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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Be Nature / 하늘과 숲 그리고 물을 통해 본 자연, 자연성

고충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피직스와 나투라로 구분한다. 각각 감각적 자연을 피직스로, 그리고 감각적 자연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이며 원동력을 나투라로 구별했다. 각각 자연의 질료적 측면을, 그리고 자연의 본성을 강조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의 원인이며 본성이 뭔가.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이다. 동양의 논법으로 치자면 기에 해당한다. 요새 유행하는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바이탈리티 곧 생기가 되겠다. 살아 있는 것들의 기운이라는 말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변화한다. 그래서 자연은 정지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이행하고 움직인다. 항상적인 운동성이야말로 살아 있는 것들의 본성인 것이다. 외관상 자연은 정지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런 탓에 그 본성, 그 운동성, 그 생명은 잘 감지되지가 않는다. 그래서 민감한 감각적 레이더가 필요하다. 그리고 때론 감각적 층위를 넘어서는 혜안이며 심안이 요청된다. 더욱이 자연의 본성과 운동성과 생명 개념은 자연의 감각적이고 질료적인 측면과는 다르게 열린 개념이다. 분분한 해석 가능성에 그 의미가 노출돼 있다는 말이다. 유사 이래로 자연은 끊임없이 주제며 소재로 다루어져 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려지고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고갈되지는 않을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자연을 소재로 한 일군의 작가들이 있다. 한국화와 페인팅을 아우르는 평면회화(이윤진, 강찬모, 이성자, 강운, 김윤수, 김보희, 김홍주, 안경수, 김지원, 이광호, 김진관, 이재삼, 유근택, 전미경), 사진(이명호, 권오열, 민병헌)과 설치(에브리웨어,김기철) 등 저마다의 미디어로 자연을 표현했다. 자연의 감각적 질료를 소재로 취했지만, 소재에 머물지는 않는다. 어떤 정서를 파고드는데,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공감할 만한 여지를 이끌어낸다. 자연과 주체가 만나지는 사건은 저마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이로부터 공유할 수 있는 보편경험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향유할 수 있는 계기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하늘(강찬모, 이성자, 강운, 김윤수, 에브리웨어). 강찬모와 이성자는 은하수를 형상화했는데, 자연의 물리적 현상을 관찰한 것이라기보다는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래서 어둡지가 않고 밝다. 흔히 은하수를 꿈길에다 비유하는 것에서 엿볼 수 있듯 유토피아며 이상향을 환상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강운의 구름은 변화무상한 자연이며 덧없는 존재를 상기시킨다. 구름은 끊임없이 이행하는데, 마치 항상적인 자기부정을 수행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 구름은 사실은 부재하는 구름이고, 불가능한 구름이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가 구름에 천착하는 이유가 이런 존재의 상기, 이를테면 항상적으로 이행하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덧없는 존재의, 부재하는 존재며 불가능한 기획의 메타포 때문일지도 모른다(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구름처럼 덧없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에브리웨어는 공간에다가 하늘을 설치한다. 하늘을 설치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하늘을 설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럼에도 설치된 하늘은 가상의 하늘이다. 또 다른 가상현실이라는 말이다. 현대미술의 어떤 갈래는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가상현실에서 출발하는데, 그 또 다른 한 사례를 예시해준다. 그렇게 제안된 가상현실이 감쪽같은 현실을 닮아 있다는 점에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공감도 크다(가상현실은 현실에 가까울수록 그만큼 더 잘 작동되고 작용한다). 

숲(김보희, 김홍주, 안경수, 김지원, 이광호, 김진관, 이재삼, 유근택, 이명호, 권오열, 민병헌). 흔히 자연으로 치자면 식물과 나무 그리고 숲을 떠올리기 쉽다. 그런 점에서 자연의 전형적인 소재로 봐도 되겠다. 작가들은 화초를 그리기도 하고 잡초를 그리기도 하는데, 대개는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클로즈업돼 있다. 사물대상을 화면 가득히 채워서 그리는 것인데, 이 근접시점 자체는 자연 본래의 생리와는 다르다. 자연에서 사물대상은 다른 사물대상과의 관계 속에 있기 마련인데, 근접시점이 그 관계의 망을 끊는다. 근접시점에서 사물대상은 관계와 네트워크의 한 지점이며 요소로서보다는 사물대상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 그래서 일종의 사물초상화랄 만한 지점이 열리는데, 이 지점을 열기 위한 미학적 장치로 봐도 되겠다. 그 지점이 미학적 장치인 것은 그렇게 재현된 자연이 자연의 감각적 대상을 넘어 자연의 본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암시된 자연의 본성은 뭔가. 양가성이다. 비결정성이다. 낯설음이다. 침묵이다. 개념화되기 이전의 존재 자체, 의미화 되기 이전의 존재자체다. 말하자면 자연은 식물 아니면 동물이라는 인간의 개념과 의미부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낯설다. 자연의 본성과 대면한다는 것, 그것은 개념 바깥에서 본다는 것이며, 개념 없이 본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자연의 본성 곧 자연 자체와 만나질 수가 있는 일이다. 그렇게 보면 뭐가 보이는가. 세계와 존재와 사물대상의 맨살이 보인다. 이를테면 김지원의 맨드라미는 식물이지만 정작 식물성보다는 동물성에 가깝다. 닭벼슬 같고 동물의 살점 같다. 소재로서의 맨드라미 자체를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맨드라미를 구실 삼아 사실은 자연의 몸을 그리고 육질을 그린 것이라고나 할까. 자연이 품고 있는 비의, 이를테면 야성과 야생을 감각적 표면 위로 밀어올린 것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근접시점은 자연의, 사물대상의 육질 곧 몸의 질감을 드러내기에 효과적이다. 
이렇듯 개념 바깥에서 보고 개념 없이 보는 것과 비교되는 경우를 김홍주의 그림에서 엿볼 수가 있다. 김홍주의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다. 그러나 그 사실적인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짐짓 낯설고 생경해진다. 마치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놓은 자수를 보는 것 같다. 그 사실은 감각적 사실을 향하는 대신, 개념적 사실을 향하고 의미론적 사실을 겨냥하는 것 같다. 그렇게 작가의 사실적인 그림은 개념이며 의미로 환원된다. 마치 파이프 그림을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텍스트를 써넣은(그려 넣은? 심지어 김홍주는 그림도 그리고 텍스트도 그린다) 르네 마그리트를 연상시키는데, 그림은 보는 것인가 아니면 읽는 것인가, 와 관련한, 그림은 감각적 대상인가 아니면 인식론적 대상인가, 와 관련한, 그림은 실재(감각적 재현)인가 아니면 기호(언어처럼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기호)인가, 와 관련한 전형적인 물음에 연동된다. 
그리고 이명호의 사진이 이런 물음(사물대상에 대한 개념적 접근과 이해)과 통한다. 이명호의 사진은 그저 사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진 퍼포먼스로 명명할 만하다. 그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구실로 일련의 일이며 사건이 일어나고 수행되는 것인데(사진이 매개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사진적 사건?), 최근 현대사진의 한 경향으로 볼 수 있겠고, 이명호의 사진 역시 그런 관점에서 볼 여지가 있다. 작가는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서 일군의 스텝이 필요하다. 대개는 나무와 같은 피사체가 결정되면, 그 뒤에다 일종의 거대한 막 내지 스크린을 설치하는데, 막을 지지해줄 아시바를 따로 설치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지대가 설치되고 나면 비로소 사진을 찍는다. 배후에 설치된 막을 배경 삼아 피사체에 해당하는 나무를 찍는데, 무슨 캔버스에 그린 그림 같다. 캔버스에 그린 나무 그림을 자연 한가운데에다 세워놓은 것 같다. 


여기서 막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막이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막의 개입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진 일이 일어난다. 무슨 일인가. 여전히 자연의 일부에 속해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만 자연으로 환원되지는 않는 무엇, 여전히 자연에 연장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연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막이, 스크린이, 캔버스가 들어서 자연의 형질을 변질시키는데, 자연을 졸지에 이미지로 변질시킨다. 엄밀하게는 자연이면서 동시에 이미지로 변질시킨다. 클레멘테 그린버그는 회화의 본질을 평면이라고 했는데, 자연을 회화로, 이미지로, 사진으로 옮기는 장치(인식론적 장치? 개념적 장치?)로 확대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사진은 이건 자연인가 아니면 이미지인가를 물어오고, 자연이 어떻게 이미지가 되는가를 물어오고, 자연이 어떻게 인식론적 개념장치를 통과하는가를 물어온다. 


그런가하면 근접시점과 비교되는 경우가 여백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여백은 동양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에 속한다. 여기서 여백은 그저 빈 공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충만한 빈 공간이다. 충만한 빈 공간? 그렇다면 어떻게 외관상 빈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충만한 공간이 가능한가. 암시다. 그려진 것으로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을 암시하는 기술이며,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기술이다. 기술이라고 했지만, 그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감각이며 감수성의 문제에 가깝다. 기술은 습득될 수 있지만, 감수성은 습득될 수도 학습될 수도 없다. 감수성은 사물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과 연민으로부터 온다. 존재에 대한 연민이 없다면 감수성도 없다. 암시란 보이지 않는 걸 보아내는 눈이며, 존재를 향한 연민에 의해서만 비로소 열리는 눈이다(존재가 주체에게 자기를 열어 보이고 내어주는?). 


바로 그런 눈이며 암시며 여백이 김진관의 그림에서 확인된다. 여백은 말하자면 김진관의 그림을 지지하는 정신의 축이며 정서의 핵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을 보면 그려진 부분보다 그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더 많다. 얼핏 보면 그저 무심한 듯 툭툭 그어놓은 선 같은데, 알고 보면 말라비틀어진 마른 풀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바람의 질감이 감촉되고, 바람에 마른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마른 풀을 부드럽고 따스하게 감싸는 햇살이 감지된다. 잘 보면 마른 풀을 들썩이는 벌레들의 이동이 보일지도 모른다. 바람과 소리와 햇빛과 벌레는 정작 작가의 그림에는 그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마른 풀이 암시하는 것들이며, 그 암시 탓에 비로소 가능해진 것들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른 풀을 그린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다. 뭘 그려도 그런 식이라면, 그건 사물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며, 존재에 대한 연민의 결과로 봐야 한다. 타고난 감수성의 문제로 봐야 한다. 


이런 여백의 감각 내지 감수성은 민병헌의 사진에서도 확인된다. 흑백으로 찍은 그의 사진에는 극적인 대비도 순간의 포착도 없다. 사진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미덕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극적인 대비와 순간의 포착은 결정적이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 그 결여는 치명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사물대상의 육질(물성)이나 이렇다 할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사진은 이런 두드러져 보이는 덕목의 지점들을 애써 피해간 것처럼 보이기조차 하는데, 바로 그 결여와 우회가 오히려 그의 사진을 지지하는 미학이 되고 있다. 그게 뭔가. 바로 정서와 분위기다. 앞서 말한 타고난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흑백사진은 흑과 백 그리고 그 중간(회색)을 아우르는 계조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지는데, 그의 사진에는 흑과 백이 없이 중간계조만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흐릿하고 애매하고 부드럽고 아득하고 아련하고 멀고 깊다. 
작가의 경우에는 바로 그 중간계조가 여백이다. 여백은 충만한 빈 공간이라고 했다. 어둠은 어둠에 속한 것, 밝음은 밝음에 속한 것만을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중간계조는 어둠에서 밝음으로 건너가고, 밝음에서 어둠으로 건너오는 것들을, 말하자면 순간이 아닌 이행하는 운동성이며 과정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다시, 그게 다름 아닌 암신데, 그 암시가 어떤 울림을 자아내고 여운을 남기고 분위기에 감싸이게 한다. 애매한 것일수록, 불분명한 것일수록, 비결정적인 것일수록 더 정서를 건드리고 무의식을 파고드는 법이다. 분명한 것이며 결정적인 것, 말하자면 적어도 사진 속엔 없는 것을 사진의 일부로서 불러오기 때문이다. 적게 말할수록 사실은 더 많은 말을 하고, 적게 표현할수록 사실은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고나 할까(절제의 미학? 표현의 경제학?). 단순한 기술적인 문제가 아닐 것이다. 감수성이 뒷받침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고 저절로 되는 일이다. 


민병헌의 사진은 이행하는 운동성이며 과정을 암시한다고 했다(너무나 미세하고 섬세해서 잘 감지되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렇게 민감한 각각촉수에만 감지되는 것이지만. 그래서 차라리 울림이며 여운이라고 해야 할). 그게 뭔가. 바로, 시간이다. 알다시피 시간은 현대미술에서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지만, 현대미술 이전에 조형예술은 원래 공간예술에 속했다. 여하튼 이런 시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유근택의 스치는 풍경이며 앞산을 그린 시리즈 그림이다. 차를 타고 오가는 길에 그린 풍경인데, 여기에 기억으로 되살려낸 풍경이 포개진다. 엄밀하게는 시지각적 기억이 그린 풍경인데, 이동 중이므로 그 기억이 온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상적인 것만을 취사선택해 그린 풍경이며, 이행 중인 풍경이며, 마치 비로 쓸고 지나간 듯 속도감이 실린 풍경이다. 그리고 앞산 풍경으로 치자면, 외적 환경과 내면적인 조건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그린 것이다. 말하자면 똑같은 사물대상이지만, 그날그날의 기후와 대기,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사사로운 기분 여하에 따라서 사실은 매번 다른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이재삼은 숯으로 숲을 그린다. 숯으로 소나무를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고, 달빛어린 숲이며 개울을 그린다. 목탄화로 명명된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론을 개발하고, 그 기법을 적용해 그린 일련의 그림들이 숯으로 그린 그림답게 밝은 부분보다는 어두운 부분이 지배적이다. 빛은 그 자체로 두드러져 보이기보다는 어둠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고, 처음부터 어둠의 본성에 속해져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무슨 벨벳과도 같은 어둠에 감싸인 빛이 은근해보이고, 내면적으로 보이고, 부드럽게 보인다. 벨벳 같은 어둠 위로 새나오는 부드러운 빛의 질감이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을 지배하는 분위기며 정서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존재로 하여금 밤의 기운(정기?)과 만나지게하고, 숲의 비의와 대면하게하고, 자연의 원형에 맞닥트리게 한다. 낭만주의에서 밤은 어둠과 함께 죽음을 상징하고 정화를 상징한다. 자연이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며(낮은 문명의 시간이다), 존재가 원형을 되찾는 시간이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 시간을, 그 극적 순간을 열어놓는다. 

물(전미경, 김기철). 전미경은 화면 가득히 풀사이즈로 잡은 수면을 그린다. 일렁이는 수면 위에 자잘한 빛 알갱이로 산란하면서 부서지는, 아롱거리는, 반짝이는 빛의 유희(유리알 유희?)를 그린다. 수면과 빛의 희롱을 그린다. 물질을, 질료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유희와 희롱이 감각적이다. 드뷔시와 에릭 사티의 인상주의 음악을 연상시키고,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모네가 말년에 그린 수련 연작을 분석하고 해명하기 위해 바슐라르가 끌어들인 개념이다. 수면과 빛과 바람과 공기가 모네의 회화적 상상력을 자극했다고 보는, 물질이 상상력을 견인했다고 보는 개념이다. 


그리고 김기철은 사운드아트 혹은 사운드스컵처로 명명되는 음향설치작업을 선보인다. 사운드아트는 크게 플러그드아트와 언플러그드아트로 구분되는데, 각각 전기적 장치와 같은 인공적인 조작을 통해 소리를 얻는 경우가 플러그드아트에, 그리고 자연음, 우연음, 일상음, 채집음과 같은 일상에서 직접 채집한 소리의 경우가 언플러그드아트에 해당한다. 존 케이지의 사운드퍼포먼스가 언플러그드아트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편이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김기철의 소리작업은 어디에 해당할까. 작가가 소재로 채택한 빗소리 자체는 일상에서 직접 채집한 것이므로 언플러그드아트에 해당하지만, 그렇게 채집된 소리를 스피커라는 전기적 장치를 통해 증폭시킨다는 점에선 플러그드아트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증폭된 소리가 빗소리의 합주를 들려준다. 여기서 비 자체는 청각적 기호와 시각적 기호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실제로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경우는 다르다. 말하자면 시각적 기호를 청각적 기호로 전환시켜 보여주고(상상으로 보여주고) 들려주는(실제로 들려주는) 식이며, 이는 다른 감각들이 서로 통한다는 공감각에 힘입고 있다. 아마도 하나의 감각경험이 다른 감각을 연상시키는 연상 작용에 착안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의 소리작업은 마치 실제로 빗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빗소리의 합주에, 아마도 꽤나 행복한 자연의 하모니에 젖어들게 만든다. 

참여 작가들의 작업에 나타난 경향을 중심으로 자연의 본성을 되짚어봤다. 그 과정에서 각각 하늘과 숲 그리고 물을 매개체로 삼았는데, 비유를 하자면 하늘은 이상에 속하고, 숲은 존재의 원형이며 비의를 품고 있고, 물은 생명 곧 존재 자체에 해당한다. 여기서 존재 자체인 물은 숲에서 하늘로 그리고 재차 하늘에서 숲으로 이행한다. 바로 이 항상적인 이행이 반복되는 운동성이 순환이다. 순환이 뭔가. 바로, 자연의 섭리다. 하늘과 숲, 빛과 어둠, 낮과 밤, 삶과 죽음, 이상(인간은 유토피아 없이 살 수 없다)과 원형(마술이 지배하는 세계, 아마도 예술이 맞닿아 있을 세계) 사이를 무한반복 운동하는 존재의 원리다. 이번 전시는 그런 자연의 섭리며 존재의 원리를 새삼 되새기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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