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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그 형상을 입다 / 기억의 형태와 색깔

고충환


모든 것은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기억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존재는 기실 기억에 다름 아니다. 기억에 의해서 비로소 경험도 가능해지고 지식도 가능해지고 현실인식도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 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나는 기억 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바꿔 읽을 수 있다. 사고의 축적이 기억이고 축적된 생각이 기억이다. 기억에는 거리가 있다. 아득하고 먼 희미해진 기억이 있는가하면(원형적 기억?)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 있다. 기억에는 작용이 있다. 우호적인 기억을 부풀리는 작용이 있고, 외상을 감추는 작용이 있다. 과장과 억압과 왜곡이 기억의 고유작용이다. 존재의 자기보존법칙에 의한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래서 기억은 현실 그대로를 복원해주지는 않는다. 현실에서 유래하지만 현실 그대로는 아니다. 현실에 결부된 또 다른 현실이라고나 할까. 의식적인 현실과 무의식적인 현실의 상호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은 억압된 것들이며 상실된 것들을 떠올려준다. 그리고 그렇게 떠올려주면서 현실에 또 다른 현실의 살점을 보탠다. 

유년의 기억과 유토피아의 추억. 여기에 동물들이 있다. 화초에 물을 주다 보면 불현듯 떠오르는 동물들이다. 최숙정의 기린과 개가 그렇고, 최혜광의 팝적인 동물이 그렇고, 임승섭의 하얀 고양이가 그렇다. 디스토피아를 예감하는 시대에 동물들은 그 천진함으로 유년의 기억과 함께 유토피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어쩜 현대의 애완 개념은 현대인의 고독을 방증하는지도 모른다. 상실된 유년이며 상실된 자연을 방증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동물은 어떻게 상실된 유년을 되불러오는가. 모방본능이다. 이를테면 소년은 하얀 고양이의 포즈 그대로를 흉내 내는데, 이런 모방본능이야말로 모든 유년기의 공통현상이다. 바로 친밀감의 표시인 것이며, 타자와의 관계형성이 일어나는 최초의 사건이다. 나는 흉내 내면서 너를 쳐다보고, 너는 흉내 내는 나를 곁눈질 한다. 그렇게 교감이 일어난다. 그래서 현대인이 유년을 상실했다는 말은 사실은 이런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시켜주는 친밀감을 상실한 것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표상된 존재론적 기억.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화초가 등장하는 정태경의 그림(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이나, 나무 조각을 조합해 집이 있는 풍경을 재구성한 김양선의 작업(집에 가는 길)에서 집은 존재를 상징한다. 여기서 집은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중적인데, 주체를 보존하면서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타자에게 집은 이와는 다르게 이중적인데, 욕망의 대상이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이런 주체와 세계, 주체와 타자와의 이중적이며 중의적인 관계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집은 무엇보다도 존재론적 원형이며 고향을 상징한다. 여기서 집도 그리고 고향도 실재하는 지정학적 장소를 의미하기보다는 상실한 것들의 원형을, 존재가 유래한 원형을 상징한다. 존재가 상실한 자기를 찾아나서는 원형서사나 현대인의 정체성 상실과도 무관하지가 않은 대목이다. 특히 김양선은 나무 조각과 함께 더러 폐 문짝과 같은 기성품을 짜 맞춰 집을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낡고 해진 집으로 표상되는 존재의 시간을, 존재의 희미한 기억을 상징할 것이다. 
 
원형적인 기억. 기억에도 거리가 있다고 했고, 아득하게 먼 나머지 희미해진 기억이 있다고 했고, 그 기억을 원형적인 기억이라고 했다. 기억이 감각적 경험의 층위를 넘어설 만큼 아득해지면 관념적이게 된다. 여기에 수메르 산(신지원의 수미산)이 있다.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의 배꼽으로 알려진, 부처가 득도한 것으로 알려진, 그래서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존재가 유래하고 되돌려지는 원천을 상징하며 유토피아를 표상한다. 얼핏 실재를 닮아 있지만, 알고 보면 수미산으로 표상되는 최초의 낙원이라는 관념을 표현한 것이다. 실재하는 곳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장소인 만큼 양식화된 표현을 얻고 있고, 보기에 따라선 앙리 루소의 소박파 회화 내지는 나이브 페인팅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박성배의 사진은 수묵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실사에도 불구하고 실재 그대로는 아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자연을 좌우대칭으로 표현했다. 우연한 자연이며 불완전한 자연 대신 완전한 자연이라는 관념을, 존재가 유래하고 되돌려지는 근원으로서의 자연이라는 관념을 표상한 것일 터이다. 



역사적인 기억과 자기반성적인 기억. 노춘석은 일종의 인물열전을 제안한다. 성인들을 비롯한 역사 속 알만한 인물들의 초상을 모자이크처럼, 모음그림처럼 재구성해 보여준다. 부처나 예수와 같은 종교적인 인물들이 있고, 간디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있고, 신화적이고 일상적인 인물들이 있고, 심지어는 배트맨과 같은 허구적인 인물들이다. 이 사람들은 다 누구인가. 아마도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주체를 만들어준 타자들의 목록일 것이다. 마치 시간의 결이며 겹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초상의 표면에 비정형의 주름이 덮여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런 역사적인 기억의 한 자락에 자기반성적인 기억이 있다. 김광미의 그림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에는 알 수 없는 덩어리, 유기적인 덩어리, 비정형의 덩어리가 등장한다. 미증유의 자기를 상징한다. 그 미증유의 자기가 풍경을 바라본다. 그 풍경은 내면풍경이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바라본다는, 자기반성적인 상황논리가 연출되는 풍경이다. 

물질의 기억과 질료의 기억. 김지원의 석고, 김현정의 빛, 그리고 박현경의 밤이 물질의 기억이며 질료의 기억을 떠올려준다. 김지원의 작업에서 보듯 석고가루에 물을 혼합해 굳히면 자연 채취한 석고와 화학적 구조에 변함이 없는 순수석고광물이 된다. 자연의 화학작용법칙에 개입하는, 자연광물의 생성과정에 개입하는 인위적인 매개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광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석고가루가 원래 천연 상태의 석회질 광석으로 되돌려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돌려진 석회질 광석은 처음상태 그대로 환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환원되면서 환원되지 않는, 같으면서 다른 광물(?)을 자기의 본성을 추억하는 석고의 관성이며 석고의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김현정은 빛의 기억을 예시해준다. 평면 상태의 유리판에 엷은 안료로 채색한 연후에 열을 가해 굳힌 작업으로서 여러 겹의 기하학적인 형태들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포개지면서 이면의 형태를 반영하고 드러내 보이는 반투명의 작업이다. 채색 유리판을 투과하는 은은하고 은근한 빛의 질감을 혹은 빛의 기억을 조형한 작업일 수 있다. 아니면 빛의 질감을 기억하고 있을 유리의 기억을, 유리의 피부를 더듬는 빛의 애무를 형상화한 작업일 수 있다. 그리고 박현경은 새카만 화강석 판면에 소형 그라인더를 이용해 미세요철을 조성한 연후에 그 요철 표면에 채색을 했다. 조각과 회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작업에서 수면에 일렁이는 물결이 가로로 길게 표현되고, 무수한 색점들이 어우러져 밤하늘의 별자리를 수놓는다. 그렇게 밤하늘의 별자리가 칠흑 같은 화강석 표면색감과 대비된다. 그리고 그렇게 별의 기억이며 밤의 기억 속으로 초대한다. 




이미지의 기억과 일루전의 욕망. 임진혁의 작업을 보면 거울(아마도 흑경?) 뒷면에 스크래치와 페인팅을 부가해 이미지를 그렸다. 그렇게 그려진 거울 속 그림과 외부환경을 반영하는 거울 표면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면서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가 다르다. 멀리서 보면 총을 겨누고 있는 포즈로 보이는데, 정작 가까이서 보면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을 패러디한 것이다. 총이 피리로 드러나는 것에 반전이 있다. 또 다른 그림 역시 명화를 패러디한 것인데, 성모상을 그린 것이다. 총이 불을 뿜는 것이나 성모상의 후광을 광점들로 표현했다. 이처럼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가 다른, 속 그림과 겉 그림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그림이 흡사 만화경과도 같은 이미지 환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강현대의 입체작업(목가구?)이 마치 기억을 구조적으로 환원해놓은 것 같은 형태를 상기시킨다. 일종의 기억을 담는 그릇이며 기억을 수납하는 구조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억은 있다. 기억이 없다면 경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없다. 기억의 망실 곧 망각이 없다면 모든 기억이 올올이 되돌아와 현실적인 삶이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기억은 진실하고, 더러 기억은 거짓말을 한다. 어떤 기억은 의식의 층위에 편입되고, 다른 어떤 기억은 무의식의 층위 속으로 잠수를 탄다. 어떤 기억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다른 어떤 기억은 치유 불가능한 상처로 아로새겨진다. 이처럼 기억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고정된 형태도 정해진 색깔도 없다. 여기에 작가들이 저마다의 기억을 되불러와 형태를 부여하고 색깔을 덧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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