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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진 / 거울의 환영효과, 이데올로기 효과

고충환




최익진은 근작의 주제를 하얀 바다라고 부른다. 백사장 아니면 파란 바다라면 모를까, 사실을 말하자면 하얀 바다는 없다. 없는 것을 있다 하는 것이므로 하얀 바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얀 바다는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하얀 바다는 하얀 바다처럼 하얗게 질린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하얀 바다는 역설적 표현이 아니다. 역설적 표현이 다시 현실적 표현을 얻는다. 그렇게 하얀 바다는 현실에 대한 메타포이며 알레고리가 된다. 


작가는 이처럼 현실에 연유한, 현실에서 건너온 것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그의 작업에서 현실적 표현과 역설적 표현은 하나의 층위로 혼재되고, 그 경계를 허물면서 하나로 혼입된다. 역설적 표현 속에 현실적 표현이 들어있고, 현실적 표현은 역설적 표현을 통해 비로소 현실성을 얻는다. 여기에는 현실을 보는 작가의 눈이 들어있고, 현실인식이 들어있다. 현실이 작동하는 방식이며, 현실이 소비되는 방법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 들어있다. 작가가 보기에 현실은 항상 그런 식이다. 여기서 현실과 현실적 표현은 다르다. 현실적 표현은 현실 그대로를 반영한 것이 아니다. 현실이 현실 자체라고 한다면, 현실적 표현은 현실 자체에 대한 주체의 해석이다. 그렇게 현실과 현실적 표현, 현실 자체와 현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영원히 합치될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차이가 있다. 개념이 매개되고 주체의 입장이 간섭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바로 그런, 현실과 해석 사이의 차이와 간극에 관심이 있고, 현실적 표현과 역설적 표현이 혼재하는 현실인식에 관심이 있고, 언제나 역설적 표현을 경유해서만 현실성을 얻는 현실적 표현에 관심이 있다. 있음과 없음이 그 경계를 허물면서 있는 것, 아니면 그렇게 있음이 다시 태어나는 것, 아니면 원래 은폐되어져 있던 있음이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지점이며 현상에 관심이 있다. 하이데거로 치자면 원래 은폐되어져 있던 진리가 비로소 진리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다름 아닌 진리임이 판명되는 순간 비진리로 변질된다는, 그런 역설적 표현에 관심이 있다. 



예컨대 일엽편주를 보자. 일엽편주란 망망대해에 저 홀로 떠가는 배를 의미한다. 그 꼴이 삶을 닮았고 존재를 떠올린다고 해서 정처 없는 삶이며 존재를 상징한다. 일엽편주란 조건이 성립하기 위해선 바다가 있어야 하고 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작가의 작업 어디에도 바다도 없고 배도 없다. 그저 투명한 청색 비닐 막과 폐목이 있을 뿐. 그리고 아마도 청색 비닐 막이 변주된 파란 평면과 파란 평면 속에 부유하는 또 다른 폐목이 있을 뿐. 작가는 이렇듯 프레임 속에 갇힌 그림들을 그 높낮이에 변화를 주어 설치했다. 청색 비닐 막과 프레임 속의 파란 평면이 서로 조응하게 했고, 비닐 막과 함께 설치한 폐목과 파란 평면 속 폐목이 상호작용하게 했다. 보이지 않는 의미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게 한 것이다. 이로써 작업의 범주가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 공간 자체가 그리고 전체가 물속 정경으로 확장되고, 그 물속에 폐목들이 부유하는 상황논리가 연출된다. 그렇게 물속에 떠다니는 폐목들이라는 상황논리가 어떤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 바로 작가의 진정한 주제에 해당하는 지점이며, 동시에 주제가 비로소 완성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주제가 완성되는 지점? 그렇담 이로써 작가의 주제의식이 뚜렷한 실체감을 얻는가. 물속을 부유하는 폐목들이란 뭔가. 아마도 그 폐목들은 배의 부분들에 해당할 것이고, 그 부분들을 조합하면 하나의 온전한 배가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형 그대로 복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재구성과 복원은 다르다.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부분과 전체는 다르다. 한편으로 폐목들이 배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인 것처럼 진리에서 분리된 진리의 조각들이며 파편들이며 편린들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진리의 파편들을 조합해보면 얼추 진리를 재구성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재구성된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진리의 존재방식 혹은 인식작용은 항상 그런 식이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라는 텍스트가 새겨진 거울을 보자. 거울은 현실을 거꾸로 반영한다. 그래서 텍스트는 정작 바로 읽으면 안 읽히고 오히려 거꾸로 읽으면 읽힌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란 영화에 보면 이런 문구가 새겨진 액자를 보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캐릭터가 나온다. 그가 이런 문구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이유는 문구와 현실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는 문구는 사실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데올로기적 구호는 사실은 서로 배신을 일삼으면서 악하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 이라는 현실을 반영하고 반증하는 역설적 표현일 뿐이다. 그렇게 이데올로기는 거꾸로 읽으면 오히려 똑바로 읽힌다. 이데올로기를 읽는 방법이며 정독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 


그렇게 작가는 이러저런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그리고 그가 희생된 날짜를 거울에다가 전사했고, 그렇게 전사된 이름과 날짜는 거꾸로 읽힌다. 그리고 여기에 거울 자체도 현실을 반영하는데, 거꾸로 반영한다. 이를테면 거울은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는 진리를 거꾸로 반영하고, 현실을 거꾸로 반영하는, 그리고 그렇게 거꾸로 반영된 진리와 현실이 하나로 포개진, 그래서 진리와 현실을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리는, 진리와 현실 읽기를 방해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 매개는 동시에 가독성과 난독성을 매개하는 것이기도 한데, 작가가 거울을 조각조각 파편화된 형태로 배열하는 것이나, 거울의 표면에 스크래치를 조성해 보기 어렵게 만드는 것, 그리고 때로 흑경을 도입해 현실을 어둡게 반영하는 것(현실을 숨기는 것?)도 알고 보면 바로 이 때문이다. 


작가가 작업에 곧잘 거울을 도입하는 이유이며, 유리를 도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설적 표현을 통해 현실적 표현에 이르는, 난독성을 통해 가독성에 이르는 매개체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투명한 유리표면에 거꾸로 기입된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는 문구는 유리가 그런 것처럼 깨지기 쉽다. 이처럼 모든 이데올로기는 깨지기 쉽다. 그리고 그렇게 이데올로기가 박살난 자리에서 비로소 현실이 보인다. 친근한 것, 친숙한 것(사실은 이데올로기일 수 있는)에서 떼어놓기를 의미하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나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와도 무관하지가 않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진리와 비진리가 혼재하면서 현실읽기와 진리읽기를 방해한다. 그 자체를 일종의 거울의 환영효과(이데올로기 효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거울은 반전된 텍스트(반전된 진리)를 반영하고, 반전된 현실(어쩜 우리가 현실로 알고 있는 것의 실체)을 반영한다. 반전된 현실의 반영 이미지와 혼재돼 텍스트가 잘 읽히지가 않는, 말하자면 텍스트에 대한 가독성을 방해하는 것인데, 여기서 현실은 오히려 텍스트의, 진리의, 현실의 가독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된다. 현실이 현실의 가독성을 방해한다? 말을 풀어보면 이데올로기적 현실이 진정한 현실읽기를 방해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따지고 보면 다만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전작에서 작가가 주제화한 작업들의 많은 경우가 여기에 맞물린다. 이를테면 뒤엉킨 여기, 어긋난 시선, 탈코드화된, 안이면서 바깥인, 과 같은 주제들이 그렇다. 


이런 주제의식을 소급해보면 작가의 유토피아론에 연동된다. 유토피아를 다룬 일련의 낙원도 시리즈가 그런데, 석회질 마감 처리한 표면에 세밀화를 그리듯 연필로 세세하게 풍경(사실은 역사적인 건물 혹은 아마도 유토피아를 표상할 신도시 이미지?)을 그려 넣은 그림들이다. 세세하게 그린 그림인 만큼 처음엔 그 실체가 오롯하다. 그러나 느리긴 해도 점차 석회질 마감 표면이 공기와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산화하고 퇴색하고 변색된다. 그리고 그렇게 그 위에 그린 그림도 덩달아 흐릿해지고 희미해진다. 그렇게 희미해지는 꼴이 마치 석회질이 연필그림을 자기의 살 속으로 먹어 들어가는 것 같고, 그렇게 먹혀 종래에는 흔적마저 사라져버릴 것 같다. 애초에 작가는 그렇게 사라져 없어질 그림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바로 유토피아라는, 낙원도라는 역설적인 제목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낙원도라는 제목이 정작 낙원은 없다는 반어법적인 주제의식을 지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셀 푸코는 유토피아를 현실에는 없는, 다만 사람들의 상상 속에 등록된 비장소로서 정의한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어쩜 역설적 표현이 다양한 표현을 얻는 변주된 지점들을 예시해주는 것일 수 있고, 그 역설적 표현의 근간에는 유토피아의 불가능성에 대한 자의식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일 수 있고, 그 부재하는 장소에 대한 의미론적이고 사회학적이고 존재론적인 형식실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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