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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군산을 만났다 / 군산, 다공성의 도시와 헤테로토피아

고충환




발터 벤야민은 도시를 분석하면서, 파리를 다공성의 도시라고 불렀다. 이질적인 시공간, 다른 체제와 가치, 차이나는 관습과 풍속이 어우러지면서 공존하는 도시의 생리며 생태학에 주목한 것이며, 고도의 네트워크와 지층을 간파한 것이다. 여기서 고도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도서관이며 박물관이 되고, 미셀 푸코 식으론 시간의 헤테로토피아가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대한 아케이드로 이루어진 이 오래된 도시의 도서관이며 박물관 사이로 난 샛길을 따라 걸으면서 시공간을 초월해 지층과 지층 사이, 지점과 지점 사이를 자유자재로 이행하는 만보가가 된다. 

다른 도시들도 그렇지만, 특히 군산은 이런 시간의 지층에 관한한 예사롭지 않은 역사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고, 그 기억은 전국에서 모인 곡물을 배로 실어내기 위해 만든 바다로 난 철길로도 남아있다. 구도심을 중심으로 적산가옥이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새로이 형성된 신도시의 재개발 논리에 밀려 마치 근대에 시간이 멈춘 쇠락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도시 그대로 한국근대사의 단면을 축도해놓은 미장센 같다고나 할까. 그 장면과 장면 사이로 난 샛길을 따라 걸으면서 일군의 작가들이 저마다 공간을 찍고 시간을 기록했다. 그리고 여기에 그 결과를 전시한다. 아카이브 사진 혹은 사진 아카이브로 유형화할 만한 작업을 매개로 도시에 대한 사유를 펼쳐 보인다. 


김영경, 폐 타일이 있는 풍경. 그동안 작가는 지역적 특수성과 관련해 군산 3부작을 진행해왔다. 군산 선로가 있는 풍경을 소재로 한 제1부 퇴적된 도시, 타일풍경을 소재로 한 제2부 안녕 신흥동, 점집과 만화방을 소재로 한 제3부 오래된 망각이 그것이다. 각각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군산 선로, 적산가옥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타일풍경, 그리고 점집과 만화방으로 대리되는 한국근대사 풍경을 주제화한 것이다. 

근작에서도 역시 타일풍경을 테마로 하고 있는데, 소재로 치자면 제2부 안녕 신흥동의 연장선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2부에서 소재로 한 신흥동이나 근작에서 대상화한 송창동이 인근의 또 다른 동네인 선양동과 함께 자연재해위험지구에 속해져 있는 군산의 구도심 동네들이라는 점이다. 잠정적으로 바닷물이 범람해 동네 전체가 물에 잠길 수도 있는 동네들이다. 이런 잠정적인 위험지구가 흡사 한국근대사의 메타포 같다. 한국근대사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며 해석으로 봐도 되겠다. 확장해보자면 삶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겠다. 쇠락해가는 도심의 흔적을 간직하면서 증언하고 있는 작가의 사진은 잠정적인 위험지구를 사는 삶의 흔적 같고 증언 같다. 


김지연, 빈 방에 서다. 작가는 그동안 각각 시골의 구멍가게를 소재로 한 근대화상회, 천정이 낮은 낡은 방, 그리고 낡은 정미소를 소재로 한국근대사의 장면들을 기록해왔다. 시골의 구멍가게와 어울리지 않는 근대화상회라는 간판이 충돌하는 것에서 엿볼 수 있듯 한국근대사는 온통 충돌의 역사였고,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역사였다. 그 자체를 한국근대사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감정으로 봐도 되겠다. 특히 주저앉기 일보 직전의 낡은 몸을 힘겹게 버티고 서 있는 정미소는 그 꼴 그대로 흡사 한국근대사의 늙은 몸을 체화한 메타포 같고 알레고리 같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사진은 서정성을 잃지 않고 인간애를 잃지 않는다. 이를테면 낡은 방에는 늙은 몸이 산다. 낡은 방은 꼭 늙은 몸이 전이된 것 같고, 늙은 몸 그대로를 체화한 것 같다. 

근작에서 작가는 사람이 모두 떠나고 없는 철거 대상의 빈집들을 소재로 각각 안과 밖을 대비시켰다. 이 일련의 대비된 사진들은 철거와 재개발 같은 한국근대사의 부조리한 현실이며 현장보다는 그 현장이 불러일으키는 서정성과 인간애에 방점이 찍힌다. 이를테면 창문에 걸린 오렌지색 커튼과 꽃무늬 벽지, 바다를 닮은 파란 벽들, 빈집 앞에 만발한 유채꽃과 황매화가 사람들의 흔적을 불러일으키며 삶의 향기를 자아낸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흔적을 매개로 실체를 환기시키는 것.     


김혜원, 커머셜랜드스케이프. 작가는 인공경관이며 인공풍경에, 상업적인 풍경이며 소비되고 있는 풍경에 관심이 많다. 이를테면 주차장을 소재로 한 일련의 사진들에 등장하는 주차장은 땅에 선을 긋는 행위가 소유개념이며 기호를 풍자한 것이며, 동물로 치자면 영역표시를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새만금을 소재로 새만금과 벽화를 대비시킨 사진들에선 실상과 가상이 부닥치고,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병치된다. 현실은 언제나 이렇듯 이상과는 차이가 있고 거리가 있다. 그 차이와 거리를 매개하는 것이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다. 

근작에서도 역시 이런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 자연을 문명 혹은 문화적 사실로 변형시키고 변질시키는 현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인 양 가장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는데, 바로 그런 신화적 현실에 직면하게 한다. 이를테면 서해안을 따라 지은 야외수영장, 금강 철새로, 골프장으로 개발되고 있는 옥구염전이 그렇다. 특히 금강 철새로는 철새도래지를 따라 조성된 길로, 다리를 따라 걸으면서 철새를 관상할 수 있게 했다. 말하자면 그 자체가 인간의 욕망이 계기가 돼 어떻게 자연을 전시용 자원이며 관상용 자원의 차원으로 전락시키고 소비하는지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사실은 전시용 자연이며 관상용 자연을 소비하면서 내심 자연 자체를 향유하고 향수한다고 착각할 것이다. 작가의 사진은 바로 그런 착각을, 현실과 이상의 차이며 거리를, 신화적 사실을 주지시킨다. 


박홍순, 바다가 육지라면. 작가가 사진에 입문한 것은 산을 좋아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찍기 위해 산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무분별한 난개발로 몸살을 앓는 산이었고, 벌건 속살을 드러낸 절개지였고, 상처투성이의 자연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찍는다는 애초의 계획이 난개발로 몸살을 앓는, 그리고 그렇게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풍경을 기록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백두대간을, 한강을, 서해안을, 남해안을, 그리고 4대강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 기록은 대동여지도 프로젝트로 아우러지는 것으로서,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아마도 앞으로도 심화되고 확대 재생산될 것이었다. 

새만금을 소재로 한 근작은 2008년 서해안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서, 그동안의 시간의 차이만큼 변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풍경이다. 그래서 작가의 사진은 시간의 풍경이고 차이의 풍경이며 과정의 풍경이다. 고정된 한 순간을 포착해 보여준다는 사진 고유의 한계를 나름 극복하고 해소하는 방법론이랄 수 있겠다. 그 사진을 보자면 특이한 점이 있다. 서해안은 바다다. 그럼에도 정작 바다는 없고 육지만 보인다. 짐짓 정색을 하고 말하자면 아이러니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육지 위에 풍경의 일부로 포착된 폐선이 그곳이 한때 바다였음을 증언해주는, 함초로 붉게 물든 풍경이 난개발의 부조리는커녕 오히려 아름답기조차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체 자체는 불쾌하지만 시체를 재현한 그림은 아름답다고 했다. 비장미를 암시한 것이지만, 동시에 실재와 이미지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주지시킨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부조리한 현실과 재현된 이미지의 차이를 드러내고 증언하는 아이러니한 사진을, 사진적 현실을 제안하고 있었다. 


백지순, 유니폼의 사회학. 작가는 전작에서 각각 우리 시대의 종부, 싱글우먼, 아시아의 모계사회를 주제로 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테마로 한 것이란 점에서 성 담론과 젠더이론에 연동된다. 그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것이 유니폼이고 유니폼의 사회학이다. 여기서 유니폼은 그저 의복과 의장에 한정된다기보다는 계급과 신분, 직업과 개성의 표상일 수 있고, 형식과 양식(스타일과 모드), 태도와 입장, 관습과 풍습이 등록되는 위상학적 장소개념일 수 있다. 예컨대 종부들의 모드는 권위적인데, 여기서 권위는 여성성 자체가 발현된 것이라기보다는 유교중심의 가부장적 가치체계가 여성에게 부여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싱글우먼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은 이런 억압적 가치체계에 반하는 자의식의 표현일 수 있다. 

근작도 예외는 아닌데, 아마도 한식집을 배경으로 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여자 종업원들의 초상이며, 밭일에 여념이 없는 시골 여자농부의 초상이 그것이다. 아마도 개량한복에 착안했을 한식당 종업원의 초상은 그렇다 치고, 여자농부의 초상이 더 흥미롭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챙이 큰 모자, 통이 크고 헐렁헐렁한 소위 몸빼바지, 진창에 빠지는 걸 방지해주는 고무장화로 중무장한 여자농부의 모드는 사실 그들의 평상복이며 일상복이기도 하다. 여기에 빨간색 플라스틱 슬리퍼가 의외로 끼어든다. 그것이 의외인 것은 슬리퍼는 일단 진창에 빠지면 쉽게 밝을 옮길 수는 없는, 효율성을 따지자면 비효율적인 도구며 장비다. 작가는 어쩜 이런 비효율적인 도구를 매개로 효율성을 따지는 농사와 다른 일들에 발목 잡힌 여성주체의 현실을 비판하거나 풍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난문제를 주제화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석근, 재와 먼지. 작가는 한국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관심이 많다. 그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작업이 철수와 영희 시리즈다. 이를테면 작가가 소재로 한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에는 철수와 영희가 등장한다. 우리 중 누구일 수도 있는 선남선녀들이다. 그런데 교과서에 등장하는 철수와 영희는 바른생활 덕분에 행복해 보이는데, 정작 작가의 주인공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가 않는다. 여기서 작가는 바른생활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였고, 억압의 도구로 작동되어진 것임을 폭로한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란 영화에 보면, 하면 된다거나 차카게 살아라는 둥 계몽적으로 뻔한 소리가 적힌 액자만 보면 오버액션을 마다하지 않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캐릭터가 나온다. 작가의 철수와 영희 시리즈는 바로 그 알레르기 같고, 이중적 현실이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역설적 표현 같다. 

그리고 둘 다 재와 먼지라는 주제로 묶이는 것도 그렇거니와, 근작에서 소재로 한 일련의 건축물 사진들은 사실은 인천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여기서 인천과 군산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둘 다 일제에 의한 수탈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고, 적산가옥과 같은 일제의 흔적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만큼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독특한 우여곡절이며 정체성 혼란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작가가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이렇듯 그 우여곡절이며 정체성 혼란의 경험이 건축물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고 보는 것이며, 건축물이 곧 그 왜곡된 초상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제와 조선, 그리고 좀 더 근대로 오면 미제와 한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난맥상의 총체 내지 표상이라고 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다른 모드들, 다른 양식들, 다른 파사드들이 그때그때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덧붙여지고 부풀려진다. 그 생리며 꼴 그대로 상호간 이질적인 정체성이 교차하는 한국근대사의 축도 같다. 

전은선, 기억의 풍경 속으로. 후기모더니즘 자체는 전면적이지만, 특히 건축에서 물꼬를 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식상 후기모더니즘은 다양성과 다원주의(요새로 치자면 종 다양성)로 나타나고, 건축에서 다원주의는 이질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패러디와 파사드로 나타난다. 여기서 파사드는 건물의 전면을 말하는데, 건물의 구조와는 상관없이 덧댄 전면 장식을 의미한다. 일단 후기모더니즘 건축을 그렇게 이해하고 보자면, 우리나라의 도처에 산재해 있는 모텔들이야말로 이런 후기모더니즘 건축의 천국이고 축도랄 만하다. 출처불명, 국적 불명의 온갖 이질적인 양식들의 백화점이랄 만하다. 작가는 바로 이처럼 이질적인 양식의 뜬금없는 출현에 관심이 많다. 이질적인 풍경을 근대화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보고, 이질적인 풍경을 한국근대사의 이질적인 과정에 대한 메타포며 표상이라고 본다. 그렇게 작가의 사진에는 무슨 노아의 방주도 아니면서 산 정상에 배가 우뚝하고, 열대우림도 아닌 것이, 아니면 하다못해 라스베가스도 아니면서 야자수가 번쩍번쩍 불을 밝히고 있다. 이름 혹은 지명 혹은 상호도 산타마리아처럼 이국적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플라스틱 아일랜드처럼 조작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작된 풍경은 사우나며 휴게소를 조화로 꾸민 이브의 정원으로 확장되고, 동식물원을 소재로 한 미러스케이프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군산의 노래방이며 체육관을 찍었는데, 마치 1980년대 군산 같고, 근대에 시간이 멈춘 군산 같다. 실제로 작가는 군산이라는 도시 전체가 드라마 세트장 같다는 인상을 받았고, 실제로도 영화촬영이 곧잘 이루어진다고도 했다. 기 드보르는 이미 1960년대에 현실을 영화에 비유한 적이 있다(스펙터클소사이어티). 군산을 소재로 한 작가의 사진은 친구 같은,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기억이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기억 속으로 데려가고, 그 기억이 만든 할리우드키트와 만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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