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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 / 부유하는, 유영하는, 정처 없는 꽃, 꽃잎들

고충환


부유하다. 스며들다. 그동안 작가 이희경이 자신이 그린 그림에 부친 주제다. 부유하고 스며드는 건 자연현상이고 물리현상이다. 이 주제에 비추어보건대 작가는 자연현상이며 물리현상을 그리고, 그 현상이 주체에게 불러일으키는 동화현상(심리적 공감)을 그린다. 그리고 여기에 이따금씩 비추어지다는 현상이 부가된다. 부유하고 스며들고 비추어지는, 자연현상을 그리고 동화현상을 그리는 것인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주제의식은 그저 추상적으로 그리고 다만 수사적 표현으로 부쳐진 것은 아니다. 자연현상에 대한 실제 관찰과 공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 관찰에 의한 자연현상의 감각적 재현과 함께, 그것이 심리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공감을 그린 것인 만큼 단순한 감각적 재현을 넘어서는 영역과 범주, 이를테면 비가시적인 영역과 암시적인 범주를 아우른다. 


이희경, 부유하다(1), 2016,  캔버스에 오일 


이희경, 부유하다(2), 2016, 캔버스에 오일


작가는 꽃을 그린다. 꽃을 그리는 작가들은 많다. 그러나 꽃을 그리는 다른 작가들의 경우와 작가의 꽃그림은 다르다. 작가의 그림에서 꽃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보다는 부유하고 스며들고 비추어지는, 자연현상과 이에 따른 심리적 동화현상을 부각하고 강조하기 위한 구실이며 계기에 머문다. 물론 꽃 자체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이 주는 감각적 쾌감이 간과되지는 않지만, 동시에 아름다움에 부수되는 욕망과 욕망의 덧없음과 같은, 작가의 주제로 치자면 부유하는 존재에 대한 자기 반성적 사유와 같은, 존재론적인 층위에까지 확장되고 심화된다.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공감이 재차 존재론적 자의식을 자아내는 식의 순환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그러므로 그 순환과정에는 부유하고 스며들고 비추어지는, 자연현상이 일종의 형태소 내지는 의미소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꽃을 매개로 부유하고 스며들고 비추어지는 자연현상을 부각하고 강조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작가의 꽃그림에서 특이한 점은 꽃과 물과 빛이 어우러지고, 사물대상에 대한 감각적 재현과 함께 반영과 굴절과 왜곡과 같은 물리적 현상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꽃을 그리는데, 물이 담긴 투명한 유리병(실제로는 투명한 아크릴 박스) 속에 띄운 꽃을 그리고 꽃잎을 그린다. 그렇게 투명한 용기(유리병)와 매질(물) 속에 담긴 꽃은 꽃 자체와 함께 다양하게 변주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감각적 실제 그대로에 해당하는)과 수면 아래쪽에 잠긴 부분(왜곡상) 그리고 투명한 용기에 비친 부분(반영상)이 동시적으로 주어지면서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한다. 여기에 시점(눈높이)을 달리하면 꽃은 또 한 차례 변신을 하고, 외부로부터의 빛이 간섭되면서 재차 변신을 한다. 유리도 투명하고 물도 투명하고 빛마저도 투명한 성질이 상호작용하는가 하면, 유일하게 불투명한 꽃이 투명한 매질에 스스로를 투과하면서 은은하고 은근하게 자기를 확장하고 심화시킨다. 


여기까지가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에 의한 것이다. 그런 만큼 그 변주된 양상이 한눈에 읽힐 것 같지만, 실제 작가의 그림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사물대상을 클로즈업해 그린 것인 만큼 용기와 물과의 관계, 꽃과 반영된 이미지와의 관계와 같은 유기적인 관계의 단서가 단절된 채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마다의 의식 속에서 그 유기적인 관계를 소급시켜 복원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탓이다. 그런 탓에 작가의 그림은 이런 관계도 관계지만, 이보다는 사물현상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비록 꽃이란 친숙한 소재를 그렸지만, 이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낯설게 하기(소외효과 혹은 소격효과, 작가의 경우에는 클로즈업을 통한 유기적인 관계의 단절)를 도입해 그림의 의미지층을 확장 심화시키고, 그렇게 재구성된 과정의 총체인 사물현상 자체가 오롯해진다. 꽃과 유리, 물과 유리, 시점의 변수와 빛의 강도가 그 경계를 허물고 상호 삼투되면서(작가의 용어로는 서로 스며들면서) 만들어내는, 이런 사물현상 자체야말로 작가가 정작 그리고 싶고, 부각하고 싶고, 강조하고 싶은 그림의 지점이며 실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모티브와 모티브, 계기와 계기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오롯해지는 사물현상자체란 무엇인가. 그건 아마도 자연의 근원적인 생명이며, 그 생명이 자기를 실현하는 운동일 것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꽃을 빌려 사실은 자연의 생명과 운동을, 자연의 에너지와 이행을 그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주체로부터 건너온 것들, 이를테면 작가 자신의 심리적 공감이랄지 아니면 상상력과 같은 계기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자연현상에 부가된다. 그렇게 비록 꽃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러나 작가의 그림을 거치면서 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자신의 내부에 숨겨놓고 있던 가능한 형태며 암시적인 의미(가능태와 잠재태)를 드러낸다. 
이런 사물대상과 외적 조건(자연현상)간의 상호작용이, 사물대상과 주체(심리적 현실)와의 상호간섭이 모네의 말년 수련연작에 대한 바슐라르 가스통의 분석을 떠올리게 만든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모네의 수련연작은 수련(꽃)과 연못(물), 대기와 바람, 기후적 조건과 화가의 심리적 조건이 상호작용하고 상호 간섭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과 상호 간섭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아마도 심미적 과정일)을 물질적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작가의 그림 역시 이런, 물질적 상상력의 과정이며 소산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모네와 그 경우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그림 역시 일종의 시리즈며 연작그림으로 볼 수는 없을까. 모네가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실험한 것을 작가는 정물(소극)의 차원으로 옮겨와 관찰한 경우로 볼 수는 없을까. 검토가 필요한 일이지만,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구별되는 버전의 그림을 그려놓고 있다. 캔버스 표면에 바로 그린 그림이 있는가 하면, 구겨진 한지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 표면에 대고 누른, 그래서 비정형의 미세자국이며 얼룩을 조성한 연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그림들이다. 유리도 투명하고 물도 투명하고 빛마저도 투명하다고 했다. 유일하게 불투명한 꽃이 이런 투명한 매질을 통과(투과)하면서 드러나 보이는 현상이, 투명하고 선명한 색감이며 질감이 전자에서 더 잘 드러나 보인다. 이에 비해 후자에서는 사물대상 자체보다는 상대적으로 고유의 분위기가 강조되는 편이다. 여기에 때로 캔버스 표면에 정착된 안료가 비정형의 물 얼룩을 만드는, 마치 종이에 물이 스며들어 물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얼룩효과를 조성하기도 하는데, 한지효과와 함께 주로 화면의 가장자리에, 그리고 꽃으로 그려진 모티브와 모티브 사이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 자체로 자기를 주장하는 사물대상에 대비되면서 사물대상을 부각하고 강조하는, 화면 속 역할(조연?)을 도맡고 있다. 


이를테면 결정적인 형태와 암시적인 형태, 결정적인 의미와 가변적인 의미, 가시적인 존재와 비가시적인 존재, 감각적인 존재와 관념적인 존재가 대비되는 존재의 중층적인 의미지층을 드러내고, 회화의 다층구조를 열어놓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비정형의 얼룩 속에 세상의 모든 풍경이 다 들어있다고 했다. 문제는 암시의 기술인 것. 작가의 그림에선 사물대상의 감각적 재현과 함께, 이런 암시의 기술이 도모되면서 꽃 그림을 세상풍경(어쩜 삶의 풍경?)에 연속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다시 부유하고 스며든다는 주제로 되돌아가 보자. 특히 부유한다는 주제는 작가의 그림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암시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마치 무중력 공간 속에 꽃과 꽃잎들이 떠다니는 그림 같고, 바람 속을 떠도는 그림 같다. 삶의 지향 없이 정처 없는 삶의 메타포 같고, 자유로운 영혼의 표상 같다. 그리고 스며든다는 주제가 진정한 관계를 뒷받침한다. 관계란 경계가 지워지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서로에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져야 한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관계며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가 있게 된다. 이처럼 작가의 꽃 그림은 정처 없이 자유로운 존재의 표상 같고, 서로에게 스미면서 넘나들어지는 관계의 장 같다. 그 속에 물아일체의 차원이며 우주적 살의 경지를 배태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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