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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 / 숨겨진 의미와 내면적인 아름다움

고충환



수년전 작가 박미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상실이었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사물이 흔들리는 것처럼 겹쳐보였다. 원근감을 상실하면서 평면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작가는 다르게 보이는 비전 그대로를 그렸다. 작가의 그림 그대로다(여기서 그대로는 수사적 표현으로서, 그대로는 아니지만 작가의 그림이 착상되고 정초되는 근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상실은 사실은 상실이 아니었다. 시력을 상실했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얻었다. 시력을 상실하지 않았더라면 열릴 수 없는 세계였고 얻을 수가 없는 방법이었다. 시력의 상실이 열어준 세계였고 방법이었다. 

그림보다 더 중요한 것, 아니면 그림에 전제되는 것이 보는 방법이다. 세계는 단순하게, 전체적으로, 오롯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세계가 자기를 열어 보이는 비전은 복잡하고, 파편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분별하다.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그림이란 이처럼 복잡하고 파편적이고 무분별하게 드러나 보이는 세계의 비전의 스펙트럼 중 임의의 한 지점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지점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 과정이라고 했다. 똑같은 사물대상을 그려도 저마다 그림이 다 다른 것은 이 때문이라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사물대상을 보는 비전의 다양한 형식을 가질 수가 있게 되었다. 여기서 세계가 자기를 열어 보이는 비전의 스펙트럼을 객관적인 지평이라고 한다면, 그 스펙트럼 중 한 지점을 임의로 선택하는 주체의 행위는 주관적 행위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그림이란 객관적 지평에 대한 주체의 선택과 간섭의 소산이며, 어쩌면 적극적인 해석 행위의 결과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들은 저마다 적극적인 해석 행위를 매개로 세계의 비전을, 세계의 무분별한 비전을, 어쩌면 세계가 숨겨놓고 있을 비전을 열어 보인다. 작가들의 해석이 아니라면 결코 열리지 않을 비전이고 존재하지 않았을 비전이다. 



향(香).그리고-1-, 2016, 혼합재료, 70X70cm


향(香).그리고-2-, 2016, 혼합재료, 70X70cm



그러므로 박미의 그림은 상실을 매개로 이런 비전에 도달한(저절로 도달한? 어쩌면 절실하게 도달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작가의 적극적인 해석 행위가 열어놓은 비전의 결과라고 할 수가 있겠다. 아마도 시력의 상실은 작가로 하여금 세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도록 독려하는 계기로 작용했고, 그 과정에서의 절실함이 이처럼 다른 종류의 비전에 도달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해석행위로 인해 우리는 세계가 존재하는 형식의 다른 한 지점을, 세계가 드러나 보이는 다른 비전 하나를 그 객관적이고 무분별한 지평으로부터 건져 올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상실은 결여고 결핍이다. 결핍은 예술의 원동력이다. 결핍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토마스 만은 예술이란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그건 말하자면 절실함과 간절함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상실한 걸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며, 상실한 것 때문에 아파하는 통증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굳이 신체의 상실이 아니더라도 상실감은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이 되었다.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증거가 되었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하고 원형을 상실하고 존재를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신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도저한 상실감이 현대인을 온통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이란 뭘 상실했는지를 주지시키고, 가능하다면 상실한 걸 회복하고 복원시켜준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하고자한다면(의지의 문제),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능력의 문제) 잠재적인 창작주체로서의 자질과 환경을 이미 타고난 사람들이다. 아이러니한 현실이지만, 예술이 자생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이미 주어진 것이다. 상실의 시대에 위대한 예술가들이 많고, 예술이 상실을 노래하고 아파할 때 그 예술은 더 아름다운 법이다. 어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런 상실이 아니라면, 그리고 적어도 예술이 진정성을 담보하는 것임을 전제한다면, 예술이 할 수 있는 다른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 

박미의 작업은 바로 이런 상실감이 동력이다. 상실을 상실감으로 건져 올리고 상실감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어서, 그리고 그렇게 현대인의 보편적인 징후와 증상을 주지시키는 것이어서 더 신뢰가 가는 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가 그동안 그린 그림이 비로소 일목요연해지고, 그간의 주제의식이 내포하고 있던 일관성이 눈에 들어온다. 각각 그림자놀이와 기억 닮기 그리고 근작에서의 향(기)에 이르기까지. 먼저 그림자놀이란 손바닥 두 개를 포개고 겹쳐 여러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놀이이다. 일종의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한 그림자놀이는 사실상 그 형태의 의미를 알아맞히는 의미놀이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그림자놀이가 내포하고 있는 형태의 의미는 비록 형태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임의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보기에 따라서 이렇게도 그리고 저렇게도 보이는 것이며, 굳이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형태가 아니더라도 그 자체가 이미 손이고 손모양이 만들어낸 한갓 그림자에 지나지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사물대상을 이렇게 아니면 저렇게 읽는 것은 사물대상 자체의 성질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사물대상을 읽는 주체의 관점 여하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관점으로 세계를 읽는다. 그러므로 그림자놀이는 이런 사람들 저마다의 관점의 차이를, 그리고 그 차이가 내포하고 있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의미를, 그 의미의 비결정성을 주지시킨다. 그림자놀이는 일종의 의미놀이라고 했다. 마치 그림자가 그런 것처럼 비결정적인 의미가 변태되는 놀이이며, 그렇게 변태되면서 다른 의미를 파생시키는 놀이이며,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의미들의 연쇄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기억 닮기는 단순하게 기억하기로 읽어도 되겠고, 그렇게 작가가 기억한 것을 옮겨 그린(아니면 기억 자체를 주제화한)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작가는 뭘 기억하는가. 빛 아래 사물대상의 형태며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던 때를 기억하고, 빛으로 인해 사물대상의 존재가 휘황찬란했던 때를 기억한다. 다시, 그렇다면 작가는 그 기억을 어떻게 그림으로 옮기는가. 작가의 그림은 수천수만 개의 깨알같이 자잘한 유리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흡사 모판에 모를 심듯 화면을 모판 삼아 이 유리 알갱이들을 일일이 심는다. 그리고 그렇게 심으면서 형태를 만드는데, 대개는 손바닥과 손바닥, 사물과 사물, 여자 얼굴과 꽃의 실루엣 이미지가 하나로 중첩되고 포개지는 형태들이다. 멀리서보면 그렇게 포개진 이중이미지가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그 이중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입자들이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보면 이렇게 그리고 저기서 보면 저렇게 보인다. 마치 주체의 관점이 자석이라도 되는 듯 주체의 관점을 따라 이동하며 이미지가 변환돼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사물대상이 빛 아래 명확했던 순간을 그리고, 사실은 이중이미지가 암시하듯 불분명했던(어쩌면 사물의 존재의미는 한 번도 분명했던 적이 없었다) 기억을 그린다. 빛으로 인해 사물대상이 찬란하게 빛났던 기억을 그리고, 존재가 빛 알갱이들로 아롱거렸던 기억을 그린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향(기)을 그린다. 향이 사람에게 적용이 될 때 향은 향 자체로서보다는 저마다의 인격과 동격이 되고 내면과 동질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내면화된 인격이 은은하고 은근한 향(빛?)을 발할 때 우리는 그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흔히 외면적인 아름다움과 내면적인 아름다움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되면서 상호 작용적이고 상호 내포적이게 된다. 여기서 대개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이 외면적인 아름다움보다 더 결정적인데, 내면적인 아름다움이 더해질 때 외면적인 아름다움은 더 빛을 발한다. 나아가 어쩜 내면적인 아름다움에 의해서만이 외면적인 아름다움은 비로소 그 존재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고, 따라서 내면적인 아름다움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자체가 작가가 근작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를 일이다. 

근작에서도 역시 작가는 특유의 이중이미지를 유지하는데, 대개는 여자의 얼굴과 꽃 이미지가 하나로 포개진 형상을 그린다. 여기서 얼굴은 외면의 아름다움에 그리고 꽃은 내면의 아름다움에 각각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꽃은 여자에 의해 그리고 여자는 꽃에 의해 더 아름다워진다. 여인의 향기와 내면적 아름다움이 꽃의 메타포와 결부돼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그리고, 그 관계에 작동하는 사회적 관습을 그린 것이다(모든 메타포는 사회적 관습의 산물이다). 그렇게 작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향(기)은 어떠신지.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시각적이다(이중이미지). 그리고 촉각적이다(작가의 그림은 자잘한 유리 알갱이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때로 기호와 언어의 한 형식으로서 점자가 도입되기도 한다). 나아가 후각적이기 조차하다(작가의 그림에선 향기가 난다. 비록 실제로는 아니지만,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내면의 향기며 인격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공감각을 실현한다. 그리고 공감각은 작가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소통에 연동된다(각각 그림자놀이와 기억 닮기 그리고 향으로 나타난 주제의식이 사실상 의미를 다루는 것이란 점에서, 그리고 소통이란 다름 아닌 의미전달상의 문제란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소통은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아지는 감각의 전방위적 방향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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