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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혜준 / 소외와 소멸, 종이박스의 사회학

고충환




관계와 소외. 작가 모혜준은 관계와 관계로부터의 소외에 관심이 많다. 어쩌면 작가의 작업은 그 관심이 가닿은 다양한 지점일 수 있고, 그런 만큼 그 관심 그대로 작가의 작업을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의식 내지 전제일 수 있다. 관계에는 좋은 관계가 있고, 나쁜 관계가 있다(여기서 관계는 다르게는 만남 혹은 인연과도 통한다). 

좋은 관계는 그렇다 치고, 언제나 나쁜 관계가 문제인 것이며, 작가들이 그리고 특히 작가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말하자면 관계가 어긋나거나 잘못될 때 소외가 발생한다. 이처럼 관계에 연유한 소외에서 작가의 경우에는 관계 쪽보다는 소외 쪽에 무게중심이 실리고 방점이 찍힌다. 여기서 소외는 사회적이고 제도적이고 환경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이보다는 혹은 이와 더불어 결여와 결핍으로 나타난 인간실존의 존재론적 조건과 한계를 증언해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그 조건을 때론 관조하고 더러는 비판하면서 끌어안는 것이며, 그 한계를 인식하고 치유하는 과정일 수 있다.  


예견된 소멸, 영상설치, 2015

그렇다면 소외란 무엇이고, 소외는 언제 어떻게 발생하는가. 소외의 일차적 의미는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한다. 그리고 소외는 일종의 자기소외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자기 스스로를 낯설다고 느끼는 경험이다. 이방인의식으로도 알려진 자기소외는 실존(주의)적 자의식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소외는 경제학의 관점에도 연유하는데, 주로 마르크스의 입장이며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가 첨예화되면서 경제제일원칙과 효율성극대화의 법칙이 보편적 준칙으로 자리 잡는다. 덩달아 경제성이며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사회로부터 추방되면서 변방으로 밀려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이처럼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난 것들을 잉여라고 부르고, 미셀 푸코는 비정상성이라고 명명한다. 죽음이, 예술이, 그리고 에로스가 바로 이 잉여며 비정상성에 해당하는데, 사회로부터 밀려난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추방인 의식 내지 변방인 의식을 내재화하고, 그 의식에 힘입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혁명의식도 덩달아 잠재화된다. 바타이유가 잉여에, 그리고 푸코가 비정상성에 주목한 이유가 바로 이렇듯 추방인의식이 키워준 혁명의 계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적 관점에서의 소외는 인간이 한갓 기계부품으로 전락하고 상품으로 전이되면서 극대화된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스>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한갓 기계부품으로 전락한 인간이며 이로 인한 소외현상이다. 그리고 인간이 상품으로 전이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과 이에 따른 상품화의 요청에 기인한다. 이걸 페티시즘 곧 물신이라고 부르는데, 가시적인 것이며 비가시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할 것 없이 이 물신의 상품화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주체는 철저하게 저마다 내재한 상품적 가치에 의해 판단되고 평가 받는다. 그 상품적 가치를 상실하는 순간, 주체는 졸지에 잉여인간으로 폐기된다. 속된 말로 몸값을 올린다거나 스펙 쌓기에 전전긍긍해하는 세태가 바로 이처럼 인격으로부터 상품으로 위치 이동한 인간소외현상과 관련이 깊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은 일차로 기계부품으로 소외되고, 그리고 연이어 여러 경우와 형태의 상품으로 소외된다. 


예견된 소멸, 종이박스 설치, 2015

작가가 전작(현대인의 초상)에서 주목한 부분이 바로 이렇듯 인격으로부터 상품으로 소외된 세태를 풍자한 것이며, 특히 여성의 몸에 매겨진 성 상품적 가치가 어떻게 욕망의 정치학이며 시선의 정치학에 연동되는지를 재현하는 것이었다(결국 시선의 욕망이 여성의 몸을 성 상품화하는 것이며, 여기서 시선의 욕망은 그대로 자본의 욕망이기도 한 것). 그 재현에 의하면 몸에 등록된 성 상품적 가치는 오로지 청춘의 몫이며, 따라서 늙는다는 것마저도 죄악이 된다(상품적 가치를 상실하는 것). 

예견된 소멸, 종이박스의 사회학. 사람들은 종이박스로 상품을 포장하고 집도 짓는다. 여기서 종이박스는 한편으로 소비되는 것들을(종이박스가 소비재를 포장하는 용기란 점에서), 그리고 다르게는 폐기되는 것들을(종이박스는 임시방편이며 원칙적으로 일회용 용기란 점에서) 상징한다. 그 상징에서 인간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상품적 가치를 상실한 빈 종이박스가 폐기되는 것처럼 종이박스로 집을 짓는 사람들도 사회로부터 폐기된다. 이처럼 소비되고 폐기되는 것들, 철저하게 상품적 가치에 의해 평가되고 자리매김 되는 것들(존재의 위상학을 결정하는 물신?), 상품적 가치를 상실하면서 폐기가 예견된 것들의 이면에는, 그러므로 어쩌면 모든 상품의 잠재적인 운명일지도 모를 폐기의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이 놓여있고, 페티시즘 곧 물신이 작동하고 있다.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빈 종이박스야말로 물신에 의해 추방을 선고 받은 자본주의 시대의 변방이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상품이 재빨리 골동품이 되는 것에 자본주의의 비밀이 있다고 했다. 상품은 생산되는 즉시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향수의 대상 속으로 편입되어져야 한다. 여기서 향수는 일종의 거리개념이다. 아득하고 먼 것이다. 벤야민이 아우라라고 부르는 것이다. 상품은 생산과 동시에 폐기되어져야 하고, 상품적 가치로부터 아득하고 멀어져 아우라의 연무를 피워 올리는 무엇으로 변질되어져야 한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상품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골동품을 생산하고 있었고, 상품을 생산하면서 사실은 상품을 폐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현대판 성소랄 수 있는 백화점에는 상품으로, 사실은 잠정적인 골동품으로 넘쳐나고, 생산된 것들, 알고 보면 잠재적으로 폐기될 것들이 발하는 향수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렇게 현대인은 사실상 교회를 대신한 백화점에서 위로 받고 심리적 안정을 얻고 평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현대인이 백화점에서 소비하는 것은 상품이 아닌 상품의 이미지이며, 그 이미지가 발하는 향수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상품을 팔면서, 사실은 상실된 기억을 팔고, 유년을 팔고, 추억을 팔고, 향수를 판다. 싸잡아서 알고 보면 폐기된(폐기될) 것들의 아우라를 판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생산은 어쩌면 폐기(최소한 잠정적인 폐기)와 동의어일 수 있다. 

작가가 재현해놓은 창고 속에는 이렇게 폐기된 빈 종이박스들로 가득하다. 산더미를 이룬 종이박스들은 연민을 자아내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것들은 한때 누군가에게 전해질 소중한 선물을 실어 날랐던, 추억을 담았던, 해묵은 기억을 재생시켜주었던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진앨범을 펼쳐 볼 때와도 같은 어떤 설레는 마음을 떠올린다고나 할까. 

흐릿한 빛과 적절한 어둠이 그 연민과 향수에 제법 그럴싸한 분위기를 더했다. 무엇보다도 폐기된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며, 소멸이 예견된 것들이 자아내는 아우라일 것이다(혹자는 이로부터 을씨년스런 공장창고 내지 조폭의 아지트를 떠올리거나, 바람 부는 날의 압구정동 아니면 말죽거리 잔혹사를 불러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여하튼 그 정서의 성분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그렇게 작가는 종이박스를 쌓으면서 사실은 추억을, 그리고 기억을 쌓고 있었다. 

그렇게 기억을 감싸고 있는 어둑한 공간을 더듬어 흐릿한 빛을 따라 가다보면 문득 빈 박스 속에 개 한 마리가 들어있다(사실은 박스 속에 설치한 영상). 이따금씩 개는 위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더러 눈길을 주기도 하지만 무표정하다. 버려지고 상처 받아도 하염없이 기다리는 유기견이라고 했다. 

버려지고 상처 받아도 하염없이 기다리는? 도대체 이건 인간의 자위인가 아니면 개의 생리인가. 개의 말(심정)인가 아니면 사람의 말(심정)인가. 개의 말과 사람의 말은 단절돼 있어서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다만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있다고 착각할 뿐, 사실 그 말은 침묵 속에서 발해지는 말이고, 침묵을 통해서 말해지는 말이다. 

침묵은 언어 이전의 언어를 통해서만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말을 하고 들을 수 있기 위해선 언어 이전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눈을 통해서, 털을 통해서, 무표정한 표정을 통해서, 미동도 없는 움직임을 통해서, 바로 침묵의 집인 몸을 통해서 말을 하고 들어야 한다(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침묵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언어의 한 형식이며, 언어 이전의 언어다). 그래야 비로소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있게 된다. 

유기견이라고 했다. 버려진 개라고 했다. 버려지고 상처 받아도 하염없이 기다리는 개라고 했다. 물신이 인간을 기계부품으로 소외시키고 상품으로 소외시켰듯이, 이번에는 인간이 개를 소외시킨다. 물신은 인정도 사정도 없다. 그건 그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준칙이며, 작동하는 기계이며, 욕망하는 기계이다. 기계이기에 인간을 소외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과 개의 관계도 그런가. 개에 대해 인간은, 개의 입장에서 인간은, 개가 볼 때 인간은 인정도 사정도 없이 그저 작동하는 기계인가. 그래서 기계인 인간이 개를 소외시킬 수 있는가. 그렇게 작가는 빈 종이박스를 매개로 물신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과 개의 소통을 묻고 있었다. 그 이면에선 소외된 것들, 폐기된 것들, 소멸이 예견된 것들에 대한, 말하자면 존재 일반에 대한 연민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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