽기에 바탕을 둔 미하일 바흐친의 그로테스크리얼리즘 역시 이 계보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작가들에게 자연스럽게 친근함을 느끼고 유대감을 느낀다. 환상파 작가들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도 여전히 유효한, 어쩜 다 길을 수는 없는 고갈되지 않는 항아리를 열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환상파 작가들의 그림은 얼핏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우연하고 무분별해 보인다. 마치 처음부터 오리무중의 의미를, 카오스 자체를 그려놓은 것만 같다.

그렇다면 카오스는 현실성이 없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일 뿐인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현실에 대한 반응이 될 때 환상은 은유가 되고, 무분별한 이미지는 알레고리가 된다. 이를테면 비이성적인 시대에 대한, 어리석은 시대에 대한, 억압적인 시대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 된다. 출구 없는 시대에 대한 시대감정을 표현한 것이 된다. 

이 그림들에서 이미 자본주의를 예고하는 징후들이, 특히 사물에 대한 달라진 관념이 발견된다. 사물초상화이며 사물인격체가 그것이다. 사용가치가 끝나는 지점에서 사물의 교환가치는 시작된다. 사용가치의 바깥에서 본 사물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사물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한다. 여기서 사물의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와는 무관한 영역과 범주에서 작동한다. 상품들의 아우라며 물신주의가 그것으로서, 여기서 사물은 스스로 신성한 상품으로, 물신으로, 주체로, 남근으로, 기표로 등극한다. 쉽게 말하자면 사물이 사람을 부린다. 울리고 웃긴다. 구속하기도 하고 자유를 주기도 한다. 현실을 악몽으로 바꿔놓기도 하고, 지상낙원을 약속하기도 한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토피아는 없다. 그 말 속에 이미 현실에 대한 부정, 장소에 대한 부정, 그러므로 어쩜 자기에 대한 부정이 들어있다). 다시, 환상파 화가들은 자본주의가 첨예화된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심리학, 사회학, 욕망학, 의미론, 기호학, 그리고 바깥의 사유(모리스 블랑쇼)와 행간의 유령들(아감벤)과 관련한 인문학적 담론의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작가는 이처럼 북유럽르네상스 거장들의 환상적인 그림을 차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차용된 이미지를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의 지층으로부터 되불러낸 이미지와의 접합을 시도한다. 차용된 이미지와 개인사를, 의식과 무의식을 날실과 씨실 삼아 하나로 직조해내는 것. 이를테면 영국 저택의 도자기로 만든 굴뚝이나 일본의 잡화상점에서 본 생활오브제들 그리고 독일 함부르크의 날씨와 기후에서 받은 인상과 같은 여행지에서의 기억들, 고향 앞바다에서 본 풍경과 같은 현실의 일상적인 풍경의 편린들이 차용된 이미지와 무분별하게 놓이고 엮이고 재구조화된다. 작가만의 현실성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이고 문법이지만, 그 경우는 특히 세월호를 참조할 때 좀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때의 현실성은 지역성과 지엽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데, 개인사나 사사로운 층위에서 의미 부여된 사건의 경우에 이에 대한 정보가 인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면 그림의 의미는 그저 오리무중이고 무분별해보일 따름이다. 



임현정, Figures by the Sea,#U00a0, 2014, 종이에 아크릴, 파스텔, 104x282cm


임현정, Somewhere, 2012, 캔버스천에 초크, 160x350cm


더욱이 차용된 이미지 자체도 그렇지만 작가가 기대고 있는 방법론, 이를테면 자동기술법, 자유연상기법, 의식의 흐름기법에 의해 하나로 놓이고 엮이고 재구조화된 이미지의 의미란 기본적으로 열린 것일 수밖에 없고,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모든 해석을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의미가 결정되는 지점은 저자가 아닌 독자 쪽이다(저자의 죽음). 미셀 투르니에는 책을 절벽에 그리고 활자를 흡혈박쥐에다 비유한다. 책장을 여는 순간 절벽에 붙어 잠자고 있던 흡혈박쥐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독자들의 피를 빨면서 독자를 울리고 웃긴다. 잠재적인 의미가 비로소 진정한 의미로 개화되는 그 극적인 순간이며 장관에 저자를 위한 자리는 없다. 독서를 안내해줄 매뉴얼도 없다. 그저 잠재적인 의미(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의미)가 독자 앞에 던져질 뿐. 독자의 처분에 맡겨질 뿐. 그렇게 독자는 저자가 부재하는 장소에서 읽고, 저자를 가로채면서 쓴다(작가적 텍스트). 

여기서 작가에게 주문하고 싶다. 혹 그림의 의미가 횡설수설하고 오리무중이며 무분별하게만 남겨지지는 않을까, 현실성을 담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미적 장치 혹은 개연성을 위한 장치 정도는 마련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렇게 염려하는 순간 전형이며 클리세의 기획(모든 무분별한 것들을 분별하려는 기획)에 발목 잡히고 만다. 어차피 모든 무분별한 것들은 분별되기 마련이고, 모든 무의미한 것들은 의미로 전화되기 마련이다. 나아가 아예 분별한 것들이 있는 만큼이나 무분별한 것들도 있고, 의미보다 더 의미가 있는 무의미한 것들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무분별한 것들을 부여잡는 것, 무의미한 것들을 물고 늘어지는 것만이 유일한 전략일 수 있다. 여하한 경우에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없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현실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비현실도 포함된다. 그렇게 의미들이 저절로 생성되고 변질되고 스스로 폭발하도록 내버려두라는 거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