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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광 / 텍스트로서의 얼굴, 소통하기의 어려움

고충환



손민광은 인물을 그린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물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도시의 야경을 그렸다. 주로 원거리에서 포착한 도시의 야경 위로 무슨 실타래처럼 멀리 폭죽이 터지는 풍경이었다. 깜박이는 인공불빛을 점묘로 표현한 야경 위로 발광하는 폭죽이 도시에 축복처럼 내리는 풍경이었다. 그래서 도시에 대한 예찬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정작 작가는 도시예찬 대신 상상예찬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도시의 야경이 모여 거대한 동물의 실루엣 형상을 이루고 있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도시의 야경 위로 옮겨다놓은 것도 같다. 그렇게 작가는 도시의 야경과 더불어 꿈을 꾸고 있었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헤아리고 있었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어둠 속에 깜박이는 불빛이 꿈처럼 아롱거리는 그림이었다. 그 몽몽한 그림 속에 작가는 어둠 속에서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바람을 담았다. 그 바람은 작가의 바람이었고, 도시에 정주하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나무를 그렸다. 나무는 알다시피 평생을 한자리에 붙박이로 산다. 그렇게 붙박이로 살면서 사실은 세상의 끝과도 소통하는데, 바람을 매개로 소통하고 공기를 통해서 소통한다. 그 꼴이 그대로 작가를 닮았다. 자신도 나무처럼 비록 붙박이로 살지만 상상을 매개로 세상 끝과 소통할 수가 있다. 그렇게 나무는 작가의 자화상이 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생쥐 이야기를 그리는데, 생쥐로 하여금 이번에는 자화상을 넘어 아예 자신의 분신으로 삼았고 캐릭터로 삼았다. 그래서 생쥐로 하여금 자신이 꿈꾸는 세상의 끝까지 보낼 수가 있었고, 자신이 상상하는 일들을 현실화할 수가 있었다. 무지개가 웃고 레고가 말을 하는 자신만의 원더랜드를 실현한 것인데, 그 자체는 현실과 관련한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어른들이 상실한 유년의 꿈을 되찾아준 것(환상으로의 도피를 감행하게 해준 것)이면서,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을 주지시키는 현실원칙(환상으로의 도피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될 수는 없다는)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순진무구한 판타지 이면에 현실원칙(초자아)의 희미한 그림자를 숨겨놓고 있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렇게 작가는 도시를 그리고 야경을 그렸다. 폭죽을 그리고 별자리를 그렸다. 나무를 그리고 생쥐를 그렸다. 그 외관은 다 다르지만, 사실은 사물대상에 자기를 이입한 것이란 점에서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을 그린 것이고 관점(시점)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사람을 그리고 얼굴을 그리는데, 공교롭게도 그 주제가 관점이고 시점이다. Various points of view. 다양한 관점 혹은 시점이다. 아마도 사람을 비롯한 사물대상의 됨됨이 특히 가치는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보는지 여하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담았을 것이다. 사물대상을 보는 관점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담았을 것이다. 사물대상을 보는 다양한 시점, 열린 시점을 담았을 것이다. 사물대상을 보는 가치관이 저마다의 시점 혹은 관점에 연동되는 것임을 주지시키고, 사물대상의 절대적 가치관을 의심하고 상대적 가치관을 주장하는 것일 터이다.  


소재로 등장하는 인물들로는 알만한 유명인들, 연예인들이 많다. 이를테면 찰리 채플린, 마릴린 몬로, 베토벤, 바그너, 모차르트, 앤디 워홀 등등. 이런 역사적인 인물이며 연예인들과 함께 자신을 그리고 주변인을 그린다. 이를테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은. 그리고 TV와 SNS 같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만나지는 익명적인 주체들과 같은. 흥미로운 사실은 역사적인 인물과 연예인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그리는 것에 반해, 정작 자신과 주변인은 알아볼 수가 없게 그린다는 점이다. 워낙에 그림 자체가 사실적이고 재현적인 것은 아니어서 자기동일성의 기준을 곧이곧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지목해 그린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알아볼 수 없는 식이라면 여기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고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그 의미며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관건이 되겠다. 그게 아마도 작가의 진정한 주제의식이 될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단순히 인물의 초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인물의 초상은 다만 구실일 뿐이다. 그럼 뭘 그리는가. 매체노출과 관심사 그리고 기억의 상관성을 그린다. 매체에 노출된 인사들은 대개 공인들이다. 그리고 공인들은 나와는 별반 그리고 어쩌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본다.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들조차도. 이에 반해 주변인들은 공인들에서와 같은 추상적인 거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쩌면 공인들에 비해 더 가깝고 더 살갑고 더 생생하고 더 잘 기억되는 것이 맞다. 그래서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맞다. 그런데 정작 그림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추상적 인격체인 공인들은 생생하게 그리고 주변인들은 흐릿하게 그려진다. 

여기서 우리는 기억마저도 그리고 관심사마저도 제도적이라는 사실에 맞닥트린다. 흔히 기억은 그리고 관심사는 개인적인 영역으로 알고 있고 사사로운 범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다. 지금과 같은 매스미디어의 시대에 개인의 기억과 관심사는 매체노출의 빈도수에 연동된다. 학교와 군대, 대학 동아리와 군소 커뮤니티들, 매스미디어와 SNS, 신문과 잡지와 같은 언론 매체들, 말하자면 제도적 장치들이 기억을 만들고 사사로운 관심사마저 생산한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이며 억측이라고 할까. 그 기억을 인공기억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제도에 유익한 기억,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편 가르기가 분명한 기억, 공통선에 유용한 기억일수록 더 잘 각인되도록 우리의 기억장치는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각인된 기억이 다름 아닌 나의 기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 기억뿐이랴. 추억과 향수, 사고와 인식, 가치와 가치관, 관점과 시점, 그리고 의식과 심지어는 무의식마저도 이런 인공기억(초자아)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공인을 알아볼 수 있게 그리고 주변인을 알아볼 수 없게 그린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런 사실, 곧 제도적 기억, 인공기억, 초자아가 개별주체에게 심어준 기억장치를 주지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사회학적 의미를 갖는다. 이제 다시 회화의 본성 문제 아니면 형태심리학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작가의 그림에는 대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의 그림이 많다고 했다. 도대체 그리는 건지 아니면 지우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알고 있는 걸 드러내고 싶은지 아니면 알고 있는 걸 애써 덮어서 가리고 싶은지가 오리무중이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은 그리는 과정과 지우는 과정, 드러내는 과정과 숨기는 과정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고 중첩돼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동시에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욕망이 자기를 실현하는(무의식적인 욕망이 부지불식간에 표출되고 들키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지우면서 그리고 숨기면서 드러내는 그 과정은 너무 내밀한 것이어서 잘 붙잡히지가 않는다. 작가의 그림은 대개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순간적인 인상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빨리 그리는 것은 중요한데, 모델에 대한 순간적인 인상(아마도 그의 인격이 응축돼 있을)이 사라지거나 희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대방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혹은 그것과 소통한다는 것이다(예술은 소통의 기술이다). 실제로 마주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모델을 끊임없이 자기 앞으로 호출하는 행위이다. 네게서 나에게로 그리고 나에게서 네게로 뭔가가 건너가고 건너오는 긴박한 행위이다. 그리고 그렇게 너와 시시각각 마주하면서 번민과 갈등, 욕망과 죄의식, 환희와 쾌락, 분노와 폭력, 화해와 용서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관심하고 무관심한, 유심하고 무심한 드라마가 전개된다. 

작가의 그림에는 바로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적인 인상이, 응축된 인격이, 긴박한 드라마가 고스란히 탑재돼 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의 소통을 그린다. 석고상 위에 마구 덧칠해 가린 입체작품에서 암시되듯 혹 낯설게 하기도 겨냥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뭉개진, 알 수 없는, 야릇한, 희미한, 격렬한, 폭발하는 것 같은, 나이프를 칼처럼 휘두른 얼굴들이 소통하기의 어려움을 침묵으로서 증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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