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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 죽음과 고독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고충환




무슨 공룡시대에나 살았을법한 집체만한 몸통의 거북이와 건장하지만 거북이보다는 턱없이 왜소해 보이는 사내가 마주하고 있다. 서로 기세를 겨루듯 대치하고 있는 것도 같고, 묵언의 대화를 나누듯 교감하고 있는 것도 같다. 이 세상에 단 둘만 남은 종과 종, 존재와 존재의 독대를 보는 것 같은 절대고독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사각의 링 안에서 죽느냐 사느냐가 결판이 나는 비정한 세계의 숨 막히는 폭풍전야가 긴장감의 고삐를 바짝 죄어오는 것도 같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아마도 진지하다 못해 비장감마저 감도는 사내의 표정 때문일 것이다. 사실 거북이를 마주하고 선 사내는 표정도 예사롭지가 않고 차림새도 범상치가 않다. 상체를 벗어젖혔지만 그는 엉뚱하게도 스쿠버다이버의 옷매무새(수경과 잠수복)를 하고 있다. 물속에 들어가기 직전인지 아니면 이제 막 물속에서 나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담 그는 스쿠버다이버인가. 알고 보면 그는 작가의 자소상이다. 작가는 스쿠버다이빙이 취미이고, 그러므로 스쿠버다이버는 작가의 또 다른 인격이다. 


그렇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작가는 스쿠버다이빙을 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 있다고 했다. 이따금씩 숨이 턱턱 막혀올 때면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죽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 순간에 작가의 의식이 불러낸 게 거북이다. 짝도 없이 외톨이로 150년을 살다가 멸종한 마지막 개체 갈라파고스 육지거북이 조지라고 했다. 그동안 사람들이 종 번식을 위해 갖은 방법과 수단을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스스로 죽고 싶어 했던 것일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목숨을 저 홀로 부지하기로 작심했던 것일까(알다시피 거북이는 정상적인 환경에서라면 200년까지도 산다고 한다. 아니면 300년?). 그렇담 작가는 왜 하필이면 그 절박한 순간에 조지를 불러낸 것일까. 바로 동일시 현상이다. 일종의 동지의식이며 동류의식이라고나 할까. 비록 피와 살을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사실은 형제 이상의 동료애를 느낀다. 니체는 토리노에서 채찍을 맞으면서 죽어가는 말의 목을 부둥켜안고 미쳐버렸다고 한다. 말 못하는 짐승에 가해지는 일방적인 폭력에 대한 무력한 몸짓이었을까. 이성의 마비를 목격하는 것에서 오는 처절한 좌절이었을까.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순간 니체는 죽어가는 말에게서 동료의식이며 동료애를 느꼈을 것이다. 작가와 마찬가지의 자기 동일시 현상을 느꼈을 것이다. 


왜 니체인가. 니체도 죽음의 순간(말의 죽음의 순간, 아니면 이성이 죽는 순간)에 말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작가 역시 죽음의 순간(자신의 죽음의 순간)에 거북이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렇게 작가는 거북이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눈치 챘겠지만, 다만 여기서 죽음이 혹은 죽음의 순간이 매개가 된다는 전제 하에서 이런 동일시는 일어난다. 여기서 죽음은 뭔가. 삶의 거울이다. 뒤집어보면 삶 역시 죽음의 거울이다. 그러나 죽음이 삶의 거울이라는 사실은 정작 삶 속에선 잘 실감되지가 않는다. 거꾸로 죽음의 순간에서야 비로소 삶은 다름 아닌 죽음의 반영이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지고, 삶이 곧 죽음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삶이 곧 죽음이었다는 사실은 무슨 말인가. 죽음이 삶의 원인이고 근원이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알고 보면 삶에 죽음이 침전돼 있다. 삶의 침전물이 죽음이다. 그건 평소 침전돼 있어서 잘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삶이 위태로울 때면 언제나 그 실체를 드러내고, 삶이 의심스러울 때면 어김없이 자기 존재를 주장한다. 이걸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이라고 부르고, 자크 라캉은 실재계라고 부른다. 

여기서 작가는 물속에서의 순간적인 패닉상태를 삶의 순간 위로 가져온다. 삶이 곧 죽음이다. 살다보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고,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물속에서의 패닉은 정작 물속에서의 경험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죽음인 삶을 주지하고 인정하기 위한 반어법적인 표현이었다. 마치 갈라파고스 육지거북이 조지의 죽음이 정작 죽음이 아닌 삶속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살아있는 동안의 150년간에 걸쳐서 일어난 일이었던 것처럼. 이처럼 죽음인 삶을 사는 존재는 고독하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존재와 존재가, 죽음과 죽음이, 고독과 고독이 독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그러므로 갈라파고스 육지거북이 조지는 삶이 다름 아닌 죽음이고 고독임을 주지하고 인정하기 위해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호출된 작가 자신의 또 다른 한 인격이었고 분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인 삶을 사는 존재는 고독하다. 산다는 것은 고독을 산다는 것이며, 죽음(큰 죽음)을 유예하면서 죽음(작은 죽음)을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가 고독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인가. 피할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다. 그래서 존재가 불러들인 게 애완이다. 그러므로 애완은 어쩌면 고독을 분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모든 존재가 이미 고독하다면, 여하튼 고독을 분담하는 일은 중요한 일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존재와 존재 간의 상호분담이어야지,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에게로의 일방분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려라는 말은 조심스럽다. 그래서 반려라는 말은 사실은 반쪽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나의 반쪽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애완을 주제로서 끌어들이는데, 갈라파고스 육지거북이 조지를 끌어들여 삶이 다른 아닌 죽음임을 주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속뜻은 고독한 존재를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물고기 삼식이를 끌어들인다. 얼핏 보기에 애완치곤 좀 엉뚱하다 싶고 의외다 싶다. 보통 물고기에 대해선 애완이라는 말 대신 관상이라는 말을 곧잘 쓰고, 그 경우에도 삼식이 같은 식용 물고기에 대해서 그 말을 쓸 것 같지는 않다. 여하튼 말이란 것이 관습의 소산임을 인정한다면, 그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작가가 스쿠버다이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물고기에게서 애완을 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가는 그렇게 소재로서 끌어들인 삼식이를 각각 시바와 니바라고 부른다. 형제 중 셋째와 넷째를 의미하는 전라도 사투리라고 한다. 애완의 상식과 함께 정감을 자아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시바와 니바가 안쓰럽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쓰럽고, 육지거북이라면 당연히 육지에서 살아야 하는데 사실은 물에서도 그리고 나아가 육지에서마저도 살지 못하는 것이 안쓰럽고, 사람이라면 세상에 적응하면서 잘 살아야 마땅한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삶이 안쓰럽다. 그렇게 시바와 니바는 물이 아닌 뭍에 던져진 것 같은 부자연스런 삶을 살고, 부적응의 삶을 산다. 이를테면 그는 이중으로 잠금장치 된 방안에서 언제 올지도 모를 주인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빈 우체통 앞에서 오지도 않을 소식에 목을 빼는 삶을 산다. 애완의 현실을 풍자한 것이지만, 동시에 삶의 유비적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꼭 그렇듯 세상이라는 울타리 없는 감옥에 갇힌 삶을 살고,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무작정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멸종하기 전 150년 동안 저 홀로 산, 그러므로 사실은 죽음을 산 갈라파고스 육지거북이 조지를 통해 삶이 사실은 이미 죽음임을 주지시키고, 애완 물고기 시바와 니바를 통해 고독한 존재를 그리고 부조리한 존재(애완에 사람을 대비시켜보면 금세 판명될)를 주지시킨다. 서사로 치자면 동물에 빗대어 사람을 표현한 우화의 형식을 계승하면서, 고독한 존재(죽음을 사는 삶)며 부조리한 삶(뭍에 던져진 물고기)을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풍경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노랫말도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현실을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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