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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선혜 / 회화 프로젝트, 회화는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

고충환



2012 허브스케이프, 미정지의 식물성. 작가는 식물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식물성을 그린다. 그 식물성은 미정지의 식물성이다. 외관상 식물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외관상 미정지의 식물성은 오문인 것 같다. 외관상이라고 했다. 이 문장이 오문이 되지 않기 위해선 외관상이 아닌, 내면성이 되어야 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외관상 식물처럼 보이는 식물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없고, 식물을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내면성 곧 내면의 눈을 통해서 본 식물을 그리는데(다르게는 식물과의 교감을 그리는데), 여기서 내면성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특히 주관적이다. 그래서 외관상 식물처럼 보이는 식물의 형태에, 식물의 재현 곧 감각적 닮은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식물성과 내면성은 하나로 통한다. 여기서 식물성은 식물의 몫이고, 내면성은 작가에 속한다. 각각 식물에서 작가에게로, 그리고 작가 쪽에서 식물에로 건너가고 건너온 것들이 교차되면서 교감이 일어난다. 그리고 작가는 바로 그 교감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식물성과 내면성과 교감이 하나로 통한다. 

그렇다면 식물성을 지지하고 있는 미정지의 식물성이란 무슨 의미인가. 미정지란 운동성이며 활성(다르게는 항상적으로 이행 중에 있는)이란 의미다. 그게 뭔가. 바로 생명(혹은 생명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피직스와 나투라로 구분했는데, 감각적 자연을 피직스로, 그리고 감각적 자연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이며 원동력을 나투라라고 했다. 여기서 감각적 자연의 원인이며 원동력으로 치자면 생명(다르게는 에너지) 말고 다른 것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미정지의 식물성이란 사실은 식물의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다시, 작가의 그림에서 식물성과 내면성, 교감과 생명(혹은 생명력)이 하나로 통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식물과의 교감(식물과 내면 혹은 식물성과 내면성이 교차되는)을 통해서 식물의 생명력(그리고 어쩌면 나의, 존재의 생명력)을 그리고 있었다. 

2013-2014 식물채집, 채집공간. 그리고 작가는 식물을 채집한다. 채집은 인위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이다. 채집이 가능하기 위해선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이 있어야 한다(채집은 분류에 연동된 개념이고, 분류는 물론이거니와 분류에 연유한 개념 이를테면 배열과 배치 역시 공간적 개념이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 인공적인 공간? 바로 자연을 해석한다는 것이며, 인문학적 공간개념으로 자연을 재구성한다는 것(자연의 위상학?)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을 매개로 유년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상실된 자연을 주지시키고(현대인에게 자연은 흔히 상실감의 표상이 된다.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현대인에게 자연과 고향과 원형은 그 의미가 하나로 통한다), 특히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련한 사회학적 의미를 소환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식물은 침실로 그러므로 꿈속으로 소환되고, 내면공간 속에 재구성된다. 

공간에 내면공간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외면공간이 없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식물을 소환하고 채집하는 외면공간은 무엇인가. 바로 화분에 이식된 식물이며, 자연을 미니어처로 만든 수석이며, 자연을 이미테이션으로 만든 인공폭포며 인공동굴이다. 여기서 작가는 식물의 땅에 대비시키기 위해서 욕망의 땅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자연을 소유하고 사유화하려는, 아니면 자연을 밀어내고 자본을 들어앉히려는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 들끓는 땅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작가는 그렇게 욕망이 들끓는 땅에도 어김없이 풀이 뿌리를 내리고 잡초가 무성한 것을 보고 새삼 자연의 생명력에 놀란다. 이런 외면공간 속에 재편되고 재구성된 자연으로 치자면 개발예정지로 묶인 땅, 그 주변이 공사장 펜스로 둘러싸인 땅 위로 무성하게 웃자란 풀들이며 그 자체 자연의 무한생명력의 생리랄 수 있는 무질서의 질서를 증명해 보이는 잡초들을 예로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자체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란 점에서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와도 통한다. 푸코라면 욕망의, 혹은 상실의, 아니면 일탈의 헤테로토피아라고 했을까. 그리고 대개 그런 장소는 잠정적인 범죄의 온상이란 점에서 우범의 헤테로토피아? 아니면 불온의 헤테로토피아? 그렇게 작가는 식물채집을 계기로 자연의 의미를 내면공간으로 심화시키고, 외면공간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의 존재론적 의미를 짚는 한편, 그 의미의 지평을 사회학적 문제의식 내지 자의식의 차원이며 수준에 연동시킨다. 

2015 식물의 땅, 회화 프로젝트. 전작에서의 특징으로는 색면을 들 수가 있을 것인데, 공간적 개념을 강조하기 위한 자연스런 선택으로 보인다. 그리고 근작에선 색면보다는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분방한 붓질로 축조된 회화적 화면이 특징이다. 이 특징은 아마도 작가가 식물의 땅이라는 말로서 함축하고 있는 자연의 생명력에 부합할 것이다. 자연의 생명력과 회화적 화면에서의 유기적인 흐름이 형식적으로 그리고 의미론적으로 서로 견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화면은 중층화돼 있다. 예의 회화적인 화면이 배경화면처럼 포치되고, 그 위에 이와는 사뭇 다른 화면이 포개지는데,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섬세하게 묘사된, 사실적이고 재현적이기보다는 양식화된, 그래서 문양과 패턴을 연상시키는 화면이 무슨 투명그림처럼 그 위에 얹힌다. 그렇게 회화적인 화면과 양식화된 식물문양이 서로 대비되면서 특유의 울림을 자아낸다. 그 울림은 아마도 자연의 생명이 들려주는 소리일 것이다. 이를테면 땅에 귀를 기울이면 들릴 것 같은. 생명에 대한 이해(이해는 애정과 연민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에 민감한 감각적 레이더에 포착될 것 같은. 

사실을 말하자면 이 그림은 작가가 혼자 그린 그림이 아니다. 작가의 근작을 그저 회화라기보다는 회화적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한데, 회화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회화가 모종의 어떤 일을 위한 매개 혹은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회화와 구별된다. 설명을 하자면 익명의 참가자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참여하게 한 것인데, 대개는 사전에 어떤 그림이 주어진다. 아마도 작가의 다른 그림이거나 이러저런 계기로 작가가 소장하게 된 그림들로서, 그 중에는 사람도 있고 풍경도 있다. 그리고 대개 비전공자들로 구성된 익명의 참가자들이 그 위에 덧그리는데,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색을 칠하기도 하고, 다른 색을 칠해 그림을 지우기도 하고, 그림 대신 사사로운 텍스트를 부가하기도 한다. 이어 그리는 방식과 과정에서 선행된 그림이 무시되기도 하고 이용되기도 한다. 서사로 치자면 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부르고 파생하는 매개 내지 계기로 작용하면서 서사가 서사의 다발로 쌓이고 포개지고 확장되는 경우의 형식실험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잠정적인 화면이 표면화되고 나면, 최종적으로 작가가 조율을 하는데, 희한하게도 아니면 당연하게도 작가의 그림이 된다. 엄밀하게는 작가가 처음부터 저 홀로 그린 그림처럼 보이고, 최소한 식물을 소재로 그린 작가의 다른 그림처럼 보인다. 작가의 회화적 관성이 작용한 탓으로 볼 수가 있겠다. 실제로 참가자 중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이 지워져 없어졌다고 불만을 토로했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 그림은 지워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흔적으로 남겨진다. 그 흔적이 미처 작가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그림을 유도했을 수도 있고, 작가도 예기치 못했던 어떤 비전을 열어 놓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이 프로젝트 속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화가 있다. 

변화뿐만 아니라, 이 일련의 프로세스 속엔 꽤나 의미심장한 유비가 발견된다. 존재에 대한 유비다. 나, 자아, 주체, 에고의 실체에 대한 유비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그림을 작가의 아이덴티티 곧 주체의 표상으로 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비로소 이 유비는 작동된다(혹은 유효하다). 이 유비에 의하면 주체는 상호간 이질적인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것들, 말하자면 타자로부터 나에게로 건너와 나를 형성시켜준 것들의 집합이다. 내가 전면화하는 탓에 나를 형성시켜준 타자들은 보이지가 않지만, 내 뒤쪽에, 내 속에 흔적으로서 등록된다. 롤랑 바르트는 그렇게 흔적으로서 등록된 타자를 너무 많이 고쳐 쓴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이라고 부른다. 양피지 표면에 최종적으로 등재된 텍스트(이를테면 주체라는 텍스트)는 사실을 말하자면 잠정적인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 텍스트는 선행된 텍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 지워지고 수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텍스트란 사실은 그렇게 지워진 텍스트 전체일 수 있다. 그렇게 주체는 흔적으로 남은 타자들 전체일 수 있다. 회화를 구실로 한 작가의 협업 프로젝트는 이렇듯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꽤나 흥미로운 형식실험을 예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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