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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열 / 유토피아, 저기 없는 곳/것을 그리워하는

고충환



왕열의 그림은 크게 유토피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세세한 차이를 도외시하고 보자면 각각 현실을 반영한 그림과 상상의 공간을 그린 그림이다. 연대적으론 대략 199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그려진 겨울나기 시리즈와 중반(1995년?)의 입체작품 자연시공간 시리즈가 전기에 속하고, 이후에는 줄곧 신무릉도원 혹은 유토피아 시리즈를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하고 심화해온 편이다. 이렇듯 작가의 그림은 외관상 유토피아를 기점으로 현실공간과 상상공간이 구분되는데, 그러나 그 관계는 별개의 공간(그리고 공간인식)으로서보다는 사실상 그 이면에서 상호작용하고 상호 삼투되는, 상호간섭이 이루어지는 경우로 봐야 한다. 그 다루는 주제에 근거해 전기와 후기가 구별되면서도, 공간 혹은 공간인식(현실 혹은 현실인식?)을 매개로 전기와 후기가 하나로 연동되고 연속되는 경우로 보아야 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현실이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상상이 있을 수가 없고 상상할 수 없는 현실 같은 것은 없다. 진즉에 상황주의자들은 현실을 영화에다 비유한 적이 있다(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소아이어티). 우리 모두는 영화 속을 산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비현실을 산다. 현실을 중계하는 TV뉴스에서 그 현실(현실과 비현실이, 상상과 현실이 넘나들어지는 현실)은 매일같이 실감되고 증명된다. 이처럼 현실공간과 상상공간은 서로 참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공간은 점차 상상공간을 닮아가고, 급기야 상상공간은 현실공간의 거울이 된다. 작가의 그림에서 유토피아는 그렇게 현실공간과 상상공간을 매개하고 있었고, 현실공간인식과 상상공간인식을 중재하고 있었다. 

겨울나기와 자연시공간 시리즈. 여차하면 땅과 평면을 이룰 듯 야트막하게 엎드린 판잣집들 위로 아마도 도시 문명의 아이콘일 높다란 건물들이 짓누르고 있는 겨울나기에서 작가의 시선은 건물보다는 판잣집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보다는 겨우살이들에 자기를 내어주고 싶었고 감정이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목도 겨울나기다. 비록 전통적인 수묵과 과감한 생략으로 그려진 암시적인 그림이어서 겨우살이들의 세세한 살림살이를 엿볼 수는 없지만, 암울한 기운이며 응축된 정서만큼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누구랄 것도 없이 겨울이 빨리 지나가주기만을 바라며 잔뜩 웅크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이다. 

그리고 작가는 자연시공간 시리즈에서 그림을 그리는 대신 그림을 만든다. 바위를 그리는 대신 바위 그대로를 떠낸다. 알다시피 전통 산수화는 자연이 소재인 것이고, 그렇게 그려진 가상적인 자연(관념 산수) 속으로 귀의하고 싶은 욕망이 주제다. 그런데 작가는 가상적인 자연을 그리는 대신, 아예 자연 자체를 그림 속으로 들였다. 그건 그림의 한계 너머로 수석과 분재 그리고 정원이 등록된 욕망의 지점에, 말하자면 자연을 소유하고 싶고 사유화하고 싶은 욕망의 지점에 맞물린다. 상품화된 자연의 논리로 치자면 디즈니랜드와 원더랜드, 인공폭포와 모조동굴의 연장선에 놓인다. 자연과 사물이라는 차이를 도외시하고 본다면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앤디 워홀의 재 제작된 레디메이드와도 통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작가는 더 이상의 작업도 논의도 진척시키지는 않는다. 여기로 해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여기로만 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하튼 작가의 그림에서 막간처럼 남겨진 대목이다. 

신몽유도원도 혹은 유토피아 이후. 작가의 근작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로 치자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원색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다른 색들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적색 아니면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색채감정이 발견된다. 전통적인 한국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교적 색채에 대한 수용 폭이 큰 편인 서양화에서조차 파격적이다. 청색과 적색이 모노톤을 이루는 화면이 얼핏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보이는데, 작가의 성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유토피아의 표상에 해당하는 색채감정 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원색이 강조되는 만큼 그 위에 얹히는 모티브는 최소한의 선묘로만 간소화된다. 과감한 생략과 일격을 바탕으로 사물의 됨됨이를 설명하는 대신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회화는 암시의 기술이다). 

원색은 서양화의 전면균질회화(올오버페인팅)에서처럼 플랫 한 색면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통적인 수묵의 선염법에서처럼 화면에 스미듯 번져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번지면서 운무를 만들고 계곡을 만들고 폭포를 만든다. 산을 중첩시키고 원근을 조성한다. 딱히 경계를 짓지 않으면서 하늘을 정의하고 땅을 한정한다. 굳이 그리지 않으면서 경계가 지어지고 지워지는 그림이 습윤한 대기의 기운마저 머금는다. 전통적인 여백의 의미를 나름의 방법으로 재해석한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이를테면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식의. 경계 짓지 않으면서 경계지우는 식의. 그림은 그렇게 몽몽한 분위기와 함께 일말의 비현실적인 인상을 준다. 아마도 지금 여기의 현실이 아닌, 저기 그곳을 지향하는 유토피아의 주제의식에 부합하는 분위기이며 인상일것이다.
 
이 몽몽한 분위기의 화면 위에 작가는 모티브를 올려놓는데 산세며 나무, 새와 말을 그린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작가는 유토피아라는 큰 제목과 함께 각각 동행과 명상이라는 작은 제목으로 부른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새 그림을 동행이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말 그림을 명상이라는 제목으로 부르는 것이 흥미롭다. 여기서 그림과 제목은 서로 부합하는데, 이를테면 대개는 두 마리 이상이 그려진 새 그림과 동행이라는 제목이, 그리고 저 홀로 그려진 말 그림이 명상이라는 제목과 어울린다. 

삶은 외로운 것이고, 동행하면 외로운 삶이 반감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말 그림은 이보다는 근본적인 것, 이를테면 외로운 삶 자체를 명상하는 것일 터이다. 명상은 철저하게 개인만의 몫이다. 동행에서처럼 나누어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존재가 외로우니 삶도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쩜 존재가 외로운 건 당연한 일이다. 말하자면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외로움은 상대적인 외로움(이유가 있는 외로움)이 아니라 절대적인 외로움(이유가 없는 외로움)이며 존재론적인 외로움이다. 그렇게 작가는 비현실적인 그림 속에 현실적인 염원(요새말로 치자면 욕망)과 존재론적 자의식을 담았다. 

흥미로운 건 또 있는데, 새의 꼴이 예사롭지가 않고 말의 생김새가 평범하지가 않다. 새의 긴 목과 말의 긴 다리가 그것이다. 얼핏 실재 그대로를 그린 것 같지만, 그래서 그냥 보아 넘길 수도 있는 일 같지만, 사실은 일부러 강조한 경우로 보인다. 그럼 작가는 굳이 강조를 하면서까지 담고 싶고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라도 있는 것일까. 말을 하자면 새의 긴 목은 보다 멀리 내다보기 위한 것이고, 말의 긴 다리는 보다 멀리까지 내딛기 위한 것이다. 각각 비상과 이상의 의미를 담았다. 땅에서 날아오르는 걸 비상이라 하고, 일상에서 탈하는 것을 이상이라고 한다. 하나같이 현실에서의 탈(일탈)을 표상한다. 그게 뭔가. 그리움이다. 새의 목이 길어진 것은 여기에서 저기를 그리워하느라 길어진 것이고, 말의 다리가 길어진 것은 이곳에서 저곳을 그리워하느라 길어진 것이다(말의 긴 다리는 특히 여행에 대한 작가의 바람과 관련이 깊다). 

여기와 이곳이 현실인식을 반영한다면, 저기와 저곳이 현실에서 일탈한 의식 혹은 자의식을 반영한다. 다시, 여기와 이곳이 토피아를 반영한다면, 저기와 저곳이 유토피아를 반영한다. 그렇게 나는 비록 현실원칙에 붙잡혀 있지만, 적어도 정신만큼은 어떠한 현실에도 구속 받지 않는다. 인간은 흥미롭게도 몸과 정신을 분리할 수가 있고, 정신을 몸 밖으로(내면으로) 내보낼 수가 있다. 그렇게 나는 토피아(장소)에서 유토피아(탈장소)로 자신을 내보낼 수가 있다. 자신의 한계 너머로 의식을 확장할 수가 있다. 사실 그 확장은 그림 속 자연과 더불어서 소요하고 싶어 했던 전통적인 산수화를 그린 화가들과 다르지가 않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유토피아라는 주제의식에 가닿고, 그 가닿음은 재차 전통적인 그림에 가닿는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를 확장하고 한국화를 확장한다. 다시,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목이 긴 새와 다리가 긴 말은 현실원칙에 붙잡혀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원칙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비상을 꿈꾸는, 저기 저곳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초상이면서 우리 모두의 초상이기도 한 것이다. 

유토피아는 없다. 그 없는 곳을 통해 (있는) 삶을 돌아보는 것(상상공간을 통해 현실공간을 돌아보는 것)이 내가 유토피아를 그리는 이유이다. 나에게 무릉도원(유토피아)은 여행과 명상을 위한 구실이다.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게 해주는(실상은 그림을 매개로 내면으로 여행하게 해주는) 계기이다. 작가의 노트를 옮겨본 것이지만, 그 구실이며 계기는 전통적인 산수화를 그렸던 화가들의 그것과도 통하고, 현실원칙에 붙잡힌 삶을 사는 현대인의 그것과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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