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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근희 / 세계와 세계, 존재와 존재를 매개하는 여성, 여성성

고충환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고 낯설다. 얼핏 보면 그저 흔한 식물이며 꽃을 그리고 숲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낯설다. 흔히 꽃은 너무 흔한 것이라 안보고도 안다. 사실을 말하자면 안다고 착각한다. 특히 클로즈업된 꽃 속이 그렇다. 시점에 변화를 준 것일 뿐인데도 평소의 앎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만다. 혹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많은 부분들은 이처럼 사실은 안다는, 알고 있다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근접시점에서 본 꽃 속은 평소의 앎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생판 처음 보는 것 같은 생경한 꼴을 열어 보인다. 캐니 속에 포함된 언캐니(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내는)를, 상징계가 억압한 실재계(상식에 반하는)를 예기치 못하게 출현시킨다. 

자기동일성을 배반하면서 비동일성을 열어놓는다. 이를테면 꽃은 동물인가 식물인가. 꽃은 당연 식물이지만(독사 곧 분류법에 근거한 지식에 의하면), 그 속에 동물을 품고 있다. 예컨대 돌기 같은, 생식기(남근) 같은, 더듬이 같은, 쭈글쭈글한 주름(여근) 같은, 투명한 속살 같은, 솜털 같은, 육질 같은, 실핏줄 같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기발광성(이를테면 곤충의 겹눈?) 같은, 번들거리는 피부 같은, 겹구조의 비늘 같은 동물의 신체를 싸안고 있다. 특히 겹구조(패턴)는 하나의 단위구조가 반복 재생산되면서 스스로를 증식하는 세포의 생리를 닮았고, 자기를 확장하는 우주의 생성원리를 닮았다. 그렇게 꽃은 그 속에 동물과 식물을, 세포와 우주를,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사실상 세계 전체며 세계 자체를 품고 있다. 


  
 신근희, 아니마 아니무스(1), 2016, 캔버스에 아크릴


신근희, 아니마 아니무스(2), 2016, 캔버스에 아크릴


그렇게 꽃이 품고 있는 것에는 감각할 수는 있어도 인식할 수는 없는, 감각의 대상이면서 인식의 그물망에는 붙잡히지 않는, 분명 존재함에도 오리무중인 것들, 그래서 오만갈래의 가능하고도 잠재적인 서사를 생성시키는 것들, 인식론적 대상에서 시적 대상으로 이행하는 것들, 불지론적인 것들, 알 수 없는 것들, 신비한 것들도 있다. 꽃은 이 모든 것들의 분별하거나 무분별한, 필연적이거나 우연한 집합이며 총체다. 그게 뭔가. 원형이다. 바로 꽃 속(꽃이 아닌)이 열어 보이는 원형이다. 여기서 원형은 전형과는 다르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호가 전형이라고 한다면, 원형은 존재가 유래한 궁극으로서, 기호라기보다는 오히려 수수께끼에 가깝다. 닫힌 기호(전형)와 열린 기호(원형)의 차이로 봐도 되겠다. 자의적인 해석에 대해 열려 있어서 기호로 환원되지 않는 서사의 원천이며, 기호로 특정되지 않는 이야기의 근원으로 봐도 되겠다. 기호의 기호, 기호의 원형으로 봐도 되겠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꽃(기호)의 꽃(기호)을 그리고, 꽃(기호)의 원형을 그린다. 그러므로 바로 그 꽃의 원형이 뭔지, 그리고 그 원형이 뭘 향하는지 혹은 뭘 열어 놓는지를 밝히는 것이 작가의 그림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겠다. 

작가는 각각 전작에서 수미산을, 그리고 근작에서 아니마 아니무스를 주제로 그린다. 이 주제는 둘이면서 하나다. 다시 말해 수미산에서 아니마 아니무스로 건너간다. 벌거벗은 여자들이 서성거리는 풍경에서 알 수 없는 꽃들의 사물초상화 쪽으로 건너간다. 풍경에서 꽃으로 이행하고, 원시점에서 근접시점으로 파고들고, 수미산에서 수미산 속으로 들어간다. 주제가 둘이면서 하나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그러므로 근작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알 수 없는 꽃들은 수미산의 숲을 헤집고 들어가면 맞닥트리는 꽃이며, 수미산에 핀 꽃이다. 전작과 근작의 차이점으로 치자면 한쪽은 여자들이 있고, 다른 쪽은 여자들이 없다. 원시점에서 근접시점 쪽으로 이행한 것인 만큼 정황상으로도 자연스런 변화라고 하겠지만, 그 차이는 단순한 정황적 변화를 넘어선다. 다시 말해 전작에는 여자들이 있고, 근작에는 꽃들이 있다. 표면적으로 전작에서의 여자들이 근작에서의 꽃으로 대체된 것이지만, 여기서 여자들이며 꽃들 모두는 사실은 작가의 자화상이 변주된 것이며 반복 재생산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면서 전작과 근작의 유기적 관계를 보면 하나의 서사가 엮인다. 이를테면 여자들이 숲속을 헤매고 있고, 그렇게 헤맨 끝에 알 수 없는 꽃을 발견한다는 것이 서사의 표면이다. 여기서 숲속은 무의식을 상징하고, 숲속을 헤매는 것은 진정한 자기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상징하고, 그렇게 헤맨 끝에 마침내 발견한 알 수 없는 꽃은 바로 그 진정한 자기를 상징한다. 여기서 진정한 자기란 불교에서의 진아를 말하며, 세속적인 표현으로는 아이덴티티에 해당한다. 알다시피 아이덴티티는 페르소나와 구별된다. 

가면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페르소나는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 주체를 말하고, 그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주체의 이면에 가려지고 억압된 주체가 아이덴티티다. 여기서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 주체는 옷(의복 특히 유니폼)으로 대리되고, 그런 만큼 벌거벗은 여자들은 그 주체의 옷을 벗어버린 주체, 이면의 주체, 무의식의 주체, 억압된 주체, 욕망주체, 원형적인 주체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주체가 발견한 꽃(자기)이 알 수 없는 꽃(자기)이며 오리무중의 꽃(자기)인 것은 바로 그 욕망주체가 사실은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 주체가 억압한 주체이며 무의식의 층위로 잠수를 탄 주체이기 때문이다. 

꽃인 듯 아닌 듯, 알듯 모를 듯한 꽃은 바로 그런, 자기가 발견한 또 다른 자기, 너무 오랫동안 억압된 나머지 심지어 자신에게마저 생경한 자기(그 자체 욕망일 수도, 외상일 수도, 해탈일 수도, 무일 수도 있는)에 연유한 것이다. 이렇게 벌거벗은 여자들도, 꽃들도 사실은 작가 자신의 자화상임이 해명되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주체(여자)가 진아(꽃)를 발견하는, 주체가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는 지난한 과정을 그린 것이며, 따라서 성장서사의 변주된 한 형식이란 점이 서사의 이면이다. 

그리고 여기에 신화적 이야기가 부가된다. 이를테면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의 배꼽으로 알려진, 부처가 득도한 것으로 알려진, 그래서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성지로 알려진 곳이 수미산이다. 존재가 유래하고 되돌려지는 원천을 상징하며, 이상향을 표상한다. 이런 신화적 이야기를 작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색을 하는데, 이를테면 수미산은 시작과 끝(기독교식으론 알파와 오메가)을 상징하고, 성과 속을 아우르며, 모든 경계와 차별을 넘어서 하나로 싸안는 여성의 무한한 포용력(우주적 자궁?)을 상징하며, 여성 자체를 상징한다. 그리고 아니마 아니무스는 주지하다시피 융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일종의 원형상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각각 남성 속의 여성이 아니마로, 그리고 여성 속의 남성이 아니무스로 상징된다(그 자체 생물학적 성결정론과는 무관한, 성경향성으로 이해해야). 여기서 남성은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스스로를 남성으로 발현하고, 여성은 남성을 억압함으로써 스스로를 여성으로 실현한다는 것이 근간이다. 그리고 여기에 흔히 간과되기 쉬운 게, 남성이든 여성이든 존재는 애초에 자웅동체를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 속의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며, 억압된 자기를 되찾는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랑은 자기애일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옆으로 빠진 감이 있지만, 여기서 아니마는 원래 영혼과 정신, 특히 원형적 호흡이며 우주적 숨에서 그 의미가 유래했다. 숨은 생명을 상징한다(흥미롭게도 작가는 근작을 생명의 꽃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가 여성으로, 우주적 자궁(매트릭스)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렇게 여성(여성의 성 정체성)을 매개로 수미산(원형)과 아니마 아니무스 특히 아니마(생명)의 주제가 하나로 엮일 수가 있었다. 여기서 다시, 존재는 애초에 자웅동체를 잠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아리송한 작가의 꽃그림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이를테면 동물과 식물을, 세포와 우주를,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사실상 세계 전체며 세계 자체를, 그리고 특히 여성(핵과 주름)과 남성(돌기)을 품고 있는 꽃그림이 그렇다. 동시에 그 꽃그림은 여성성기의 도상학을 떠올리게 만든다(미술사에선 특히 조지아 오키페와 좀 더 최근의 경우로는 주디 시카고에서 보는 것과 같은). 무슨 말이냐면 흔히 여성주의는 본질주의와 다원주의로 구별되고, 여성성기의 도상학은 본질주의 페미니즘의 가장 강력한 상징체계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상징 그대로 세계의 배꼽에 해당하는 옴파로스와 통한다(그 자체 가부장적 상징체계의 세계수 혹은 우주수와는 비교되는).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여성(그 자체 자기 혹은 존재로 일반화될 수 있는)은 매개자로서 나타난다. 동물과 식물을 매개하고, 자와 웅을 매개하고, 남성과 여성을 매개하고,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매개하는. 이 모두는 여성(최소한 작가의 그림에서 제안되고 있는 여성)이 다름 아닌 생명이며, 원형적 존재이며, 우주적 자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작가는 바로 그런, 여성이 매개하는(혹은 매개되는) 존재의 지점들을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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