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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 욕망극장, 광점들의 스크린 위로 도시의 욕망이 흐르는

고충환

김동희는 원래 도시를 그렸다. 빼곡한 아파트를 그렸고, 아파트 주변풍경을 그렸다. 아파트와 함께 상가와 정자, 놀이터와 파라솔, 가로수와 가로등, 화분과 정원, 테라스와 난간, 계단과 펜스가 있는 근린시설물을 그렸다. 이 풍경들을 작가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는 않았다. 사실적 재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인상을 그렸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재현적인 경우로 치자면 아파트가 배경에 그리고 근린시설이 전면에 위치할 것이지만, 작가의 그림에서 아파트와 근린시설은 전후가 따로 없었다. 풍경이라기보다는 풍경의 편린들이 전후가 없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되고 포개지는 그림이 도시풍경에 대한 작가의 인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고 있었다. 도시풍경에 대한 작가의 반응을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론 해석을 그린 것이지만, 그렇다고 심층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도시에 대한 반응을 그리되 심층적으로 파고들지는 않는 그림이 흡사 산책자의 시선을 닮았다. 


김동희, 빌딩(1), 2016,  장지에 채색, 91x53cm


김동희, 빌딩(2), 2016, 장지에 채색, 91x53cm

산책자의 시선은 반쯤 방임된 시선이고, 자의적으로 재편되고 재구성되는 시선이고, 구조적으로 헐거운 시선이고, 사물대상의 형태와 의미가 정박하는 대신 떠도는 시선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그런, 산책자의 흐르는 시선으로 도시에 대한 인상을 그렸다. 표면적인 감각을 터치하면서 스쳐지나가는 풍경일 수 있겠고, 도시의 찰나적인 이미지 풍경일 수 있겠다. 여기서 재현과 인상이 다르듯 풍경과 이미지 풍경은 다르다. 재현과 풍경이 사물대상에 방점이 찍히는 경우라면, 인상과 이미지 풍경은 사물대상과 주체와의 관계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점이 다르다. 그렇게 작가는 마치 산책하듯 흐르듯 스쳐지나가듯 스케치하듯 드로잉 하듯 도시의 인상을 그리고 아파트의 이미지 풍경을 그렸다. 


그렇게 아파트는 도시에 대한 작가의 인상을 결정짓는 아이콘이었고 전형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콘이며 전형은 근작에서 도시의 밤으로 야경으로 옮아간다. 도시는 낮보다 밤에 더 도시답다. 도시의 도시다움이(하이데거라면 존재의 존재다움이라고 했을), 도시의 존재가 더 잘 드러나 보인다. 야경은 현란한 불빛으로 특징되고, 그 인공불빛 속에 도시의 무분별한 욕망을, 그 치명적인 유혹을 숨겨놓고 있다. 야경 속에서라면 상처마저도 아름답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야경 속으로 숨는다. 그래서 야경은 어쩜 도시의 욕망이 피워 올린 꽃일지도 모르고, 사람들의 상처가 화신한 빛의 모나드들이며 단자들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이면에서 자본주의 경제학이 작동하는 것을 감지하는 일은 어렵지가 않다. 이를테면 밤은 도시가 온통 젊음으로 육박하는(속도) 시간이며, 젊음을 구가하는(향유, 주이상스) 시간이다. 그기에 젊음 아닌 것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기에 깃든 빛으로 화신한 상처는 충전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죽음충동의 다른 면일 수 있다. 바이털리즘의 외면을 하고 있지만, 기실 그 이면은 방전되는 에너지와 함께 작동을 멈추는 자동인형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욕망의 이중성이며 상처의 양가성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인공불빛의 모나드들은 말하자면 욕망과 상처의 무한순환을 매개로 밤이면 어김없이 되살아나는 자본주의 심리학을 표상하며, 영원히 방전되지 않을 자본주의 경제학을 표상한다. 어쩜 젊음이 구가된다기보다는 젊음이 상연되는 욕망극장을 표상하고, 이미 죽었는데 미처 죽었는지 모르는 좀비의 존재론, 살아있는 주검들의 존재론을 표상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 어디에 어떻게 이런 인공불빛이며 발광하는 도시가 깃드는가. 얼핏 작가의 그림은 다만 추상적인 장식 문양 패턴을 보는 것 같다. 어떤 의미내용을 불러들인 그림이라기보다는 의미내용을 몰아낸 형식주의 그림 같다. 모눈처럼 촘촘한 격자들, 그리고 그 격자들 속에 들어앉은 색점들을 모티브로 한 그림 같다. 여기서 색점들을 광점들로 읽는 순간 형식주의 그림은 의미내용과 연결된다. 전작에서 아파트를 재현하는 대신 아파트에 대한 스쳐지나가는 인상을 그렸듯, 근작에서 작가는 야경에서 도시의 또 다른 전형을 발견하고, 점멸하는 광점들에서 도시의 현상학을 감지한다. 


그렇게 작가는 알고 보면 자신의 그림에서 의미내용을 몰아낸 것이 아니었다. 도시의 야경에서 특징적인 광점들을 그렸고, 발광하는 도시를 그렸다. 특이한 점은 광점들의 모자이크가 그대로 스크린이 되고, 욕망의 스크린으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점들 하나하나는 욕망의 단자들이고, 그 단자들이 모여 욕망의 스크린이 된다. 광점들 하나하나는 저마다 다른 욕망의 색을 발하지만, 그 색들이 어우러지면서 도시의 현상학을 이루고 욕망의 현상학을 일궈낸다.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는 존재의 성좌들처럼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하는 도시를 그렸다. 흐르는 욕망을 그리고, 욕망의 스크린을 그리고, 욕망의 매트릭스(욕망이 흘러나오고 흘러들어가기를 반복 순환하는)를 그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밤을 잊은 도시인이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자기를 투사하고 저마다의 욕망을 투자하는 욕망극장으로 초대한다. 그 스크린 위로 숫자들이 흐르고, 한글자모와 알파벳이 흐르고, 알 수 없는 기호와 부호들이 흐른다. 이것들은 다 뭔가. 숫자들은 시간이다. 시간은 일상이다. 사람들은 일상을 사는데, 시간으로 일상을 분절하면서 산다. 그렇게 분절되고 쌓이는 시간의 끝은 어디인가. 죽음이다. 메멘토모리. 카운트다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시간 속엔 죽음이 들어 있다(신화에서 시간을 주재하는 신은 동시에 죽음신이기도 하다). 시간으로 일상을 분절하는 사람들, 그러므로 시시각각 시간을 헤아리는 사람들, 순간순간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들어 있다. 일상이 뭔지에 대한 주지가 들어있다. 


그리고 한글자모와 알파벳은 소통을 상징한다. 소통은 일상이다. 사람들은 일상을 사는데, 소통하면서 산다. 사실은 많은 경우에 소통한다고 착각하면서 산다. 불통이다. 만약 소통한다면 문장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온전한 단어들이 제시되어졌을 것이다. 한글자모와 알파벳은 말하자면 흩어진 단어들, 해체된 문장들, 정박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의미들, 상대를 잃은 하릴없는 의미들, 삼켜진 말들로 나타난 불통을 상징한다. 표면적으로 소통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소통한다고 착각하는 불모의 의미들과 불임의 언어를 상징한다. 알 수 없는 말들과 침묵하는 의미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기호들은 전산부호나 디지털 기호, 소통을 매개하는 약호들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부호들로 상징되는 욕망의 파편이며 조각들일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은 격자구조를 이루고 있고, 그 망 속에 색점들이 들어있고, 그 색점들의 스크린 위로 이런 숫자며 자모와 기호들이 흐른다고 했다. 여기서 격자구조는 일종의 네트워크로 볼 수가 있겠고, 시간과 소통과 욕망의 네트워크로 볼 수가 있겠고, 관계의 망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극장은 관계의 망 속에서 시간을 사는 사람들, 소통하는 사람들, 그리고 욕망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상영하고 있었다. 때로 그 스크린 위로 사람들의 실루엣이 흐르고, 짐승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짐승들은 뭔가. 현대인이 문명화되면서 상실한 것들, 이를테면 본능과 본성, 야성과 야생, 자연을 상징한다. 여기서 짐승과 동물은 다르다. 짐승이 자연 자체를 상징한다면, 동물은 인간에 의해 해석된 자연이며 인간에 길들여진 자연을 상징한다. 전작에서 작가는 아파트를 꾸미고 있는 근린시설물 중에서 숲보다는 가로수를 그리고 나무보다는 화분을 주로 그렸는데, 그 이면에는 이런 인문학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아이러니한 감정이 반영돼 있다. 그리고 근작에서 보는 것과 같은 도시에 출현한 짐승들에서 이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 짐승들은 왜 도시를 어슬렁거리는가. 억압된 것들의 귀환인가, 아니면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인가. 


아파트를 매개로, 빛의 스크린을 매개로 작가는 유토피아(실제로는 없는, 다만 사람들의 관념으로만 있는) 도시를 그리는가, 아니면 디스토피아 도시(도시의 파국)를 그리는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헤테로토피아(실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잊힌) 도시를 그리는가.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에로 초대하고, 그 경계 위에서 도시의, 일상의, 그리고 어쩜 삶의 가치론적 물음을 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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