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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택 / 구석의 인문학

고충환

류근택, 어떤 구석(1), 133 x 104cm



유근택의 근작은 코너 즉 구석이다. 구석이란 공간 개념이며, 공간 가운데서도 눈에 잘 띄지 않거나 잘 의식되지 않는 공간을 구석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니까 시선 바깥에, 의식 바깥에 있는 공간이다. 공간 안쪽에 있으면서도 실상은 시선 바깥에 있는, 의식의 자장 안에 있으면서도 의식의 망에 잘 포착되지 않는 공간이다. 공간 안의 비(때로 반)공간이며, 안쪽에 있는 바깥이다. 이런 서술을 가능케 하는 유령 같은 공간이다. 우리는 유령과 더불어 산다. 그리고 유근택은 바로 그 유령을 형상화한다. 다른 시간대에서 건너온 것들, 말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 미처 의미화를 얻지 못해 부유하는 (선)의미들, 안으로 삼켜버린 감정 또는 증발된 말들, 억압된 기억들이 낱낱이 소환된(프로이트에 의하면 억압된 것들의 귀환) 현실의 주름(질 들뢰즈)을 그린다. 주름은 그걸 펴보기 전에는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른다. 구석은 공간 속의 공간이며, 공간 속의 주름이다. 이는 구석이 눈에 잘 띄지도 잘 의식되지도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석 그리고 유령, 이로써 유근택의 근작을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주로 어떤 만찬, 어떤 논쟁과 같은 어떤 연작들에서 확인된다. 만찬이든 논쟁이든 다  사람이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에는 사람이 없다. 만찬이 사람들이 속마음을 감추는 공간이라면, 논쟁은 혹여 상대방을 해할지도 모를 감정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이라는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는 이 지시어가 숨겨진 속마음과 억압된 감정을 강조하고 있으며, 작가는 이 강조를 그린다. 그러나 정작 그림에선 그 강조마저 잘 보이지가 않아서, 유심히 신경 써서 볼 때 그 강조(방점 혹은 암시의 형태로)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공간 속의 공간은 겹공간이다. 이 역시 표면의 의미와 이면의 의미가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다. 사람들은 대개 만찬 자체를 보게 되고, 논쟁의 표면만을 볼 뿐이다. 여기서 작가는 만찬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 속내를 드러내며, 논쟁을 낯설게 함으로써 억압된 채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드러낸다. 따라서 ‘어떤’ 이라는 지시어는 프로이트의 캐니와 언캐니에 연동돼 있다. 친숙한 것에는 실상 그 안에 낯설음이 내장돼 있으며, 낯설음은 친숙한 것의 틈새로 파열된 것이다. 자크 라캉 식으로 표현하자면, 상징계의 틈새로 실재계가 출몰한 것이다. 현실은 억압된 것들 위에 축조된 것인 만큼 불안정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표면적인 안정은 단지 이면의 불안정을 임시방편으로 봉합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어떤’이라는 지시어는 언캐니와 실재계, 낯설음과 불안정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류근택, 어떤 구석2, 133 X 104cm

 

구석, 인식의 바깥. 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은 제대로 인식되지가 않는다. 작가는 특히 세계의 기원, 홍수, 어떤 실내 혹은 풍덩 연작에서 이런 인식(론)의 바깥 내지는 인식(론)의 한계를 형상화했었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주로 동심원 형상으로 퍼져나가는, 세계의 배꼽(옴파로스)이며 우주의 자궁(매트릭스)을 보여준다. 이 배꼽 또는 자궁을 중심으로 일상은 그리고 세계는 매일같이 태어나고 죽기를 무한 반복한다. 그리고 이 일상 가운데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삶과 죽음 그리고 많은 사건들 중 대부분이 인식의 그물망을 빠져나간다. 특히 사회가 점차 전시(스펙터클)화 되고 매체(매스미디어)화 되면서 미디어가 전송해주는 것들만이 우리의 의식 속에 남게 된다. 그것들이 일상을 재편하고 재구조화하고 축소한다. 미디어의 효율성의 법칙이 작용하면서 일상은 사건과 장면 위주로 편집되고, 어쩌면 개개인에게 더 절실하고 실질적인 일일지도 모를 사사로운 것들은 그 그물망을 빠져나간다. 

작가의 그림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자궁과 배꼽 주변 한쪽에 일상의 잡다한 편린들이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다. 그 물보라는 너무 작아서(은밀해서) 눈에 잘 띄지가 않는다. 누군가가 풍덩 하고 배꼽 속으로 뛰어들고 자궁 속에 빠진다. 분명 긴박한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그 사건은 순식간에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 흡수돼서 여타의 장면 속에 묻히고 만다. 그 긴박한 순간이 피터 브뤼겔이 그린 이카루스의 추락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에서 농부는 자기 일에만 여념이 없어서, 이카루스가 추락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존재론(혹은 존재론의 자장에 속하는)이라 하고, 일어난 일에 대한 이해를 인식론(혹은 인식론의 범주에 해당하는)이라고 한다. 허다한 존재론 중 인식의 그물망에 포착되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가 않는다. 어떤 일들, 어떤 사건들은 분명 일어나지만, 그 대부분이 인식론의 거름망을 빠져 나간다. 따라서 인식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돼버린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구석, 사유의 구석, 변방의 사유, 바깥의 사유(모리스 블랑쇼)에 대해 말해주는 대목이다. 

때로 자궁과 배꼽이 그려 보이던 동심원 구조가 구석에서 성장하다가, 마침내  거실을 온통 채우는 정형 비정형의 꽃, 나무, 숲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아마도 꿈과 희망, 좌절된 욕망들, 하염없는 생각들, 수정된 계획들, 감정의 앙금들이 육화된 형상들일 것이다. 너무 미미하기에(그렇지만 절실한), 너무 희박하기에(그렇지만 실질적인) 미처 일상 속에 편입되지 못한 것들이다. 작가는 이렇듯  미미하고 희박한, 동시에 너무 절실하고 실질적인, 그래서 미처 일상으로 기록되지 못한 것들을 그리기 위해 꽃을, 나무를, 숲을 발명(발견?)한다. 때로  자궁과 배꼽은 침대로 변주되기도 한다. 그 침대 한가운데 집 한 채가 버젓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로 아마도 조난당한 사람을 실어 나르는 헬기가 떠있는 형상이 첩첩한 산맥 같다. 그리고 때로 침대는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같기도 하다. 이는  이불이 마구 구겨진 형상에서 착상했었을 터인데, 이불은 그렇게 구겨진 채로 산맥을 이루고 물결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작가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이불 속으로 빠져들고, 사념의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세계가 유래한 자궁과 배꼽 속으로, 일상이 태어나고 죽는 침대 속으로, 밑도 끝도 없는 생각 속으로 스며든다. 


구석,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현실. 사실 작가가 구석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The Life on the Corner 시리즈에 소급된다. 대략 구석에서의 삶 혹은 삶의 구석 정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구석은 그저 공간적인 개념으로서보다는 변방이나 인식의 바깥 같은 의식적이고 인식론적인 차원으로 고쳐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도 구석에서는, 삶의 주변이며 일상의 변방에서는 나름의 삶이 진행되고 있다는 현실. 때론 거실이나 구석에 잡다한 물건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진풍경이 펼쳐지는데, 미처 풀지 못한 이삿짐 꾸러미로 어지러운, 그리고 마구 어질러진 꼬마의 장난감들로 어지러운 풍경이 교차되고 변주된다. 이 일련의 그림들의 원형을 찾자면, 2002년의 난제 시리즈로 재차 소급될 수 있다. 이렇듯 그림의 연대기를 살펴볼 때, ‘구석’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어느 날 갑자기 착상된 것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무르익은 것이며, 단지 매번 전시의 주제가 달라졌을 뿐, 사실은 그 저변에 흐르는 생활철학이며 생활감정이 공간의 형식을 빌려 추상된 경우로 보인다.  

이삿짐 그림이나 어질러진 장난감도 그렇거니와, 근작의 진풍경들 또한 작가의 개인사에 연유한 것인 동시에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고 있다. 이를테면 이삿짐은 임시방편의 삶의 질을 암시하고 있으며, 어질러진 장난감은 때론 삶을 살아가면서 감수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난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비록 가정 내에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이는 그대로 세계의 축소판으로 보게끔 만든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보게 만들고, 닫힌 것을 통해 열린 것을 보게 만드는 작가의 역량이며 용량이 십분 발휘된 대목일 것이다. 미시 속에 거시가, 거시 속에 미시가 똬리를 틀고는 상호작용 내지는 상호 호환되는, 그래서 그 두 경계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렇게 유근택의 그림에선 두 개의 현실이 하나의 화면 내에 중첩되고 포개진다.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현실, 두 개의 공간이 하나의 공간 속에 공존한다. 일종의 겹 공간이며, 주름 공간이다. 회화의 논리로 치자면 이중그림이, 문학의 경우로 치자면 액자소설이 제안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구석에 터무니없이 작은 장난감이며 기물이며 살림살이들이 정색을 하고 꾸려져 있다. 꼬마가 도열해 놓은 장난감 부대(배트맨과 헐크 같은) 같은가 하면, 소인국의 출현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구석이라는 무대에 올린 소극이나 미니어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구석엔 기물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이 작은 쪽문이 나 있으며,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기까지 한다. 아마도 작가는 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 자체 현실과는 다른, 자족적인 현실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구석에 난 쪽문은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통로이며 관문일 것이다. 꼬마의 통과의례? 성인식? 꼬마의 놀이를 통해 호출된 유년? 인식 바깥에 있는 것들이 인식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생기는 불협화? 착시현상? 노이즈? 틈새?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이 모두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때로 구석에 서 있는 접이식 간이 사다리가, 그리고 더러는 마치 무중력 상태인 양 허공에 떠 있는 사다리가 현실과 또 다른 현실을 넘나들며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예술은 중재며 매개의 기술이다). 

한편, 구석엔 서재도 자리하고 있다. 책의 정신이며 혼을 상징하듯 작은 불씨들을 간직한 책들이 인상적이다. 불씨는 작가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화적 아이콘이며 원형적 아이콘들 중 하나이다. 예컨대 들판을 태우는 불은 들불(현실) 자체라기보다는, 들불(현실)을 가장한 또 다른 현실을 암시한다. 예컨대 징후와 징조, 예견과 예시 같은. 책이 간직한 불씨 또한 그러한데, 그 불씨는 책속에 내장된 것이어서 책을 펼쳐보기 전에는 책을 태우지도 독자를 태우지도 못한다. 그 불이 책을 태우고 독자를 태우기 위해선 책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데, 그 과정과 방법이 책을 공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간화 된 책, 책 속에 축조된 구조(책의 집)가 구석이고 주름이다. 그러므로 구석에 책(서재)이 있다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책이 이미 구석이고, 책 자체가 구석이기 때문이다. 잎서 말했듯이 구석은 공간 속의 (비)공간이며, 안쪽에 있는 바깥이다. 책은 바깥의 사유가 움트는 집이며, 불씨는 그 집을 밝히는 등불이다. 책을 펼치면 그 꼴이 흡사 면과 면이 만나 모서리를 이루는 구석을 닮았다.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공간과 구석(안쪽의 바깥), 현실(구석)과 책(또 다른 현실)의 상호연관이며 상호 간섭에 대한 알레고리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미셀 푸코는 관념을 공간화하면서 실제론 없으면서 사람들의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를 유토피아로 지칭하고, 분명 실재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혹은 일반적인 공간 개념과는 사뭇 다른 의미기능을 수행하는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했다.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잘 의식되지는 않는? 인식(론)의 바깥에 있는? 그 의미 기능이 그대로 구석에 맞아 떨어지지가 않는가. 보기에 따라서 헤테로토피아는 꼭 구석을 위해서 예비 된 말 같다. 이 말은 주로 반사회적이고 반제도적인 의미기능을 담당한다. 변방, 잉여(조르주 바타이유), 바깥(모리스 블랑쇼)과 같은 소외가 만든,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그 소외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전략적으로 전유하는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구석은 전복적인 사유며 혁명적인 사유가 움트는 공간이고 장소 개념이다. 유근택은 구석을 그리고, 구석의 인문학을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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