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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선 / 회화적인 풍경, 회화와 풍경 사이

고충환


눈앞에 제시되는 사물은 무수한 빛의 변화로 인해 제시되는 빛의 유형들이며 그 자체로는 직접 지각될 수는 없는 모호한 상태로 주어진다. 따라서 사물을 지각한다는 것은 무수한 빛의 변화로 인해 모호한 세계의 모습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 가운데 하나의 해석을 선택하는 것이며, 회화적 재현(재현적인 회화)이란 그렇게 선택된 회화적 관점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이다. 미술사가 곰브리치가 지각과 재현의 임의성에 대해 밝히고 있는 대목을 인용해본 것이다. 

풍경은 그 자체로는 지각될 수 없는 모호한 상태로 주어진다. 그래서 풍경 자체며 전체를 객관적으로 지각하고 재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지화면이 아닌 동영상이라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풍경을 낱낱이 분해해 켜켜이 쌓는다고 해서 풍경 자체며 전체가 오롯이 복원되지는 않는다. 부분은 부분일 뿐. 전체는 전체일 뿐. 부분의 집합은 전체가 아니고 전체는 부분으로 나눠지지가 않는다. 풍경을 지각하고 재현하는 일은 이처럼 언제나 지엽적이고 부분적이다.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다. 여기에 풍경과 주체 사이에 해석이 끼어든다. 풍경 쪽에서 주체 쪽으로 건너오는 것과 주체에게서 풍경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만나지는 접점에,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들이 다 빗나가지만 그 중 만나지는 접점에 해석이 끼어든다. 기호가 먼저 오고 연이어 해석이 뒤를 따른다. 따라서 모든 풍경은 기호이며 해석의 대상으로서 주어진다. 00 자체가 아니라 다만 00처럼 보일 뿐인. 그래서 모든 풍경은 저마다 다른 세계를 열어놓을 수 있게 되고 열어놓는 것이 된다. 어쩌면 풍경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에서. 풍경을 지각하고 재현하는 일의 이중성이고 양가성이다. 

김혜선의 작업이 그렇다. 작가는 풍경과 회화 사이, 풍경과 지각 사이, 풍경과 해석 사이, 풍경과 선입견 사이에 위치하는, 그런 경계 위의 풍경을 그린다. 한쪽에 풍경이, 그리고 다른 쪽에 회화와 지각과 해석과 선입견이 위치해있는. 재현적인 그림이 다 그렇지만 특히 작가의 그림이 유독 그렇고, 더욱이 보기에 재현적이지만 실제로는 다만 재현적인 것으로 보일 뿐인 탈 혹은 비재현적인 그림이어서 더 흥미롭고 더 설득력을 갖는다. 나아가 회화와 풍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사실상의 주제가 아닐까 싶은, 흥미진진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어쩌면 재현적인 풍경 자체가 이미 기호화된 풍경이며 해석된 풍경일 수 있다는, 그리고 상상된 풍경일 수 있다는 지점도 건드리고 있다(외관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2010년 전시에서 이미 예비 된, 상당하게 근작을 예고하는 지점이기도 한). 

심상드로잉_겨울바다, 2016, 나이프, 유화, 50호

심상드로잉_달콤한 바다, 2016, 30호


작가의 그림은 옆으로 길다. 폭 자체가 세로로 서 있는 경우에서마저 그림 자체는 횡단을 향한다. 이처럼 횡단을 향하는 그림이 자연을 상기시키고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횡단을 향할 때 자연은 가없어지고 종단을 향할 때 풍경은 아득해진다. 여기서 자연은 가장자리가 없는 것의 메타포가 되고 풍경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의 알레고리가 된다. 가없고 아득한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알 수 있는 것의 경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자연은 가없는 것, 아득한 것, 알 수 없는 것의 경계 위에 서게 만든다. 그 경계가 내면으로 들어오면 심연이 된다. 그렇게 자연은 재차 내면이 투사된(외화 된) 심연 앞에 서게 만들고 자기타자 앞에 서게 만든다. 

작가의 그림엔 그처럼 가없고 아득한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 수평선이 보이고 파도가 만든 하얀 띠와 잔잔한 수면이 교차되면서 아득하게 멀어지는 풍경이 있다. 풍경 사이로 드문드문 뭍이 보이고 발치에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파도가 일어선다. 자세히 보면 각을 세우며 일어선 파도 속에 그저 하얀 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온갖 물색의 섬세한 스펙트럼이 있고 오묘한 뒤섞임이 있다. 수면이 빛에 반응하는 미묘함이 있다. 잠잠한가 하면 저돌적이고 멀어질 듯 가물거리면서도 삼킬 듯 육박해온다. 때론 융기되고 침강된 지각이며 지형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더러는 적요함으로 하얗게 질린 북극과 같은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풍경을 보는 것도 같다. 에토스적인 풍경과 파토스적인 풍경이 교차되는, 관조적인 풍경과 격정적인 풍경이 부침하는 저 생생한 그림을 어떻게 다 그렸을까 싶다. 그렇게 그림은 바다 같고, 강 같고, 지형 같고, 빙하 같다. 그리고 내면풍경 같고 심연풍경 같다. 아마도 다름 아닌 바로 그 풍경으로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엔 분명 있을 법한 풍경이고 볼 법한 풍경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생생한 풍경이 붓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재현적인 그림이 아니다. 붓이 아닌 나이프로 그린 것이고, 그것도 작가가 직접 만든 대형 나이프(건축현장에서 미장할 때 쓰는 칼쯤 돼 보이는)로 그린 것이다. 나이프는 당연히 붓의 섬세함을 따라잡지 못한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붓은 섬세한 표현에, 그리고 나이프는 대략적인 표현에나 어울린다. 그런데 작가의 그림은 대략적이지도 추상적이지도 않다. 생생하다.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재현한 것보다 오히려 더 생생하다. 흡사 전통적인 먹그림에서의 일격이며 일필휘지가 한 번의 붓질로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 대신 사물대상의 본질이며 본성을 정조준 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미학적으론 함축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고, 이런 함축이 가능해지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사물대상의 본성이며 본질을 읽고 표현하는 능력이 전제되어져야 한다. 작가의 경우에 함축의 대상은 풍경이었을 것이고, 평소 풍경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동화와 공감과 내면화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풍경의 본성과 본질에 대한 집요한 관찰이 있었을 것이고, 그 관찰을 감각으로 옮기는 지난한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를 지적하자면 이런 생생한 표현이 단순한 재현 곧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옮겨 그리는 묘사에 기인하거나 한정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생생한 표현을 얻는 한 방법일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이 보다는 사물대상의 본성이며 본질이 자기를 열어서 보여주는 순간(하이데거라면 세계가 개시되는 순간이라고 했을)을 포착해내는 감각적인 능력과 왠지 그것처럼 보이는 어떤 분위기(아우라), 그리고 여백과 암시와 같은 회화적 장치에 의존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작가의 생생한 그림 역시 이런 회화적 장치가 결정적이다. 그리고 부연하자면 이런 생생한 느낌이며 실감 자체는 실재와의 관계와 관련된다. 여기서 실재란 어쩜 전제된 것이기보다는 상상된 것일 수 있다. 상상한 것을 실재라고 착각하는 것일 수 있다. 인식작용이며 지각작용은 이처럼 알려진 만큼 투명하지는 않다. 그래서 다시, 실재란 어쩜 상상과 착각 사이, 직관과 개념화의 과정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탈 혹은 비재현적인 그림으로 재현적인 그림을 흉내 내는 작가의 그림 역시 그 사이 어디쯤엔가 위치해 있을 것이다. 


회화적 장치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안료의 물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대형 나이프로 두툼하게 발라올린 물감 덩어리가 전혀 둔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데, 빠르고 느리게 흐르다가 맺히는 순간순간을 거의 호흡의 감각으로 갈무리하는 것이 감각적 쾌감을 자아낸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작가의 그림은 그림의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패러다임에도 맞물린다. 회화의 됨됨이는 그 의미내용보다는 형식논리에서 온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물성이야말로 바로 그 형식논리 중 핵심요소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물성 자체, 색깔 자체, 질감 자체만으로도 이미 회화라고 보는 것이다. 회화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이 그 경우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그 지점을 의식적으로 겨냥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모더니즘패러다임을 자기화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재현적인 그림을 전유하는 그림, 재현적인 그림을 탈취해 재현적인 그림처럼 보이게 하는 그림, 그래서 재현적인 그림을 넘어서 또 다른 비전이며 지평을 열어놓는 그림을 감각적으로 그리고 담론 쪽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경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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