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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희 / 감자를 닮은 사람들

고충환



미에 대한 기준이 상대적이지만 감자는 한 눈에도 작고 못생겼다. 감자를 특정할 만한 개성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두루뭉술하게 생긴 형태의 표면에 곰보처럼 패인 씨눈 자국이 개성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 곰보자국마저도 감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곰보자국이라면 되는대로 생긴 자갈돌이나 막돌의 표면에도 많다. 막돌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생긴 꼴이 꼭 감자를 닮았다. 두루뭉술하게 생긴 감자와 되는대로 생긴 막돌은 그래서 잘 구분되지도 않는다. 

더욱이 그 둘을 그림으로 옮겨 놓으면 구분은 아예 오리무중에 빠진다. 주변과의 관계, 이를테면 밭과 감자, 강과 막돌이 어우러진 상황논리가 뒷받침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자체만으로는 도대체 뭘 그렸는지 알 도리가 없다. 여기서 상황논리는 다르게는 관계에 해당한다. 사물대상에 대한 인식작용은 이런 상황논리며 관계에 연동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상황논리 내지는 관계를 매개로 사물대상을 인식한다. 여기서 상황논리 내지 관계를 들어내 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바로 추상화가 일어난다. 

알만한 사물대상이 졸지에 추상이 돼버린다. 그 자체 구상과 추상이 갈리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결국 현실인식에서 사물대상이 놓인 자리에 해당하는 상황논리며 관계에 대한 이해는 결정적이다. 그걸 비틀면 알만한 형상도 낯설어지고 빤한 현실도 특별해진다. 여기에 창작의 비밀이 있고 작업의 기술이 있다. 창작주체가 현실에 어떻게 간섭하고 현실을 어떻게 비트는지 여하에 따라서 창작의 질이 결정된다. 

이규희의 그림이 그렇다. 적어도 소재로는 감자를 그린다. 그럼에도 작가의 그림은 감자 같지가 않다. 보기에 따라선 감자는 차치하고라도 다른 알만한 형상과는 거리가 먼, 그저 무분별한, 혹은 다만 형식논리에 천착한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감자를 그린 것(적어도 소재 상으론)이면서 동시에 감자를 그린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림에서 감자는 감자 자체로서보다는 어쩜 감자가 아닌 다른 무엇을 그리기 위한 구실일지도 모른다. 그럼 정작 작가가 그리고 싶은 그 다른 무엇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관건이 되겠다. 

감자와 막돌을 비교했다. 감자와 막돌은 이렇다 할 개성 없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가장 흔한 것 중에 속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뭔가 친근하게 다가오는 점이 있지가 않은가. 개성 없이 생겼다는 건 흔하게 생겼다는 것이고, 흔하게 생긴 건 양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오히려 더 주목 받지 못하는 것들의 속성이기도 하다(자본주의 메커니즘의 핵심인 교환가치는 사물대상 혹은 존재의 희소가치와 관련이 깊다). 그 꼴이며 처지가 꼭 우리 보통사람들을 닮았다. 작가가 감자를 그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요리를 위해 감자를 깎다가 불현듯 그것이 자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먹음직스럽지만 동시에 그 속에 독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고(존재의 이중성), 되는대로 생긴 것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면서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그 자체로 완전한 자연), 특히 자신의 존재를 땅 속 어둠 속에 잉태하고 있는 것(존재의 어두움)에 공감했다. 

부연하면 감자의 독에 해당하는 솔라닌은 존재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닮았다. 묘약이면서 동시에 독약이기도 한 파르마콘(자크 데리다가 이성을 내파하기 위해서 호출한 개념)을 닮았다. 몸은 현실에 붙박여 있으면서 머리로는 비현실을 꿈꾸는,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이상, 현실원칙과 일탈과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를 닮았다. 그리고 감자는 특이하게도 90에서 120일 정도의 휴면기간을 갖는다. 수확한 이후 적어도 일정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싹을 틔운다는 얘기다. 실질적으로는 저장에 용이하게 작용하면서, 상징적으론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 자기숙성기간을 갖는다는 얘기다. 감자가 땅속에서 자기를 키운다는 사실도 흥미로운데, 하이데거의 세계와 대지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대지는 은폐를 속성으로 하며 진리를 자기 속에 품는다. 그렇게 진리는 은폐와 어둠 그리고 재생을 위한 통과의례로서의 죽음과 관련이 깊다. 땅 속에, 어둠 속에, 죽음 속에 자기를 잉태하는 감자가 바로 그 진리를 주지시킨다. 

다시, 작가는 감자를 그린다. 그러나 사실은 보다시피 감자가 아닌 감자의 속성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감자의 속성이 아닌 감자에 이입한 자기를 그리고 감자에 동화된 존재 일반을 그린다. 그러나 알다시피 작가는 감자가 아니고 존재 또한 감자가 아니다. 이런 아님이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감자(특히 감자의 생김새 혹은 감각적 닮은꼴)에 구애받지 않게 해준다. 그럼에도 여하튼 감자에 이입한 자기를 그리고 감자에 동화된 존재를 그린 것이다. 이 사실이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다시금 감자라는 소재에 구속시킨다. 이처럼 감자를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감자에 구속되면서 동시에 감자로부터 자유롭다. 이런 이중성 혹은 양가성이 감자라는 소재의 특정성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거의 추상에 가깝게 나타난 작가의 그림을 설명하게 해준다. 

이를테면 감자는 비정형의 덩어리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감자는 흙속에서 자란 것인 만큼 흙색을 간직하고 있다. 동시에 감자는 씨눈을 가지고 있고 새순과 새싹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화려하고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다. 수더분한 색깔과 화려한 색깔이 대비되고, 순한 성질과 치명적인 성질이 비교된다. 작가는 감자의 이 성질들 그대로를 재현하는 대신 그림 속으로 불러들여 회화의 형식논리 속에 풀어놓는다(해체시킨다). 그래서 회화의 형식논리와 감자의 성질이 구분되지가 않는다. 그래서 얼핏 회화의 형식논리가 지배적이지만, 잘 보면 감자의 소재적인 성질이 보인다. 

회화의 형식논리로 치자면 작가의 그림은 추상표현주의에 가깝다. 추상표현주의는 다르게는 액션페인팅으로 알려져 있고 순 우리말로는 몸 그림이다.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감각은 스쳐 지나갈 뿐 머무르지 않는다. 감각의 시간은 지속이 아닌 순간이다. 즉각성과 즉흥성, 우연성과 우발성이 감각의 형식이다. 응축된 순간의 형식이다. 이런 사실이 드로잉은 물론이거니와 회화에서마저 드로잉이 강한 작가의 그림을 이해하게 해준다. 응축된 순간이 채 지나가기 전에 부여잡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감각적이다. 계획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예기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고, 결정적인 것에서 시작되지만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경우로 끝난다. 그래서 어쩌면 감각은 미처 가닿은 적이 없는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놓고, 그렇게 열린 지평을 자기화하는, 그리고 그렇게 자기표현의 가능성의 지평을 확장하는, 그런 과정인지도 모른다. 때론 자기도 모르는 감각의 가능성을, 그리고 몸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미지의 영역을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고, 자기를 송두리째 미혹의 범주에다 던지는 행위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과정이며 행위는 이처럼 작가의 그림을 해명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회화가 감각을 만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와 관련한 보다 일반적인 사실을 알게 해준다. 그렇게 작가는 감자를 그리고, 자기를 그리고, 존재 일반을 그리고, 몸을 그리고, 감각을 그리고, 회화를 그리고 있었다. 감자여도 좋고 굳이 감자가 아니어도 무방할,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감자 그림으로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치자면 반 고흐가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일 것이다. 고흐는 원래 전도사가 되길 원했지만 불같은 성격 탓에 퇴짜를 맞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찾아간 곳이 탄광촌이다. 불쌍한 사람들을 그린다는 생각보다는 그림 자체가 또 다른 전도의 한 형식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을 그리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감자를 닮은 사람들이 감자를 먹는, 땅의 자손들이 땅의 소산을 먹는, 그래서 감자와 사람과 땅의 성분과 질감이 구별되지가 않는, 그런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동화가 지극한 지경에 이를 때 일어나는 일이다. 공감이 진정성을 얻을 때 가능한 일이다. 

작가는 감자에게서 자기를 보고 존재일반을 본다. 이 역시 동화의 한 지경으로, 그리고 공감의 한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당신은 어떤 사물대상과 동화하고 어떻게 공감하는지를 묻는 것 같다. 감자여도 좋고 굳이 감자가 아니어도 무방할, 그런 다른 어떤 미물하고라도 동화하고 공감하는 삶을 사는지를 물어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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