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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자 / 바이털리즘, 우주에서 자연으로 무한 순환하는

고충환

우주 연작에서 자연 연작으로, 혹은 우주 연작에서 자연 연작까지. 그리고 그 중간에 막간처럼 거쳐 가는 얼룩 연작. 소재 혹은 주제로 본 권기자의 그림이다. 구조적으로는 얼룩 연작이 우주 연작과 자연 연작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지만, 사실 얼룩은 작가의 전체 그림을 지배하는 형식요소랄 수 있고, 작가의 그림은 얼룩이 다양한 형태를 얻으면서 변주된 경우라고 할 수가 있고, 그 다양하게 변주된 형식에 각각 우주와 자연이라는 이름이 부쳐진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렇듯 그림과 특정 주제 혹은 소재와의 등식에 대해서는 사물대상과의 감각적 닮은꼴에 근거해 유추한 경우(이를테면 우주)도 있겠고, 어떤 사물대상보다는 순수한 관념(이를테면 자연)의 소산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순수한 행위(회화적인 행위와 몸적인 행위 혹은 회화의 본성과 몸의 본성)가 남긴 최소한의 흔적이 상기시켜주는 형태에 부쳐진 이름일 수 있겠다. 

결국 얼룩은 흔적에 부쳐진 이름이다. 각각 감각적 사물대상의 흔적에, 순수한 관념의 흔적에, 그리고 순수한 행위의 흔적에 부쳐진 이름이다. 흔적의 존재형식은 부재다. 부재를 매개로 존재를 증명하는, 한때 존재가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형식이다. 비록 존재에 해당하는 국면들, 이를테면 사물대상과 관념과 행위에 의해 지지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부재의 형식을 취하며, 그런 만큼 정해진 형태도 결정적인 의미(서사)도 없다. 그렇게 흔적은 잠재적인 형태며 가능한 의미들(가능태로서만 존재하는 의미들)을 향해 열린다. 그렇게 모든 존재는 흔적으로 남는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얼룩으로부터 태어나고 흔적과 더불어 사라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성벽에 난 얼룩을 보고 있으면, 그기에 전쟁과 풍경과 자연이, 세상만사가 다 들어있다고 했다. 얼룩, 흔적, 먼지, 우주는 말하자면 존재가 부재 위로 자기를 밀어 올리는, 부재의 장막을 찢고 불현듯 존재가 현현하는 극적 순간의 계기들이며, 그 계기들의 침전물이고 응축물이다.  

그렇게 작가는 우주를 연다. 엄밀하게는 우주의 비전을 연다. 우주를 연다고는 했지만, 사실 작가의 그림은 그저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에 지나지 않고, 무분별한 흔적에 지나지가 않는다. 흔적? 무슨 흔적? 무엇의 흔적? 흔적 자체는 부재의 형식에 지나지 않지만, 실상 그 이면에 존재를 숨겨놓고 있다고 했다. 그 존재가 우주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칠흑 같은 어둠 위로 부유하는 빛 알갱이 혹은 빛 덩어리가 보인다. 빛과 어둠의 대비가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고, 벌건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 같고, 최초의 우주가 생성되는 극적인 순간의 현장을 목격하는 것 같은 재현적인 요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누구든 한번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꿈꾸었을 우주적이고 존재론적인 비전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어둠(존재는 어둠속으로 태어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어둠은 존재의 모태다) 자체와 대면하고 있다는 벅찬 감동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자연을 그린다. 자연? 정작 작가의 그림 어디에도 자연은 없다. 그럼, 자연이란 주제는 무엇이며, 작가는 자연의 뭘 그린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감각적인 자연(피직스)과 관념적인 자연(나투라)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관념적인 자연은 감각적인 자연의 원인이며 동인에 해당한다. 이런 원인이며 동인의 지지 없이 감각적인 자연은 없다. 그걸 자연성이라고 부른다. 자연성이란 말하자면 감각적인 자연의 성질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그게 뭔가. 자연의 본성이고 원형이다. 야성과 야생 같은 자연이 품고 있는 에너지이며, 생명의 원천이다. 

에너지와 생명에 정해진 색깔이며 형태가 따로 있을 수가 없다. 그건(색깔과 형태) 감각적 자연의 일이며 몫이다. 그렇지만 그게(에너지와 생명) 뒷받침되지 않으면 감각적 자연도 없다. 우리 식으로 치자면 존재의 원인에 해당하는 음과, 그 음이 존재의 표면 위로 자기를 밀어 올려 자기를 실현한 경우를 의미하는 양과의 관계로 봐도 되겠다. 이런 자연과 자연성, 양과 음과의 상관성을 철학으로 풀면 하이데거의 존재자와 존재(혹은 존재 자체)와의 관계가 된다. 말하자면 자연성은 자연의 원인이고, 양은 음이 자기를 실현한 것이며, 개별 존재자는 존재 자체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다시, 그게 뭔가. 생명이고 에너지다. 활력이고 운동성이다. 항상적으로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이행이다. 

마침내 작가가 의미하는 자연에 이른 것 같다. 작가는 말하자면 자연이 품고 있는 생명을 그리고 에너지를 그린다. 활력을 그리고 운동성을 그린다. 그리고 특히 변화하는 자연을 그리고, 이행하는 자연을 그리고, 흐르는 자연을 그린다(작가의 그림은 흘러내리다가 맺힌, 곧 흐르는 채로 굳어진 자국이며 흔적을 보여준다). 변화하는? 이행하는? 흐르는? 이건 시간 개념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잘 감지되지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시간의 스펙트럼 속에는 같은 시간대에 속하는 시간이 단 한 순간도 없다. 그저 외관상 변화 없는 반복이 무심하게 흐르는 것처럼 보일 뿐인 것이 그대로 일상을 닮았고 삶의 관성을 닮았다. 말하자면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 보다 적극적으론 매순간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을 닮았다. 작가의 그림에서 그런, 차이를 포함하고 생성시키는 반복이 보이는가. 생명이며 에너지가 감지되는가. 존재와 자연의 활력이, 운동이, 이행이 느껴지는가. 

다시, 자연은 인공과 대비되고 인위와 비교된다. 흔히 자연스럽다는 표현이 그렇다. 자연에는 인위가 없다. 인공도 인위도 사람의 일이고 몫이다. 자연에 인위가 없다는 말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이를 회화에다 적용해보면 회화의 자연성에는 사람(인공과 인위, 계획과 필연)을 위한 자리가 없다. 무슨 말인가. 예술의 규칙은 예술 자체에서 유래한다는 예술의 자율성 개념, 그리고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계기는 회화 내부로부터 온다는 회화의 내재율 개념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 패러다임이다. 회화를 그리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회화다. 회화가 회화를 그린다. 여기서 작가는 다만 회화가 자기를 실현하도록 돕는 조력자에 머문다. 회화라는 상황논리가 전개되도록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에 그친다. 그렇게 조건이 예비 되고 나면 회화가 회화를 그린다. 최초 조건은 필연(한계설정)에 의한 것이지만, 그렇게 회화가 되어가는 꼴은 전적으로 우연에 내맡겨진다. 외관상 반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속에 무궁하고 무한한 차이를 내포하고 생성시키면서 회화가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을 엿볼 수가 있다. 


작가는 물과 기름의, 수성과 유성의 반발작용을 이용한다. 그렇게 캔버스의 한쪽 가장자리 끝에서 붓으로 물감을 찍으면 화면 위로 물감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렇게 화면 위를 가뭇없이 미끄러져 흐르다가 일정한 지점에서 멈추면서 맺힌다. 멈추는 순간도 맺히는 지점도 다 다르다. 어디서 멈추는지 어떻게 맺히는지 알 수도 없다. 반복 작업이 만들어준 축적된 경험을 통해 그 순간이며 지점을 감으로 캐치할 수는 있겠다. 그 감을 내공이라고 부르자. 반복에 연유한 감이며 내공은 그대로 수행이다. 흔히 수행이란 자기를 비운 상태를 의미한다. 그 빈자리를 회화가 대신 채우는 차원을 의미한다. 수동적인 작가와 능동적인 회화, 되어가는 꼴을 그저 바라볼 뿐인 객체로서의 작가와 스스로 그림을 주도하는 주체로서의 회화가 실현되는 경지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회화가 회화를 그리게 한다. 회화로 하여금 자기를 실현하게 한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색깔로 인해 시각적이고, 얼룩으로 인해 촉각적이다. 다시, 작가의 그림에서 자연(존재)의 생명이, 에너지가, 활력이, 운동이, 이행이 느껴지는가. 가뭇없이 흐르다가 맺히고 맺히다가 흐르는 존재의 결이, 밑도 끝도 없이 중첩되고 포개지는 시간의 주름이, 시각적이면서 촉각적인 회화의 피부가 만져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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