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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제방, 온갖 꽃이 일시에 피다

고충환


한 시대의 지배적인 지식체계를 패러다임(토마스 쿤)이라 하고 에피스테메(미셀 푸코)라고 한다. 동시대의 이런 패러다임이나 에피스테메로 치자면 후기모더니즘과 탈구조주의가 될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지배적인 혹은 주류에 해당하는 지식체계를 의심하는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 각각 모더니즘패러다임의 본질주의 이후를, 그리고 구조주의의 환원주의로부터의 탈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후와 탈이 자기를 실현하는 형식논리가 다원주의고 요새 유행하는 말로 치자면 종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되겠다. 백화제방. 온갖 꽃이 일시에 핀다는 말이며, 갖가지 학문이나 예술이 함께 성함을 비유하는 사자성어에서 온 말이다. 후기와 탈의 논리로 치자면 다중심에 비유할 수 있겠다. 중심은 없다. 다만 다중심이 있을 뿐. 중심의 대척점에 서는 변방도 없다. 다만 편재하는 중심들이 있을 뿐. 여기에 이런 편재하는 중심들이 있고, 일시에 피는 꽃들이 있다. 


추상화의 경우(권현진, 전지연, 하태임, 호본칠). 회화의 의미내용보다는 형식요소에 천착한 그림들이다. 형식이 의미고 의미가 형식인 그림들이다. 감각이 부르는 대로 그린, 마치 우연이 그린 것 같은(사실은 우연을 가장한? 아니면 몸에 밴 회화의 관성?) 그림들이다. 감각이 부르는 대로 그린? 몸 그림이다. 회화와 몸이 만나지는 접점에서 분출하는 그림이고, 회화의 호흡을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이 일련의 그림들에선 회화의 됨됨이(회화의 되어감)를 느낄 수 있고, 감각과 호흡과 같은 몸에서 회화 쪽으로 건너간 것들의, 물성과 질감과 같은 회화에서 몸 쪽으로 건너온 것들의 생생한 흔적을 느낄 수가 있다. 
 

유토피아를 그린 경우(왕열, 정미).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 속 장소를 유토피아(초장소)라 하고, 엄연한 실재로서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비장소)라고 한다. 그리고 세계의 종말과 파국에 대한 자의식을 반영한 장소개념이 디스토피아(반장소)다. 이런 토피아들에는 당연 사람들의 시대감정이 반영돼 있다. 여기서 작가들은 유토피아를 그린다. 학이 날고 말이 노니는 자연귀의사상을 그리고, 머리에서 마치 나뭇가지와도 같은 뿔이 자라고 꿈꾸듯 생각(몽상)이 자라는 유니콘을 그린다. 이 그림들은 그대로 시대감정(유토피아)을 그린 것인가, 아니면 시대감정(디스토피아)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협소한 시대감정 너머 현실과 의식의 틈새에 있는 제3의 어떤 장소(헤테로토피아)를 꿈꾸는가. 그림들은 이런 시대감정을 묻게 한다. 


상실된 유년을 그리고 상실된 고향을 그린 경우(이사라, 정태영). 좀 과장을 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도저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증표 혹은 징후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인형이 상실된 유년을 상기시키고,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촌락이 상실한 고향을 암시한다. 인형은 어른들의 대체유년에 해당하고, 전원풍경(그림 같은 풍경)은 대체고향으로 기능한다. 여기서 고향은 실재하는 지정학적 장소로서보다는 상실감으로 나타난 감정의 형태로 현상하고, 그 감정이 고향을 넘고 유년을 넘어 원형을 향한다. 그렇게 인형과 전원 그림이 존재론적 원형에 대한 상실감을 증언해준다. 상실감을 뒤집어놓으면 그리움이 된다. 특히 전원풍경이 아득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경우가 그렇고 이유가 그렇다. 
   

자연풍경을 그린 경우(서은경, 석종헌, 권치규). 현대인이 상실한 것으로 치자면 자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현대인이 향유하고 있는(사실은 향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연은 자연이 아니다. 해석된 자연이고, 개념화된 자연이며, 인문학으로서의 자연이다. 문명으로 조성된(조작된?) 자연이고, 물신으로 상품화된 자연이다. 유사자연이고 의사자연이다. 그기에 자연 본래의 모습, 이를테면 야성과 야생, 본성과 본능을 위한 자리는 없다. 어쩌면 유사자연은 이런 자연 본래의 모습을 지우는 과정인지도 모르고, 그래서 진정한 자연은 풍문으로나 떠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연은 어쩌면 원형에 대한 그리움을 가장 깊이 숨겨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처럼 상실된 자연을 회복한다는 것은 금욕적인 삶과 고독을 되찾는다는 것이다(칩거와 은거의 신화). 작가의 그림들이 이런 자연 본연의 모습을 반성케 한다. 

관계를 그린경우(김소형, 김영우). 현대는 관계와 망으로 특징된다. 특히 인터넷 이후 더 그렇다. 인터넷이란 말은 상징적이다. 이를테면 인터 곧 사이와 넷 곧 망이 현대인의 삶의 지도를 상징한다. 현대인의 삶은 그가 가지고 있는 관계망(소위 발)이 얼마나 넓은지에 의해 결정된다. 좋은 관계가 유지되려면 서로간의 사이에 대한 거리가 존중되어져야 한다. 최소한의 경계며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전깃줄에 앉은 새들도 그 앉은 간격이 지나치게 촘촘하면 서로 싸운다. 사람도 마찬가지. 그림에서처럼 사람들이 살을 맞대고 있으면 살가워져야 하는데, 사실은 사람도 삶의 질도 빡빡하면 불편해지는 법이다. 그렇게 불편한 사람들의 속마음을 숨기면서 봉합하는(미봉책?) 사회적 장치가 웃음이다(베르그송). 좋은 관계와 속(뒤끝) 없는 웃음의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지요상, 념(念)Ⅳ, 2016, 화선지에 수묵, 135X200cm, 


생각과 사념을 그린 경우(강유림, 남현주, 지요상). 꽃과 여자가 어우러진, 마치 연기처럼 서로 감싸는 듯한, 꿈꾸듯 몽환적인 그림이 여성스러움의 전형을 예시해주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생각의 편린들이 상연되는 마치 무대 같은, 인생극장 같은 그림에 등장하는 빈 의자가 부재의 미학을 떠올리게 만들고, 여인의 머리 그림이 생각과 사념의 됨됨이를 곱씹게 만든다. 특히 여인의 머리 그림에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은 여인은 아마도 제 속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올림머리(아마도 가채?) 속에 둥지를 튼 손들은 그 속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일 터이다.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는 손들이 작가의 속사정(욕망?)을 투사한 것일 터이다. 움켜쥔 손들이 정작 관조적인 얼굴과, 격렬한 손들이 정적인 표정과 대비되면서 극적 긴장감(정중동? 파토스?)을 자아낸다. 
 

사물대상과 사물현상을 그린 경우(유용상, 김시현, 김성복, 이여운). 흔히 사물대상을 그린 그림을 정물화라고 한다. 그리고 정물화에 해당하는 현대판 버전이 사물초상화다. 정물화도 사물초상화도 한갓 사물대상 이상의, 주체와의 긴밀한 상호 간섭의 소산이다. 이때 주체에서 사물 쪽으로 건너간 것(간섭)이 현상학(사물현상)으로, 상징으로, 관념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극사실적으로 그린 유리잔의 표면에 꿈꾸듯 아롱거리는 빛 알갱이들이 감각적 쾌감을 자아내고, 복을 싸는 보자기와 복을 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지복을 상징하고, 고 건축물 설계도 혹은 조감도를 연상시키는, 사물대상을 최소한의 교차되는 선들로 환원해놓은 것 같은 사찰 그림이 구조주의적 환원을 상기시킨다. 이로써 각각 현상학과 설화의 재귀(옛 이야기가 현대에 자기를 반사하는) 그리고 구조주의로 나타난 담론과 형상 가능성의 지점들을 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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