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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해란 / 지상의 천사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고충환



꿈꾸기, 방, 집. 그동안 호해란이 자신의 조각에 부친 주제들이다. 작가의 조각은 사사롭다. 자기 내면에 집을 짓고 방안에서 꿈을 꾼다. 여기서 꿈은 여행을 의미하고, 그 여로는 자기 내면을 향한다. 오로지 자기와의 만남을 위해 자기 내면에 집을 지었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내면의 곁을 맴돈다는 점에서 자기 반성적이고 존재론적이다. 그리고 그 내면에 지은 집에서 꾸는 꿈이 초현실적이다. 여기서 내면은 무의식을 상징하고, 욕망을 상징하고, 외상을 상징한다. 내면에 지은 집을 이루는 건축자재들이고 성분들이다. 초현실은 현실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하고, 그 의미처럼 작가는 자기 내면으로 초월한다. 여기서 초월은 꿈을 매개로 한 여행과도 통하고, 그 여로가 유목주의와도 통한다. 꿈은 말하자면 초현실주의와 유목주의가 공유하는 매개로서 무의식(초현실주의의 경우)의, 그리고 사유(유목주의의 경우)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자기 반성적이고 존재론적이다. 초현실적이고 유목적이다. 작가의 조각은 사사롭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사로움은 자기에 함몰되지가 않고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누구나 내면이 있고, 자기 내면에 집을 짓는다. 다만 그 정도와 경우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내향성 곧 자기 내면을 향하는 경향성을 내재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사사로운 조각은 사사롭지가 않다.   


천사, 19x18x45cm, 사암, 2014

내면으로의 초월은 내면이라는 바깥으로 초월하는 것이다. 니체는 존재가 궁지에 몰리면 내면이 열린다고 했다. 존재가 궁지에 몰릴 때 내면이 열린다. 그러므로 그렇게 열린 내면은 또 다른 바깥일 수 있다. 존재가 궁지에 몰릴 때라는 전제, 존재가 궁지에 몰린다는 전제, 존재를 궁지에 내몬다는 전제 하에서만 비로소 열리는 내면이다(니체는 미학의 궁극이 용기라고 했다). 자기 내면으로 초월하는 것이고, 자기라는 관성의 바깥으로 초월하는 것이다. 어쩜 꿈꾸기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바깥으로 초월하는 것이고, 바깥의 사유가 실천되고 실현되는 장일지도 모른다(여기서 니체와 모리스 블랑쇼 그리고 질 들뢰즈가 만나고, 유목주의와 초현실주의가 만난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에서 방은 그리고 집은 내면을 상징하고 존재를 상징한다. 그리고 존재는, 존재의 상징은 선인장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선인장은 가시가 잎이다. 물이 없는 사막과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 최대한 에너지 손실을 막기 위한 것이며,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이다. 그 꼴이 사람 사는 세상과 비슷해서 흔히 선인장은 존재를 상징한다. 사람 사는 세상 역시 살벌한 환경에서 자신을 보존하기에 급급하고,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저마다 선인장의 가시와도 같은 날을 세운다. 때로 그 날은 타인을 상처 입히고 자기도 상처를 입는다.


상처의 이중성 내지 양가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상처를 내재화한 존재가 연민을 자아낸다. 그렇게 작가는 집 곁에, 그리고 방 옆에 선인장을 키운다. 그리고 그렇게 집과 방으로 하여금 내면을 상징했고, 선인장으로 하여금 존재의 외상을 상징했다. 선인장은 말하자면 외상을 상징하고, 그 외상이 연민을 자아낸다. 외상과 연민이 선인장의 두 얼굴(그 자체 존재의 이중성 혹은 양가성과도 통하는)인 셈인데, 여기서 작가의 경우에는 외상을 강조하기보다는 연민 쪽에 방점이 찍힌다. 몽환적이고 내면적이고 초월적(그 자체 초현실과도 통하는)이고 서정적이고 시적인(함축적인?) 인상이, 그리고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이 연민과 함께 친근함을 자아낸다. 


그리고 작가는 선인장을 모티브로 한 또 다른 조각으로 근작을 연다. 머리에 선인장을 이고 있는, 아예 머리 자체가 선인장인 사람이다. 전작에서 선인장은 집과 함께였고, 풍경의 일부였다. 그렇게 집 곁을 지키는 선인장은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를 상징했고, 집이 꾸는 꿈을 상징했다. 그 꿈이 머리로 옮겨왔다. 꿈은 머리로 꾸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꿈이 자라고, 선인장의 마디처럼 연민이 맺힌다. 작가는 그 사람을 <침묵>이라고 부른다. 침묵은 자기형태 안쪽으로 살을 찌우는 선인장으로 나타나고, 입을 틀어막고 있는 손으로 현상한다. 그리고 특히 검정색 브론즈 마감이 이런 침묵을 강화시켜준다. 검정색 브론즈는 금속이면서 금속 같지가 않고, 티타늄과 흑연 같은 광물을 연상시키고, 표면의 빛을 자기 내부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내향성을 암시하고, 그 내향성의 질감이 침묵과도 통한다. 


작가는 그렇게 내향적인 존재를, 침묵하는 사람을 조형했다. 때로 침묵하는 것이 나을 때도 있고, 더러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때도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말을 뱉지 않고 삼킨다. 말을 하지 않고 속말을 한다. 그렇게 자기 내면에 말이 쌓인다. 그렇게 자기 내면에 말의 살을 찌운다. 그리고 그렇게 소통이 줄어들고 독백이 늘어난다. 자크 라캉은 사람들은 언제나 실제로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고 했다. 의식과 함께 무의식이 말을 하는 것이며, 의식 뒤편의 몸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의식이 하는 말이며 몸이 하는 말(몸말)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방에게 가닿지 못한 말들, 어쩜 실패한 말들이 침묵으로 쌓인다. 그러므로 침묵은 소통되지 못한 말들, 재차 자기에게로 소환된 말들, 어쩜 상처로 화해진 말들이 쌓이는 저장고일 수 있다. 그렇게 자기 내면에 말의 살을 찌우는 선인장이 우의적이다. 선인장이 사람이 꾸는 꿈이 되고, 선인장의 살이 침묵하는 말의 살이 된다. 


풍경의 일부에서 선인장이 떨어져 나온 것도, 사람과 그 형상이 결부된 것도, 사람이 전면에 나온 것도 이례적이다. 그렇게 침묵하는 사람이 작가의 전작과 근작을 구분하면서 매개시켜준다. 그렇게 경유지와도 같은 것이면서, 전작과 근작을 통 털어 눈에 띠게 이례적이다. 이후에 작가의 조각이 상징에서 우의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예시해줄 만큼 이례적이고, 차후에 작가의 조각이 정박하게 될 지정학적 위치를 가늠하게 해줄 만큼 예외적이다.  


화양연화, 36x30x72cm, 대리석, 2008

그렇게 작가의 근작에는 사람들이 전면화한다. 더 이상 집과도 선인장과도 결부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들이다. 풍경 혹은 풍경조각의 일부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족적인 사람들이다. 어떤 풍경 속에서, 어떤 상황과 더불어서, 어떤 관계 속에서 분리되어져 나온 사람들이다. 그 풍경을, 그 상황을, 그 관계를 오롯이 자기에게 거두어들여 자기 내면이라는 거울에 비추어보는, 그리고 그렇게 자기 내면과 대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감긴 눈은 사실은 자기 내면을 향해 열린 눈이다. 


그렇게 자기 내면을 향한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존재 자체에 몰입하게 만든다. 소통에서 존재로, 말에서 침묵으로, 침묵을 통해서 말을 거는 기술 쪽으로 이행해가고 있다고나 할까. 그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머리가 크고 몸이 작다. 얼굴이며 살집이 통통한 것이 정겹다. 그 꼴이 꼭 보통사람들의 고만고만한 생김새를 닮았다. 마이욜과 보테로를 합쳐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작가의 조각은 사실적이지도 양식적이지도 않다. 사실과 양식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나 할까. 양식의 기준이 애매하지만, 대략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탓에 작가의 조각은 편안하고 쉽게 공감이 된다. 꼭 나를 닮은 것 같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나를 보는 것 같이 동화된다는 말이다. 사람 생긴 꼴이 그렇고 사람 사는 것이 그렇듯 어슷비슷하고, 작가는 바로 그 어슷비슷한 감각적 지점을 잡아냈다. 


그 선남선녀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특이한 사실이 발견된다. 하나같이 어깨 쪽에 날개를 달고 있는데, 너무 작아서 날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날개가 퇴화된 것 같다. 한때 실제로 하늘을 날아올랐을 존재를 기억으로 그리고 흔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존재의 표상 같다. 우리는 이처럼 한때 하늘을 날아다녔었다. 꿈을 꾸고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꿈을 꿀 수도 꿈을 꿀 일도 없어졌다. 덩달아 이상은 결코 현실 위로 정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날개를 쓸 일이 없어진 사람들은 더 이상 날개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말이 줄어들면서 날개도 줄어들었다. 이처럼 줄어든 날개며 퇴화된 날개는 무슨 의미인가. 선인장이 그렇듯 퇴화된 날개도 이상을 상징한다. 선인장과 마찬가지로 날개도 꿈을 상징한다. 선인장처럼 날개 또한 외상을 상징한다. 선인장이 양가적이듯 날개의 의미 또한 양가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퇴화된 날개는 꿈이며 이상을 상징하고, 좌절된 꿈이며 이상을 상징하고, 그렇게 좌절된 꿈이며 이상을 내재화한 외상을 상징한다. 


작가는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고 한다. 천상의 천사가 아닌 지상의 천사들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지상의 천사들이다. 지상의 천사들 중에는 실제로 기적을 일으키는 천사도 있는데, 마법사들이다. 사람을 해롭게 하는 마법사들(블랙매직)이 있는가하면,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마법사들(화이트매직)도 있다. 모두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의 사악한 눈빛이 천리 밖의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내가 품은 선한 기운이 모르는 누군가를 따뜻하게도 한다. 나비효과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 매순간 선한 기운과 악한 기운을 방출하고 있는, 잠재적으로 이미 지상의 천사들이고 마법사들이다. 


선인장을 조형할 때 작가의 조각은 선인장의 두 얼굴 곧 외상과 외상이 불러일으키는 연민 중에서 연민 쪽에 무게중심이 실린다고 했다. 지상의 천사들 역시 외상 쪽보다는 연민을 자아내는 편이다. 연민이란 어쩜 내면의 상처가 외면화된 것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렇게 감정에 호소해오는 상처의 울림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작가는 바로 그 상처의 울림에 귀 기울이고 싶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가 조형해놓고 있는 지상의 천사들이 사람들 저마다 품고 있을 꿈을, 이상을, 상실을, 좌절을, 외상을, 그리고 연민을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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