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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경 / 허공을 걷는 사람들

고충환


작가가 보내온 이미지 자료를 보고 있다. 어느 곳이 위아래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사전에 실제로 전시된 정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더욱이 작가의 작업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더라면 앞뒤도 구분하지 못할 뻔했다. 그나마 공간이 있는 경우에는 그 공간에 의지해 전후사정을 추정해볼 수 있지만, 근접촬영의 경우에는 오리무중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공간에 조각이 설치돼 있고, 그렇게 설치된 조각을 각각 벽면과 바닥에 설치된 아크릴 미러가 반영하고 있다. 벽면에 설치된 아크릴 미러가 공간에 설치된 조각을 옆으로 무한반영하고(확장)있다면, 바닥에 설치된 아크릴 미러가 조각을 공간 아래쪽으로 무한반영하고(깊이) 있다. 그렇게 아크릴 미러가 조각을 확장하면서 심화시키고 있었다. 여기서 확장은 흔히 옆으로(좌우, 수평) 일어나는 일이고, 심화는 깊이를(상하, 수직) 향한다. 확장은 수평적 계열(연쇄)을 만들고, 심화는 수직적 규준과 이를테면 정동의 강밀도와 관련이 깊다. 아마도 그 깊이의 끝에 심연이 있을. 적어도 상식적으로는 혹은 관습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작가의 설치작업에서 이 상식이며 관습은 통하지가 않는다. 


이원경, 두 개의 문(1), 2016, 조각설치


이원경, 두 개의 문(2), 2016, 조각설치



조각된 사람형상이 누워있기 때문에 그렇게 누워있는 사람의 관점 혹은 입장에서 보면 실제로 확장은 공간의 수직적 좌표를 따라 일어나고, 심화는 옆 벽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공간설치작업에서 시지각 방식과 관련한 상식과 관습은 전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의구심을 자아내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흔들리는 상식(아니면 관성?), 파열되는 시지각 방식, 종잡을 수 없는 이미지, 오리무중의 독해를 작가의 근작은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다중적인 이미지와 다의적인 이미지 읽기를 향해 열려있는 것 같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지금과는 사뭇 다른 형식으로 실험되어졌을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작가의 전작에선 없던 일이다. 작가의 조각이 공간적으로 확장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심화되고 있는 경우로 봐도 되겠다. 다시, 사람들이 허공에 매달려있다. 사람들을 매달기 위한 줄은 없는 것을 가정한 것이므로, 실제로 보기에 사람들은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다. 엄밀하게는 누워있다. 그렇게 누운 채로 붕 떠 있다. 누워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서 있다. 그렇게 누운 채로 서서 걷고 있다. 허공을 걷는 사람들이다. 보기에 누워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조각 자체는 서 있는 것에서 시점 혹은 관점 문제를, 그리고 허공을 걷는 사람들이 중력과 무중력 문제를 건드리고 있음을 알겠다. 모든 것은 보는 문제로 귀결된다.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보는 것은 인식론적 문제이다. 보는 관점을 달리하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다른 것이 보인다. 그럼 작가의 작업에선 어떤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어떤 다른 것이 보이는가. 관점은 관성에 연동되고 인식론적으로 선입견과 편견에 연동된다. 관점을 달리 한다는 것은 그 관성을 깨는 일이며, 선입견과 편견을 건드리는 일이다. 작가의 작업은 그 관성을, 그 선입견과 편견을 건드린다. 


그 문제의식이 중력과 무중력 문제로 변주되고 확장된다. 이를테면 중력이 관성이다. 모든 존재는 안정체제를 유지하려는 관성이 있는데, 그게 중력이다. 그래서 중력을 벗어나면 관성으로부터 놓여났다는 자유로움과 함께 존재가 불안정해진다. 자유와 불안정성의 동거, 바로 중력의 이면이고 무중력의 양면이다. 중력이 은폐하고 있는 실재(특히 자유)이고, 무중력이 드러내 보이는 실재다(존재의 불안정성). 그렇게 무중력 상태가 되면 중력상태가 억압하고 있던 실재가 보인다. 중력은 유형무형의,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층위에 두루 작용한다. 그래서 중력은 어쩜 감각적인 층위에서 작용하는 일종의 역학일 수 있지만, 동시에 존재로 하여금 안정체제를 유지하게 해주는 일체의 관습일 수 있다. 말하자면 삶의 무게를 감당하게 해주는 관성일 수 있다. 그런데 무중력 상태가 되면, 심리적으로 옥죄던 중력의 고삐가 풀리면, 안정체제에 가려져 있던 삶의 무게의 실재가 드러나 보인다. 안정체제(이데올로기)가 벗겨지면서 삶의 무게만 오롯해진다. 삶의 무게로부터 놓여나면서 삶의 무게를 인식한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부분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선 보기에 허공에 붕 떠 있는 사람들은 허공을 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허공을 날기 위해선 가벼워야 한다. 그래서 껍데기다. 일종의 역거푸집에 착안한 껍데기 형상은 일반적인 주형과 주물의 과정에 연유한 거푸집보다 상대적으로 더 까다롭고 정밀한 작업과정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작가로 하여금 이 지난한 공정을 기꺼이 감수하게 해주는 껍데기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담고 있는 것일까. 이 작업은 한 쪽 날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조형한 전작과 비교된다. 전작에서 날개는 이상을 상징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날개를 한쪽만 가지고 있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날아오를 수가 없다. 바로 좌절된 이상을 상징한다. 불가능해진 이상을 상징하고, 쓸모없게 된 이상을 상징한다. 그래서 연민을 자아낸다. 그런데 근작에서 사람들은 날개도 없이 날고 있다. 그렇게 날개도 없이 날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연민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전작에서 한쪽 날개는 존재의 불가능성을 주지시키고 좌절(죽음충동?)을 상기시키기 위해, 존재를 실재와 대면시켜주기 위해 시시때때로 호출되던 기표였다. 그런데, 그 마저도 없다. 그 마저? 바로 존재가 억압하고 은폐한 실재이고, 작가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실체이다. 


사람들은 허공이 허공인줄을 모른다. 일상인의 정복차림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앞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떼고 있는 모양새가 허공이 땅인 줄 아는 것 같다. 바로 중력에서 놓여난 자유로운 영혼들이 아니라 허공을 여전히 땅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관성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조형해놓고 있는 것 같다. 다시, 안정체제는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닥의 실재가 사실은 허공일 수 있고,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삶의 실재가 사실은 허당일 수 있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한 것의 실재가 사실은 비정상적인 것일 수 있다. 정상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을 가름하는 실재가 이데올로기일 수 있고, 허구일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허구가 허구임을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착각하는 것)에 있고, 혹 알아차린 경우에도 일부러 외면하는 것(실재와의 대면을 피하고 싶어서)에 있다. 그렇게 작가는 허공을 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사실은 허방을 사는 사람들을 조형해놓고 있었다. 껍데기로만 남은 삶을 살고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조형해놓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허공은 하늘대신 허방을, 자유대신 착각을 주지시키고 있었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두 개의 문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두 개의 문은 다르게는 두 개의 길, 두 개의 삶에 대한 유비적 표현일 수 있다. 겉과 속, 안쪽과 바깥쪽, 현실과 비현실, 있음과 없음, 정상성과 비정상성 같은 존재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에 대한 유비적 표현일 수 있다. 이 유비는 외부적으로 선택을 향해 열려있고, 그 속에 결여를 품는다. 삶은 선택의 과정들의 연쇄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결여는 필연적이다. 그래서 결여는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고, 그 운명으로부터 연민이, 그리움이, 멜랑콜리가 유래한다. 그동안 작가의 조각은 어쩜 일종의 명상조각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고, 존재의 결여를 명상하는 조각으로 성격을 부여할 수가 있을 것이고, 그 결여를 껴안는 것에서 연민을 자아내는, 그런 행위와 실천과 제안의 한 경우로 볼 수가 있을 터이다. 그 과정에서 특히 있음과 없음의 문제가 중추에 해당하며, 지엽적인 차이를 도외시한다면 작가의 작업은 거개가 그 중추를 변주하고 심화하고 확장시켜온 과정이라고 봐도 되겠다. 형식적으로 작가가 채택하고 있는 음각조각이나 역거푸집이 바로 이런 있음과 없음의 애매한 경계(그 경계가 애매한 것은 관점의 차이 때문이고, 불교식으론 마음의 변덕 탓이고, 인식론적으론 착각 아니면 오만에 기인한다)를 가시화하고 형상화하게 해주는 효과적인 기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내용과 형식이 하나로 맞물리는, 그런 성공적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에서 있음(벽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과 없음(벽 안쪽으로 사라지는 사람)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다시,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고, 인식한다는 것은 관점의 문제이고, 마음에 연동된다. 


그리고 허공을 걷는 사람들, 허공이 허공인줄도 모르고 땅인 양 걷는 사람들, 껍데기가 껍데기일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지금까지의 연민을 자아내는 초상들과는 또 다른 지점을 짚고 있다. 말하자면 현대인의 맹목적이고 무지한 삶의 초상을 겨냥한 씁쓸한 자의식을 자아낸다. 어쩜 그 자의식이며 자기 반성적 사유(조소 아니면 냉소?) 또한 크게 보아 연민의 한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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