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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영 / 공간의 정치학, 공간의 사회경제학

고충환





한 평 공간에 대한 연구. 한 평 공간 속에 물건들이 잡다하다. 팬과 형광등, 물 컵과 생수통, 반찬용기 등 대개는 플라스틱 소재의 각종 용기들, 폐 의자와 빨래건조대, 간이 사다리와 철재 봉, 투명 플라스틱 슬레이트 등등. 얼핏 보면 잡동사니들 같지만, 사실은 하나하나가 쓰임새가 있는 일상용품들이다. 이 기물들이 한 평 공간이 좁다는 듯 빼곡한데, 특이한 것은 어떤 접착제도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한 역학(이를테면 중력이나 장력)만으로 균형을 잡고 있는 점이다. 그 균형은 허술한 것 같지만 빈틈이 없고 되는대로 같지만 엄밀하다. 이처럼 빈틈이 없고 엄밀한 균형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 균형이 빈틈이 없고 엄밀한 것은 구조물 중 하나만 다르게 놓거나 심지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고 아마도 실제로도 그렇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 시대에 돈에 대한 개념 없이 공간에 대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공간이 돈이고 돈이 공간이다. 이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생존이 걸린 문제다. 한 평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서울에서 밀려나고 수도권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밀려나다 어렵사리 확보한 한 평 공간마저 대개는 임시방편이기 쉽지만, 여하튼 그나마 그 속에서 자족적인 생활이 가능해야 한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공간 활용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은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그 긴장감의 강도는 너무 팽팽한 것이어서 외부로부터의 최소한의 계기에도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공간이 무너지고, 삶이 붕괴되고, 존재가 내려앉고 만다. 작가의 이 작업은 이런 임시방편의 삶의 질을 사는 대다수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공간감, 긴장감, 불안감의 사회심리학적 징후 같다. 


이사. 그리고 그렇게 떠밀려 다니는 사람들에게 잦은 이사는 일상이다. 지금은 이사도 전문적인 업종이 되었고 제법 번듯한 이삿짐 전문차량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이삿짐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1톤 트럭이다. 작가는 이 트럭의 공간수치 그대로 알루미늄 프레임으로 짠 것을 무슨 액자처럼 벽에 걸고, 그 위에 이삿짐을 싸는 그물망을 드리워놓았다. 그리고 그물망 안쪽에는 아마도 이삿짐에 해당할 벽돌꾸러미를 비닐과 고무 밴드를 이용해 꽁꽁 싸 놓았다. 이 시대의 인문학은 바깥의 사유(모리스 블랑쇼)에 대해서 말하고 유목주의(질 들뢰즈)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작가의 이 작업은 순수한 타의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이며 변방의 의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반사회적이고 반제도적인 의식을 사는 사람들? 이미 변방의 글쓰기를 온 몸으로 실천해온 사람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람들?), 자본주의 시대의 유목민에 대해서 말해준다. 인격으로부터 한갓 짐짝(자본의 페티시? 물신의 페티시?)으로 추락한 사람들의 존재론에 대해서 말해준다. 


균형 잡기 혹은 불균형한. 거리정화를 목적으로 거리에 설치해 놓은 거대화분을 무슨 탑처럼 쌓아놓았다. 기우뚱한 지표면 위에 그렇게 쌓은 두 개의 화분 탑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형국이 외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표면 자체가 기울어져 있어서 불안한 느낌을 준다. 결국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균형은 불균형을 잠재하고 있는 균형이며, 안정은 불안정을 잠재하고 있는 안정에 지나지 않는다. 불균형한 균형이며 불안정한 안정에 지나지가 않는다. 근데 이 대목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불균형을 통해 균형을 추구한 바로크미학을 떠올리게 하고, 모순을 매개로 합에 이른 변증법을 떠올리게 하고, 낯설게 하기를 통해 친숙한 것의 실체와 대면하게 한 아방가르드의 소격효과를 떠올리게 만든다. 

작가는 이 모든 미학적 성과들의 지점이며 성분들을 공간의 정치학을 위해 전유한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이런 거리화분이 외적으로 거리정화를 수행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제도적인 장치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인도와 차도를 구별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그렇게 제도가 그어놓은 보이는 보이지 않는 선을, 금지를, 감시를 상징하는 것과 같은. 그렇다고 정색을 할 필요는 없다. 그 선은 가변적이고 유도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도에게만 그렇지만. 이를테면 포장마차 철거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노숙자를 밀어내기 위해서라면 그 선은 인도 안쪽으로 깊숙하게 침범할 수도 있는 일이다. 작가의 이 작업은 바로 이런 제도의 유기적인 공간학이며 식물적인 공간학에 대해서 말해준다. 


Squeeze. 압착하다, 짜내다, 끼워 넣다, 쑤셔 넣다, 그리고 심지어 강요하다, 갈취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작가는 이 말을 자연(유사자연?)에다 적용한다. 현대인은 말하자면 자연을 압착하고, 짜내고, 끼워 넣고, 쑤셔 넣는다. 그리고 때로 강요하고, 갈취한다. 무슨 말인가. 현대인은 자연을 갈취한다. 공기정화를 위해서.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장식을 위해서(피에르 부르디외는 장식이 죄악이라고 했다). 자연회귀사상을 증명하기 위해서. 은일하고 은거하는 삶을 증언하기 위해서. 증명? 증언? 실체를 결여한, 다만 전시적인 삶을 위해서. 그리고 더 이상 갈취할 게 없다 싶으면, 자연은 구석에 쑤셔 넣어진다. 쓱 봐도 불편하겠다 싶은 천장 쪽 구석 선반 위에. 화분보다는 팬이 있으면 적당하겠다 싶은 자리에. 이 작업은 구석, 변방, 잉여와 같은 자본주의의 타자들의 지점들을 예시해준다. 자연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물신에 의해 폐기된 것들이며 잊힌 것들의 존재방식이며 운명론을 예시해준다. 


구축된 풍경(입체의 경우). 낡은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며 맥주병 그리고 우유병과 기타 각종 음료수 병들이 첩첩이 쌓여있거나 배열돼 있다. 여기서 테이블은 아마도 현대인의 자기공간에 대한 인식 혹은 자의식 혹은 욕망을 상징하며, 이 낡은 테이블을 지지하고 있는 긴 네 개의 다리는 불안정한 공간인식이며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쌓인 병들이 산이나 숲과 같은 유사자연으로 제시되고, 그 가장자리 선이 산과 하늘이 맞닿는 의사 공지선을 그려 보인다. 아마도 크게는 녹색과 갈색 계열이 어우러진 음료수 병의 색깔이 자연의 그것을 닮아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여기에 인공적인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내는 빌딩숲이 자연을 흉내 내는(대체하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병을 쌓아놓은 것일 뿐인데, 그것이 숲을 연상시키고 빌딩을 떠올리게 만든다. 흔히 현대미술을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라고 한다. 그리고 화용론이 그 기술을 뒷받침한다. 무슨 말이냐면, 배열과 배치가 달라지면 그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리고 의미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지점은 다름 아닌 문맥 속에서이다. 모든 것은 텍스트 안에서의 일이며, 따라서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테이블은 공간이 되고 병은 숲이 된다. 아파트촌이 산이 되고 자연이 된다. 실재를 흉내 내면서 현실을 전유하는 자본주의적 풍경, 물신적 풍경, 욕망풍경이 된다.  


구축된 풍경(평면의 경우). 이처럼 자본주의 물신은 자연을 상품화하고, 빌딩숲과 아파트촌과 같은 인공자연으로 자연을 대체한다(대체자연?). 그리고 현대인은 그렇게 대체된 자연이며 상품화된 자연을 소비한다. 이 소비재들 중에는 유원지나 휴양지와 같은 비교적 자연의 원형에 가까운 것도 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엽서와 같은 이미지로 환원된 경우도 있다. 아마도 이런 자연 이미지야말로 가장 흔하게 소비될 것인데, 그 일면을 공사장 가림 막에서 볼 수 있다. 공사장 가림 막으로는 여러 이미지가 소용되지만, 그 중 전형적인 경우로 자연 이미지를 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공사장 가림 막은 공사현장을 가리기 위한 것이지만, 어떤 면에선 자본주의 기획의 치부(이를테면 재개발 현장에 맞물린 이권 같은. 삶의 터전에서 내몰리는 사람들의 처지 같은)를 가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가리기 위해 자연 이미지가 대비된다. 여기서 이권의 크기가 클수록, 처지가 심각한 것일수록 자연 이미지는 더 생생해 보이고 더 그럴 듯해 보여야 한다. 이미지 정치학이며 꿈의 산업이 더 잘 가동되어져야 한다. 

작가의 작업은 숲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세히 보면 숲의 부분 이미지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콜라주 된 풍경이다. 그리고 잘 보면 그 속에 건물이 숨어 있는데, 건축 현장에 비치된 조감도 그대로 부분 이미지들을 편집하고 콜라주한 것이다. 물론 그 부분 이미지들은 공사장 가림 막에서 유래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숲 이미지지만, 사실은 그 속에 건물 한 채가 숨어있다. 겉으로 보기엔 자연 같지만, 잘 보면 그 이면에 숨겨진 자본주의의 욕망이 보인다. 마치 가림 막 자체는 자연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자본주의의 치부를 숨겨놓고 있는 것처럼. 


30개의 물통이 만드는 공간. 각 20 리터의 물이 담긴 하얀 플라스틱 물통 30개가 가장자리 선을 따라 삼각형의 공간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물통은 아마도 주차금지와 같은 임시방편의 목적을 위해 급조해 만든 장애물, 일종의 생활미술이며 생활오브제에 착안한 것일 터이다. 그 자체 자기공간에 대한 현대인의 욕망이며 자본주의의 욕망을 상징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 물통들이 그려 보이는 삼각형은 모서리 공간이며 자투리 공간을, 잉여 공간 혹은 공간의 잉여를 상징할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왜 30개의 물통인가. 세월 호 현장에서 30명의 아이들을 구한 사람? 한 의인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순진무구한(통처럼 하얀) 30명의 아이들? 이 작업에서 작가는 공간 개념을 매개로 모서리와 자투리 그리고 잉여로 나타난 자본주의의 타자들의 지점들을 전유하는 한편, 자본주의 욕망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공간 활용법을 예시해준다. 조르주 바타이유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경제성이 없는 것들을 변방으로 내모는데, 그것들을 잉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잉여는 자본주의의 배타적인 논리와 억압적인 욕망이 만든 외상을 간직하고 있고, 그 외상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30개의 하얀 물통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주검을, 순진무구한 죽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미셀 푸코는 관념을 공간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 연장선에서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 개념이 유래한다.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없는, 다만 사람들의 관념에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에 반해 헤테로토피아는 분명 실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혹은 일반적인 공간개념과는 사뭇 다른 존재방식을 예시해주는 장소다. 가변적인 공간개념, 일시적인 공간개념, 잠재적인 공간개념, 공간에 매개된 억압의 계기와 권력의 작동을 폭로하는 장소다.  

홍유영의 작업 역시 이런 공간개념에 의해 뒷받침된다. 처음엔 생활의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만들어지고 덧붙여지고 해체되고 재구조화되는 공간의 생리며 생태학에 관심이 많았다. 가능태로서의 공간개념, 식물처럼 살아있는 공간개념, 이행하는 공간개념에 관심이 많았다.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에 종속되지 않는, 그 자체 전체인 부분이 만들어내는 파편화된 공간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근작에서 그 관심은 공간의 정치학이며 공간의 사회경제학 쪽으로 옮아가면서 심화되고 확장된다. 덩달아 현실적이고 서사적인 측면이 더 투명해지고 강조된다. 공간, 장소, 영역, 경계에 스며든 권력문제, 그리고 영토의 기획에 반하는 탈영토의 실천논리(질 들뢰즈)를 가로지르면서 넘나드는 이 일련의 작업들은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또 다른 가능한 지점을 짚는 형식실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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