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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아 / 자기내면에 이르는 길, 모로코에서 자기를 만나다

고충환





최윤아는 근작의 주제를 기억의 습작이라고 부른다. 전작의 주제인 점들의 교차로와도 통하는 주제다. 외관상 무관해 보이는 이 주제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배경에 아프리카 모로코 여행이 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2년간 미술 해외 봉사로 모로코를 여행했었고, 그 여행이 작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이 작가의 그림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아마도 여행의 기억이 희미해지기까지는 한동안 그 영향이며 반영이 작가 자신의 삶을 바꾸고, 나아가 작가의 그림을 바꿔놓을 것이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여행을 꿈꾼다. 어쩌면 삶이 여행일지도 모른다. 길 위에서의 삶(잭 케루악), 로드무비, 십우도, 오디세우스, 통과의례, 성인식, 사춘기, 성장소설, 성장통, 장자몽, 노마디즘, 디아스포라, 트랙커(오지에 길을 내는 사람 혹은 변방을 떠도는 사람)가 모두 삶이 다름 아닌 여행임을 증언해준다. 그리고 어쩜 예술이란 이 모든 삶의 좌표들이 등록되는 최종적인 지점이며 장소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정도와 경우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예술은 사실은 진정한 자기 자신(불교로 치자면 진아)을 찾아나서는 여행이며, 자기반성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상실된 자기를 찾아 처음의 자기에 맞닥트리는, 그런 일종의 원형의식에 의해 견인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그림은 알고 보면 사실은 바로 그 원형의식을 주제화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원형은 현상의 알 수 없는 원인이며 의식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무의식과 관련이 깊고, 원형의식의 무의식적 발현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여행의 기억이 바로 그 원형의식의 무의식적 발현을 촉발시킨 것일 수 있다. 


기억을 쏟다,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점들의 교차로란 바로 그 여로에서 만난 인연들과의 만남을 의미하며, 작가 개인적으론 미처 자기 자신마저도 인식하지 못했던 잠재적인 자기며 잠정적인 자기와의 맞닥트림을 의미할 것이다. 불교로 치자면 연기설이 되겠고, 존재론으로 치자면 가능한 자기에 눈뜨는 경험이 되겠다. 그리고 기억은 회귀의식에 연동된다. 가깝게는 실제로 여행했던 가까운 과거로 회귀하고, 멀게는 작가 자신에게마저 아득한, 어쩜 미지의, 미몽의 먼 과거로 회귀한다. 실제 여행의 기억이 계기가 돼 마침내 아득한 자기를 기억해낸 것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기억은 여행의 추억을 되불러오고, 아득한 자기며 잊힌 자기를 소환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는 각각 여행의 추억과 소환된 자기가 각각 날실과 씨실이 돼 하나의 직물로 직조된다(공교롭게도 모로코는 태피스트리며 퀼트로 유명하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여행의 기억이 계기가 돼 자기반성적인 행위며 존재론적 발견에 연동되는 것인데, 먼저 눈에 띠는 경우로 치자면 한눈에도 화려하고 장식적인 원색들이 거침없이 혹은 스스럼없이 도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모로코 현지의 천연염색에 바탕을 둔 수공예 내지는 직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어느 정도는 작가 자신의 성향(취향?)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모로코의 지정학적 특수성 혹은 미학적 특질로 치자면 전통적인 이슬람 국가로서 건축물 특히 모스크를 장식하고 있는 색유리와 모자이크 타일을 들 수가 있고, 엄밀한 기하학에 바탕을 둔 패턴문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미술사적으로 모스크를 장식하고 있는 추상패턴은 다름 아닌 신을 표상한 것이라고 한다). 작가의 그림에 보이는 기하학적 문양과 패턴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이런 기하학적 문양과 패턴이 유기적인 형태와 하나로 어우러지는데, 아마도 식물로 대리되는 자연을 양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작가가 그린 상당한 그림들에서 엿보이는 청색의 색조는 아마도 지중해의 바다색에 연유한 것일 터이고, 그 자체가 작가의 무의식을 연상시킨다(색채상징주의 관점에서 청색은 심연을, 우울한 기질을, 무한한 우주를 상징한다. 낭만주의에서 청색은 삶을 정화시켜주는 계기로서의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흔히 무의식을 심연에다 비유하고, 바다를 심연의 메타포로 보는 경우를 생각하면 될 일이다. 엄밀하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경계를 허물고 상호작용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의식에서 건너간 것들, 이를테면 여행의 기억이 소재가 되는 것들(예컨대 사하라 사막에서 받은 인상과 같은)과,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것들, 이를테면 원형의식 내지 존재론적 자의식(예컨대 무의식적 욕망과 자아의 표현과 같은)이 합체되고 변형되는, 그리고 그렇게 유기적인 형태를 이루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기하학적 패턴과 유기적인 형태가, 평면적인 추상문양과 재현적인 묘사에 해당하는 부분이, 화려하고 장식적인 원색과 심연과도 같은 깊은 청색조가, 실제 여행의 기억에 연유한 것과 작가 자신의 자의식이 표출된 부분이, 의식에서 건너온 것과 무의식에서 부각된 부분이 그 경계를 허물고 상호작용하면서 하나의 유기적인 형태며 흐름을 이루고 있다. 실제로 일어난 일(실제 여행)로 입문해서 있을 법한 일 아니면 가능한 일(자기반성적인 과정이며 행위)로 아웃풋 된다거나, 알만한 형태(예컨대 실제의 향수병과 같은)와 그 자체 고정적이거나 결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무형의 경우(예컨대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와 같은)가 자유자재로 연동되고 전치되는 식의 상상력의 비약이 작가의 그림에선 낯설지가 않다. 


때로는 형태적 유사성이(예컨대 계단과 건반과 같은), 그리고 더러는 같은 소리(예컨대 향수병과 향수병에서 보는 것과 같은 동음이의어)가 매개가 돼 상호간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그 계기가 논리적 개연성을 갖는다기보다는 전적으로 우연한 것이란 점에서 자유연상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부르고,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로 이행하면서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의미를 해체하고 재편한다. 그리고 그렇게 끝도 없이 연이어지고 부풀려지고 확장되는, 그런 무한서사의 잠정적인 부분을 보는 것 같다. 이런 무한서사가 그리고 특히 자유연상기법이 초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무한서사는 무분별한 욕망의 갈래들로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일종의 도상학이 더해질 수 있겠다. 작가의 그림에서 도상학은 특히 눈이 갖는 상징적 의미로 나타나는데, 식물의 뿌리 부분에 해당하는 눈은 사실은 식물에 양분을 제공하는 생명의 근원이며, 우주의 눈(중심)을 상징한다. 바다이면서 동시에 하늘이기도 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눈동자가 이런 상징적 의미를 재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수정체에서 꽃이 피는(생명을 키우는, 혹은 눈을 부릅뜨고 생명을 지켜보는) 눈동자 역시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가 않을 것이다. 이런 도상학으로 치자면 단연 새기다, 시리즈를 들 수가 있을 것인데, 원형 화판에 추상적인 패턴 문양을 그려 넣은 일련의 그림들이다. 도기접시와 같은 모로코의 전통문양에 착안한 것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원리며 존재의 섭리를 추상화하고 양식화한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만다라는 우주의 원리며 존재의 섭리를 도해한 그림이다. 신을 상징하는 모스크 장식처럼 사실상 세상의 모든 서사를 함축하고 있는, 기독교로 치자면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모든 서사를 포함하고 있는 상징그림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모로코 여행을 계기로 자기내면에로의 여행을 감행하고 있었다. 기억의 습작이란 주제에서도 알 수 있듯 기억을 길잡이 삼아 그 여행을 감행하는 것인데, 때로 기억은 모로코를 넘고 자기를 넘어 무의식에 이르고 원형의식에로 이끈다. 그리고 그 원형의식에서 작가는 마침내 자신이 광활한 우주를 떠도는 고독한 한 점임을 깨닫고, 그 자체 우주인 한 점임을 인식한다(그 인식은 점들의 교차로란 주제에서, 그리고 새기다, 시리즈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그렇게 작가는 마침내 진정한 자기(진아)를 찾은 것일까. 그건 어쩌면 불가능한 기획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하튼 그 여행을 그만둘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일이다. 어쩌면 진정한 자기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중요한 것은 과정이며 태도(삶에 대한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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