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남희 / 자화상과 정물화, 정체성이 분기되는 지점들

고충환




노화가 걱정 되세요(Feminine aging). 바르세요.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아드립니다(Time revolution). 희망을 가지세요(Hope in a jar). 기적은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Miracle workers). 만약 시간이 없거나 번거롭다면 한방에 해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Total solution). 다만 중독성이 있으니 유의하세요(Opium). 때론 화장하지 않은 민낯에도 자신감을 가지셔야죠. 물론 이런 자연 미인을 위한 화장품도 있습니다. 

그대로는 아니지만 화장품 광고의 익숙한 문구들이고 멘트들이다. 작가 김남희가 자신의 그림을 위한 주제로 내세운 문구 Feminine aging을 여성의 노화(현상)로 읽어본 독해와, 화장품을 소재로 그린 작가의 그림을 매칭 시켜본 것이다. 여기에는 흔히 광고의 꽃으로 알려진 화장품광고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반응과 최소한 양가적 감정이 반영돼 있다. 그게 뭔가. 바로 자본주의의 물신과 상품화의 논리가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욕망을 충족시켜주기보다는 욕망을 부추기는 데 있다. 욕망을 부추겨 욕망이 계속 가동되고 작동되게 하는 것에 있다. 그 작동원리에 광고는 필수적이다. 그 광고에는 죽음과 노화에 대한 자본주의의 배타적인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제일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에 의해 지지되고,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들이며 효율성이 없는 것들이 금기시되고, 죽음과 노화가 죄악시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렇게 자본주의의 변방으로 밀려난 것들을 잉여라고 부르고, 자본주의의 허구성(현실에 정박하지 못한 욕망산업이며 꿈의 산업)을 증언하기 위해서 예술을 호출한다. 바타이유에게 예술은 말하자면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이며 효율성이 없는 것임으로 인해 오히려 자본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강력한 때론 무력한 실천논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고, 죽는다. 김남희는 화장품을 매개로 이런 보편적인 삶의 순리를 자본주의의 배리(배타적인 논리, 역설)에다가 대질시킨다. 


이처럼 주제 Feminine aging은 여성의 노화(현상)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여자의 일생, 여성시대,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같은, 보다 폭 넓은 의미로도 읽을 수가 있다. 여기서 작가는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성적인 정체성)을 문제시하고, 나아가 정체성 일반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문제(탈성적인 정체성)를 문제시한다. 주지하다시피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늙는다는 것이 성적인 문제에 한정될 수는 없는 일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자기 개인사를 매개로 특수성을 넘어 보편성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며, 개별적 경험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주제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작가의 주제는 정체성 문제다. 화장대에 앉아서, 화장을 하면서, 거울에 비처보이는 자기를 반성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서 거울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화장을 하는 행위는 언제나 거울을, 그러므로 타자를 전제로 한 행위인 것). 정체성을 실어 나르는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인데, 나르시스의 물거울에서처럼 죽음충동을 일깨우기도 하고, 윤동주의 동거울에서처럼 수치와 치욕을 되돌려주기도 하고, 마녀의 깨진 거울에서처럼 왜곡된 욕망을 주지시키기도 하고, 라캉(자크 라캉)의 거울에서처럼 타자를 주지시키거나 한다. 거울은 말하자면 자기가 아닌 타자의 모습을 되돌려주고, 타자의 욕망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가 가능해지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거울을 보면서 나는 말하자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래서 이중분열은 필연적이다. 거울은 말하자면 타자 곧 분열된 자기를 주지시키는 매개다. 이런 자기의 이중분열과 타자의 욕망을 전제로 한 주체의 가능성은 자연스레 정체성 문제에 연동되고, 따라서 작가가 정체성 문제에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를테면 작가는 여자다(여자와 남자 사이). 작가는 1973년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 근 20년 넘게 의사로서 재직했다(전문인과 일반인 사이).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일반인과 예술인 사이). 그리고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산다(미국인과 한국인 사이). 작가의 그림엔 화장대를 소재로 한, 그리고 화병과 조개와 같은 정물을 그린 그림들이 있고, 일련의 자화상이 있다. 자화상에서 이런 자기의 이중분열과 정체성 문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정물화에서 암시적인 경우(정체성의 메타포?)로 반영된다. 자화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물화에서마저 자기의 개인사적인 경험에서 길어온 정체성 문제가 포개진다. 

여기서 자기 정체성은 아이덴티티와 페르소나로 분리된다. 주지하다시피 페르소나는 가면이란 어원에서 그 의미가 유래했다. 사회에 내보이는 주체, 제도에 내어준 주체, 즉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인 주체다. 그리고 아이덴티티는 그 가면 뒤에 숨은 주체다. 그렇게 나는 네가 보는 나와 다르고, 네가 알고 있는 나와는 틀리다. 그래서 라캉은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없고,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그림 속 작가는 가면을 쓰고, 여자(아니마)와 남자(아니무스)로 분열된다. 때로 자화상은 평상복 차림과 함께, 특정한 차림으로 분장하고 연출한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전통 예복을 갖춰 입은 자화상이 그렇고, 레게머리를 한 래퍼로 분장한 자화상이 그렇다. 


전통가면을 쓴 자화상, 전통적인 여인으로 분장한 자화상, 래퍼로 분장한 자화상, 이것들은 다 뭔가.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역할극을 제안한다. 자기란 그 자체 고정된 실체이며 결정적인 실체를 갖는 것이 아니다. 마치 저마다 맡은 역할에 따라서 다양한 자기가 가능해지는 것처럼, 자기란 사실을 알고 보면 삶이란 무대에서의 공연을 위한 한 역할을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나는 여자이면서 동시에 남자(나는 때로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해야 한다)고, 의사이고(사회적 주체), 예술가이며(욕망하는 주체), 미국인이면서 한국 사람이다. 이런 사정을 인정한다면 이중분열이 아니라 다중분열이고, 이중주체가 아니라 다중주체랄 만하다(전통가면을 쓴 자화상에서 나는 5중으로 분리되고 분열된다). 주체란 말하자면 이런 주체들(타자들)이 정박해 있는 지점들의 전체다. 그 지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 


그렇다면 이 가면들은 뭐고, 역할극은 뭔가. 또한 그 가면들은 왜 전통가면인가. 앞서 말했듯 나는 가면 뒤에 숨는다고 했다. 가면도 나(페르소나)고, 가면 뒤에 숨은 것도 나(아이덴티티)다. 가면은 그 뒤에 숨은 나를 암시하고, 억압된 나의 욕망을 암시한다. 그림 제목이 예사롭지가 않다. Self portrait with ancestors. 선조들이며 조상들과 함께 있는 자화상이라는 의미다. 내 유전자 속에 면면히 흐르는 피의 부름을 의미하고, 고향에 두고 온 나의 분신을 의미한다. 여기서 고향은 실재하는 지정학적 장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정작 그 장소에는 없는 것들, 그 장소 너머에 있는 것들, 장소의 비장소에 해당하는 것들, 말하자면 어떤 원형적인 존재로 부를 만한 것들, 존재론적 원형으로 부를 만한 것들이 정박해있는 곳(혹은 것)을 의미한다. 욕망은 결여다. 우리는 언제나 결여한 것을 욕망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가 없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처럼 우리는 언제나 한 갈림길 밖에 갈 수가 없다. 두 길을 동시에 다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길은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사실은 가지 못한 길이며 갈 수 없는 길이다. 그 길이 결여로 남고, 결핍으로 남겨진다. 그렇게 여자는 남자를, 의사는 예술가를, 미국인은 한국 사람을 결여한다. 그리고 그 결여와 결핍이 정체성 문제에 연동된다. 정체성의 일부분이 된다.  



이외에도 작가는 다기세트를 소재로 한, 그리고 조개와 진주를 소재로 한 일련의 정물화를 그려놓고 있다. 그런데 다기세트를 소재로 한 그림들에 부친 제목이 흥미롭다. Drinking tea alone. 그냥 Drinking tea라고해도 될 것을 굳이 alone을 붙여 강조했다. 늙어간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저 홀로 차를 마시는 일과 같다. 어디 차 마시는 일 뿐이랴. 자기와 독대하는 이 일은 거울을 매개로 타자와 만나지는 경험과 비교된다. 거울은 언제나 타자를 보여주고, 타자가 욕망하는 자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차 마시는 일은, 더욱이 저 홀로 차를 마시는 일은 더 이상 타자(혹은 타자의 욕망)가 매개되지 않은 자기와 만나지는 경험이며, 순수하게 자기 내면과 대면하는 경험이란 점에서 거울경험과 다르다. 그리고 조개와 진주는 바다가 원산지다. 아마도 그것들은 바다 건너편에 대한 그리움을, 바다 저편에 있어서 가닿을 수 없는 원형적 그리움을, 결여와 결핍에 부수되는 존재론적 그리움을 상징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일련의 자화상과 함께, 외관상 정물화로 나타난 화장품(욕망하는)에, 거울(타자를 주지시키는)에, 화병(여성스러운)에, 다기(자기내면과 만나지는)에, 그리고 조개(결여와 결핍을 그리워하는)에다가 자기의 또 다른 자화상들을 분기해놓고 있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