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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채 / 알레고리,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인간

고충환

하이데거는 예술을 세계의 개시에다가 비유했다. 예술이란 전에 없던 세계,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세계, 가능적인 세계며 잠재적인 세계, 예술이 매개가 돼 불러내지 않았다면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세계를 여는 행위이다. 이은채는 빛을 다루는데, 그 빛의 주요 광원이 촛불이고 램프다. 촛불과 램프는 어둠을 (일)깨운다. 촛불과 램프를 켜면, 잠자던 어둠이 부스스 깨어난다. 전깃불 아래서 라면 결코 그렇게 서서히 깨진 않는데, 전깃불은 어둠을 갑자기 깨우고 폭력적으로 깨운다. 더욱이 촛불과 램프는 그것이 켜진 주변에 마치 소박한 무대와도 같은 어둠과 대비되는 공간을 만드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이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 같고, 어둠이 저 속에 품고 있다가 뱉어낸 현실 같고, 그렇게 어둠이 잉태한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는 친근하면서 낯 설은 느낌을 준다. 마치 주변의 어둠이 감싸 안으면서 보호해주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우호적이면서 설레는 감정에 빠지게 만든다. 여기서 친근하고 우호적인 느낌은 아마도 존재가 유래했을 원형이며 자궁(원형적 자궁? 모태?)에서의 기억을 어둠이 떠올려주기 때문이고, 그러면서도 그 감정이 낯설고 설레는 것은 어둠이 열어 보이는 신비를 목격하고 있다는, 그 비의의 현장(순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의 자각에 연유할 것이다. 

다시 전깃불과 비교해 보면, 전깃불은 결코 이런 공간을 만들지도 이런 감정을 자아내지도 않는다. 그건 어둠을 화들짝 깨우고, 미처 어둠이 자기를 열어 보일 새도 없이 어둠을 빛의 변방으로 몰아낸다(어둠을 추방한다). 촛불과 램프가 불 밝히는 빛은 이처럼 정작 빛이 아닌 어둠을 위해서라는 점이며, 빛 자체가 아닌 어둠을 열어놓기 위한 구실이며 매개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어둠이 열어 보이는 세계, 촛불과 램프가 매개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열리지 않았을 세계, 그 신비와 비의에 동참하고 있다는 어떤 의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은채는 빛(엄밀하게는 빛의 공간)을 그리는데, 특히 촛불과 램프를 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 촛불과 램프는 말하자면 빛을 매개로 어둠을 열어 보이고,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로 건너가게 해주는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왜 촛불과 램프를 그리는지, 그리고 촛불과 램프가 열어 보이는 세계며 어둠이 잉태한 세계, 그 또 다른 현실이란 어떤 현실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 되겠다. 

섣부른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 어둠은 빛 속에서라면 명명백백했을 사물(혹은 사물현상)을 그저 숨겨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빛 속에서라면 명명백백했을 사물(혹은 사물현상)을 낯설게 만들어 전혀 다른 사물(혹은 사물현상)을 되돌려준다. 그건 말하자면 전혀 다른 세계가 개시되는 극적 순간에 비유할 만하고, 그렇게 밤의 신비가 열리고 어둠의 비의가 열린다. 밤의 신비? 어둠의 비의? 바로 밤과 어둠이, 수치와 부끄러움이, 영원과 하루가, 무한과 유한적 존재가, 포옹과 포용이, 죄악과 원죄의식이, 범죄와 속죄가, 의식과 무의식이, 폭력과 성스러움이, 삶과 죽음이, 선과 악이, 지와 무지가 어떤 경계도 구분도 없이(특히 가치론적인 매김 없이)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어떤 경지에 속하는 일이다. 원형적이고 원초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은채, 사라져버린 기억, 2010, Oil on Canvas, 91x116.7cm

촛불과 램프를 매개로 그린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경지며 차원의 현실(겹현실? 현실과 현실의 사이? 현실의 원형? 원형적 현실?)을 열어 보인다.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면서 낯선데, 그림이 친근한 것은 알만한 사물(혹은 사물현상)을 그려서이고, 그럼에도 보면 볼수록 낯선 것은 사물과 사물을, 사물과 공간을, 사물과 현상을 매치시키는 관계가 예사롭지가 않아서이다. 이처럼 예사롭지 않은 관계설정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미술사로 치자면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에 소급되는)과 관련된다. 현대미술에 대한 정의가 여럿 있지만, 그 중 유력한 것으로 치자면 배열과 배치의 기술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배열과 배치가 달라지면 사물과 사물현상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의미는 사물과 사물현상 자체에 속해져 있지 않다. 의미는 사물 고유의 성질이 아니다. 의미는 사물이 실제로 놓이는 문맥, 사물현상이 실제로 일어나는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 그런 만큼 문맥이 달라지고 맥락이 달라지면 사물과 사물현상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현대미술을 의미론적인 문제로 보는 것이나, 배열과 배치의 기술로 정의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며,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 연동된다. 


이은채, 지난 저녁, 2010, Oil on Canvas, 72.7x60.6cm

흩어지는 촛불 사이로(2010), 촛불 켜는 아침(2012), 한낮의 촛불(2013). 영원 속에 빛(2014), 그리고 예지의 빛(2015). 그동안 작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에 부친 주제들이다. 하나같이 촛불이 등장한다. 그림 속에서 때로 촛불은 램프로 대체되고, 더러는 스탠드로 대신하기도 한다. 여기서 촛불은 어둠을 밝히기 위한 것이고, 어둠이 품고 있는 세계(비전)를 열어놓기 위한 것이다. 어둠이 뭔가. 바로 자기 내면이고 무의식이다. 자기가 속한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비현실 아니면 초현실이라고 해도 좋을)이다. 말하자면 작가에게 촛불은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외면에서 내면으로, 자기에게서 또 다른 자기에게로, 현실에서 비현실에로, 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건너가게 해주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 


그렇게 건너간 현실이, 현실에 호출된 비현실이 촛불 사이로 흩어진다. 아마도 바람 탓일 것이다.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형용한 것일 터이다. 흩어진다는 것, 흔들린다는 것, 그것은 내면의 성질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성질을 촛불 사이로 흩어지는 연기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에서 촛불(때론 꺼진 촛불)이, 꽃이, 화분이, 그리고 때로 등대가 그 위로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흩어진다. 아마도 기억을 표현한 것이고, 추억을 표현한 것이고, 향기를 표현한 것이고,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촛불은 다른 사물로 변태되고, 연기는 다른 사물현상(혹은 심리현상)을 덧입는다. 기억을 일깨우고 추억을 일깨우는 계기를 프루스트효과라고 하는데, 작가에게는 바로 촛불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촛불이 작가의 내면을 열어놓고, 자기 속에 꼭꼭 숨겨둔 또 다른 자기와 대면하는 주술을 부리는 것이다. 여기서 연기는 기억과 추억을 일깨우기도 하고, 사물 저마다의 혼(영기)을 떠올리게도 하고, 전통적으론 바니타스 정물화에서와 같은 무상함의 기호로도 읽힌다. 

그리고 작가는 아침에 촛불을 켠다. 아침에는 촛불을 켤 일이 없음에도 촛불을 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로 촛불(촛불의 상징적 의미)이 시공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촛불 본래의 사물현상과는 무관하게, 아니면 그 사물현상에 구속받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론 그 고유한 성질에 반하면서까지 가상현실이며 상상공간과 같은 저만의 현실을 열어놓는다는 의미이다. 낮에 꾸는 꿈이며, 의식하면서 꾸는 꿈을 백일몽이라고 한다. 그런 백일몽으로 봐도 되겠다. 어둠 자체와 대면하게 해주는 촛불의 경우와는 비교되는, 의식의 그물망이 좀 더 헐거워진 상태에서 몽상의 자유로운 들락거림을 위한 계기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이처럼 아침에 켜는 촛불이 적극적인 의미(몽상이라는)를 부여받는 것과는 비교되는 경우가 한낮에 켜는 촛불이다. 한낮에는 촛불이 소용이 없다. 생전에 빛을 못 본 사람들, 욕망을 삼켜야했던 위인들의 불운했던 삶을 상징한다. 그 상징적 의미가 바니타스와 통하는 대목일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빛(영원 속의 빛)은 촛불이 매개가 돼 열어놓은 가상현실이며 상상공간이 도저한 현실과는 상관없는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아마도 상당한 예술이 이런 믿음 곧 저마다의 가상현실의 창조에 기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예지의 빛 시리즈에서 작가는 클래식과 재즈 뮤지션을 다룬다. 그동안 작가는 조르지오 드 라투르의 내면의 빛을 경유해, 베르메르의 투명한 아침공기와도 같은 빛을 경유해, 위인들에 바치는 오마주(경외감으로서의 빛)를 경유해, 마침내 살아있는 전설들을 빛의 한 가운데로 불러들였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빛은 어둠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빛이 어둠이었고 어둠이 빛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Deep Peace 곧 깊은 평화라고 부른다. 아마도 촛불이 매개가 돼 대면한 자기내면과의, 흩어지고 흔들리는, 때론 번민하고 안쓰러운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의미할 것이다. 촛불 본래의 의미일 수 있는 명상의 계기를 이제는 떠안을 수 있게 되었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이중그림(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이 들어있는)을 통해서, 차용과 인용(이미지의 생산학으로부터 이미지의 소비학으로 갈아 탄 현대미술의 변화양상과도 통하는)을 통해서, 부재의 미학(사물과 사물현상으로 사람을 대신하고 정황 특히 심리적 상황을 전달하는)을 통해서 자신만의 오롯한 가상현실이며 상상공간을 열어놓는다. 현대미술과 관련한 주요 형식실험의 지점들이며 성과들을 열어놓는다. 중요한 것은 그 지점이며 성과들이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맞닥트린 자기내면과의 조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기내면을 넘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인간(인성)의 알레고리를 예시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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