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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사람들과 더불어서 더 고독한 사람들

고충환


천 조각, 폐목과 녹슨 경첩, 부식된 철판, 빛바랜 회벽을 연상시키는 질박한 마티에르가 페인팅과 어우러진 김소형의 초기 작업은 그저 잡다한 오브제들을 그러모아 놓은, 감각적인, 그리고 회화적인 형식실험처럼 보였다. 하나같이 시간을 머금은, 존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오브제들이다. 이처럼 시간을 머금고 존재의 흔적을 간직한 오브제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희한하게도 어떤 풍경을 불러일으킨다. 그 풍경은 어떤 외재적인 풍경이라기보다는 시간의 저편에서 건져 올린 시간풍경이며, 작가의 내면에 가라앉은 내면풍경이며, 기억으로 되살려낸 기억풍경이다. 아득한 향수를 자아내는 그리운 풍경이다. 생생한 것들이며 실재하는 것들이 시간의 풍화로 산화하고 부식되고 녹아내린, 존재가 흔적으로 화해지고 정서적 질감으로 환원된, 그런 정서의 앙금이며 감성의 침전물 같다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 시간의 화신들을 내 안의 형상 아니면 내면의 풍경 그리고 기억의 흔적이라고 부른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존재에서 부재로, 유에서 무로 건너가는 것들, 기억에서마저 아득해진 것들이 남긴 흔적을 부여잡는다. 그 행위는 시간과 더불어서 시간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들을 애도하는 일종의 기념비적 제의랄 만하다. 


그리고 작가는 격자 패턴을 그린다. 추상처럼 보이지만 추상이 아니다. 사람들 저마다에게 할당된 방을, 집을, 공간을, 건물을, 도시를, 우주를 그린 것이다. 비록 그림에 사람은 없지만, 격자가 사람들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숨어있는, 아니면 꿈을 꾸는 고독한 모나드들을 그린 것이다. 한갓 단자들, 원자들, 모나드들로 축소된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 것이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숨어 있던 방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나와 웅크리고 앉아있거나 서성거린다. 줌아웃 기법으로 시점을 뒤로 빼보면 마치 원거리에서 포착한 도시 이미지와도 같은 무수한 격자들이며 모나드들 속에 그 사람들마저 묻힌다. 그렇게 작가는 격자 패턴을 매개로 도시 이미지를 그리고, 거대한 도시의 한 부속으로 매몰된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다. 


이처럼 적어도 외관상 작가의 전작에서 사람들은 등장하지가 않는다. 그는 다만 흔적이 불러일으키는 감성의 침전물로 그리고 도시의 모나드들로 암시될 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도 전면화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근작에선 사람들이 그림의 표면 위로 전면화한다. 잠재적인 사람들이 수면 위로 나온다는 점에서, (삶의 혹은 존재의) 풍경에서 사람들로 이행하는 것에서 전작과 근작은 하나로 통하면서 구별된다. 


소재 상으로 사람과 사람들(군상)을 테마로 한 것인데, 이는 크게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뉜다. 천으로 만든 사람들과 물감튜브를 짜서 그린 사람들이다.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실상 그 크기는 사람이 무색할 정도로 작다. 각각 새끼손가락 한마디를 채 넘지가 않는다(더러 이보다 좀 더 큰 것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이처럼 비록 그 크기는 작지만 정교한 사람들이 한눈에도 노동집약적인 작업임을 알겠다. 형형색색의 사람들 중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채로운 사람들이 어슷비슷하지만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실재 그대로이다. 반복의 연속 같지만 사실은 같은 날이 하나도 없는 일상(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 그대로이다. 이처럼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사람들이 저마다의 차이와 다름을, 그리고 삶의 다양한 질에 해당하는 희로애락을 주지시킨다. 살다보면 빨간색처럼 화려한 날도 있고 노란색처럼 화사한 날도 있다. 줄무늬 패턴처럼 맵시 있는 날도 있고 체크무늬처럼 심심한(다운된? 침착한?) 날도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허허로운 화면과 어우러져서 풍경의 한 요소를 이루기도 하고, 나무를 타 오르기도 하고, 무슨 새나 되는 것처럼 나무의 잎과 꽃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풍경을 이룬다. 인상적인 것은 나뭇잎과 꽃 대신 나뭇가지에 점경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인데, 수목에서 뻗어나간 나뭇가지들이 실핏줄을 연상시키고, 얼기설기 엮여있는 관계망을 연상시키고,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돌고 돌아 나와 네가 만나지는 인연의 망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일일이 천으로 정교하게 만든 사람들의 풍경이 시각적(알록달록한 색깔들에 연유한)이고 촉각적(텍스추어 곧 질감에 의한)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이처럼 천으로 만든 사람들과 함께 물감 튜브를 짜서 사람들을 그린다. 다채로운 색깔들을 동원해 다채로운 사람들을 그린다. 천 인형도 그렇지만, 튜브로 짜서 그린 사람들 역시 이목구비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이, 더욱이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저마다 표정이 살아있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고 사실적인 묘사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작가의 그림은 재현적인 그림은 아니다. 


다만 색색의 물감을 짜서 몸통과 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머리에 이목구비를 약식으로 그려 넣은 것뿐인데도 생생하다. 아마도 알록달록한 색깔 탓이 클 것이다. 물론 더러 얼굴이 생략된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마저도 이목구비를 그려 넣은 얼굴과 어우러져서 오히려 생생함을 더한다. 


그렇게 저마다 생생한 사람들이 빼곡하다. 사람들로 빼곡한 군중을 그린 것이고,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촘촘한 패턴을 그린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사람들이 보이고, 멀리 떨어져서 보면 군중이 보이고 패턴이 보인다. 그렇게 사람들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패턴 속에 묻힌다. 바로 군중 속의 고독을 그린 것이다. 군중은 보편적이고 익명적인 존재다. 개별적 존재가 보편적 존재 속으로 사라지고 유명한(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는) 개체가 무명한 존재 속에 묻힌다. 양가성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별성을 보존하고 싶고(알록달록한 색깔들에서처럼 저마다의 색깔을 잃고 싶지가 않고), 동시에 익명적인 존재 뒤에 숨고 싶다. 모순이고 이율배반이다. 그렇지만 어쩌랴. 


류시화 시인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다. 나와 네가 부닥칠 만큼 살을 맞대고 있으면 살가워져야 하는데, 그래야 마땅한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그리움은 거리가 있어야한다. 거리가 없어지면 그리움도 없어진다. 너무 가까우면 거리가 그립고 그리움이 그립다. 거리를 그리워하고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고독도 마찬가지. 고독은 거리가 있어야하고 그리움이 있어야한다. 그렇게 나는 네가 곁에 없어서 고독하고 네가 곁에 있어도 고독하다. 이처럼 작가는 사람들로 빼곡한 그림들을 매개로 군중 속의 고독을 그린다. 개별적인 존재와 익명적인 존재(군중)와의 이율배반적인 관계를 그리고, 자기를 보존하면서 상실하는 욕망의 이중성 내지 양가성을 그린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군중 속으로 숨는다고 했고 패턴 뒤에 묻힌다고 했다. 패턴 뒤에 묻힌다? 작가의 그림은 사람들을 그린 것이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사람들보다는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먼저 보이고 색깔들이 어우러진 패턴이 두드러져 보인다. 나비파 화가이면서 이론가이기도 한 모리스 드니는 그림이란 어떤 소재를 그린 것이기 이전에 노란색이나 파란색으로 색칠해진 평면이라고 했다. 그 말은 재현적인 회화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있고, 본격적인 추상미술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고,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주의를 뒷받침하는 전언을 포함하고 있다.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건 그림의 내용보다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이다. 


작가의 그림은 알록달록한 색깔들의 패턴이 먼저 보이고, 그리고 사람들이 보인다. 작가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주의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내용 쪽으로 이행해간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형식주의에 대한 이중적인 관계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관계에 대한 인식이 작가의 그림을 확장시킬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작가가 지나쳐온 지점들, 이를테면 내면풍경과 모나드로 축소된 사람들 그리고 군중과 더불어서 자기를 보존하면서 상실한 현대인에게서 보듯 작가의 관심은 시종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고, 그 초점이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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