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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조각의 경계와 탈경계

고충환




전통적인 조각, 실재를 재현하는 기술 

르네상스 시대에 전해지는 일화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회화와 조각 우열논쟁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는 원근법과 공간감을 매개로 실재를 재현하는 기술이며, 따라서 원근법도 공간감도 결여하고 있는 조각에 비해 실재를 재현하는 기술면에서 우월하다고 한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회화가 내세운 실재를 재현하는 기술이란 것이 알고 보면 한갓 눈속임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조각(특히 환조)이 재현하고 있는 실재야말로 진정한 실재라고 주장한다. 각각 회화의 입장을, 그리고 조각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지만, 하나같이 실재를 재현하는 기술을 근거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조각에서의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근거는 실재를 재현하는 기술이었다(회화도 그렇지만). 



문제는 여기서 실재를 재현하는 기술의 의미는 물론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단순히 여기에 머물고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모방을 들어 예술을 폄하했던 플라톤마저도 순수관념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예술을 인정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런 태도와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더 적극적으로 옹호된다) 재현의 의미는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선 것이었다. 회화로 치자면 스퓨마토가 그렇고, 조각의 경우에는 에이도스가 여기에 해당한다(그리고 예컨대 인체조각을 밤과 낮이라고 명명한 유비적 표현도). 모든 사물대상엔 이미 완전한 형상 곧 에이도스가 잠재돼 있어서, 조각가가 할 일이란 다만 그 완전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하도록 돕는 일이다. 결국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조각가에게 할애된 창조적 역량을 위한 자리는 그기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 완전한 형상이란 뭔가, 라는 것이고, 그걸 누가 알랴, 는 것이다. 적어도 이미 완전한 형상이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이 아님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게 실재를 재현하는 기술의 의미는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과 함께 그것이 상기시켜주는 이미 완전한 형상을 재현하는 기술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이는 재현의 역사로 아우러지는 전통적인 조각의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모더니즘 패러다임, 경계의 경우 

이런 재현의 역사는 모더니즘에 와서 일정한 혹은 전면적인 변화를 겪는다. 장르적 특수성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모든 장르는 다른 장르와의 차별성이며 변별성을 통해서 정당화될 수 있다. 조형예술은 문학과 다르고, 회화는 조각과 다르다.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것, 그리고 조각을 조각이게 해주는 것에 천착한 것인데, 이는 일종의 형식주의와 본질주의 그리고 환원주의의 경우로 나타난다. 형식주의로 치자면 조형예술의 특수성이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다고 본 것이고, 따라서 내용에 해당하는 재현과 서사는 조형예술보다는 문학의 장르적 특수성에 속한(아니면 가까운) 것이라고 해서 배제된다(말하자면 재현과 서사는 이야기를 거는 기술, 말하는 기술, 기술하는 기술이라고 본 것). 그리고 본질주의로 치자면 이런 조형예술의 형식적 요소야 말로 다름 아닌 조형예술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며, 따라서 조형예술의 당위성 내지 존재의미를 그 본질에 한정하고 환원한 것이란 점에서 환원주의다. 



그렇다면 조각의 본질은 뭔가. 양감과 질감과 물성이다(회화로 치자면 이러저런 형식적 요소와 함께 특히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평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 덩어리, 터실터실하고 부드럽고 날카로운 질감(아니면 촉감?)에 의해 구별되는 질료, 그리고 시멘트와 대리석으로 변별되는 물성이 조각을 조각이게 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조각으로서 요구되어지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것이며, 나아가 그 외적인 것, 이를테면 상기와 암시(그 자체 재현과 서사에 연동된, 재현과 서사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지는)는 군더더기며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 이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동어반복적인 말이 바로 이런 상기와 암시, 재현과 서사를 경계하는 형식주의를 대변하고 있다(조형은 조형일 뿐, 의미론적 표상의 대상이 아니다). 



도날드 저드의 최소한의 구조 역시 조각의 본질을 구조로 본 것이지만, 크게는 이런 형식주의적 태도며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경우라고 보면 되겠다. 말하자면 특정 구조(단위구조?)의 배열과 배치만으로도 이미 조각이다(조각적이다?). 배열과 배치가 달라지면 구조도 달라진다? 조각을 조각적 행위로 확장해놓고 있는 개념과 경우? 마치 사진의 의미를 사진으로부터 사진적 행위며 사진적 퍼포먼스로 확장해놓고 있는 현대사진의 경향과도 같은? 여기에 미니멀리즘을 대변하고 옹호하기 위해 마이클 프리드가 제안하고 있는 연극성이며 즉물적 오브제 개념이 조각을 조각적 상황(상황논리)으로 확장시켜놓고 있다. 그런가하면 조지 디키는 예술작품을 분류적 의미(속성)와 평가적 의미(속성)로 구분하면서, 특히 현대미술을 분류적 의미에 의해 예술작품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경우로 본다. 그렇게 현대미술에는 잠정적으로 평가적 의미가 보류되거나 배재된 경우라고 보는데, 그 경우를 이런 일련의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근거하고 있는 작품들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가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 대변되는 이론의 차원이며 담론의 층위에서 이야기되어지는 경우다. 조지 디키의 경우를 곧이곧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같은 의미지만 적용해도 되는지 여부가 문제시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이론과 실재, 담론과 현실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며 차이가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고, 실제로도 그렇다. 이론과 담론의 차원이 아닌, 현실적으로 조각의 장르적 특수성에 충실한 경우로는 소위 직조라는 말로서 알려진 광범위한 영역과 범주를 아우른다. 당연히 여기에는 조각의 본질로 알려진 조각의 형식적인 요소 내지 성질과 함께 상기와 암시, 서사와 표상과 같은 재현의 기술이 포함된다(형식과 내용은 하나다). 예컨대 양감과 질감과 물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실존적 인간조건을 표상하는 자코메티의 조각에서와 같은. 굳이 자코메티가 아니더라도 어떤 주제며 의미내용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조각의 형식적인 요소 내지 성질이 부수되는 허다한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은. 




탈의 논리, 탈조각, 탈경계의 경우            

현대조각을 연 사건이 여럿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경우로는 조각에 구멍을 낸 것과 조각에서 좌대가 사라진 것을 들 수가 있겠다. 헨리 무어의 조각에서 시도된 경우로서, 조각에 구멍을 내 조각의 이쪽과 저쪽을 서로 통하게 한 것이다. 그건 말하자면 조각을 공간으로까지 확장시켜준 사건이었다. 그저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 덩어리에서 공간은 다만 조각에 부수되는, 조각과는 별개의 조건이며 우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구멍을 매개로 조각 자체가 공간으로까지 확장되고, 공간이 조각의 일부로서 포함되고 연장된다. 그렇게 조각은 공간연출의 문제가 되었고, 공간에다 드로잉 하는(공간드로잉) 문제가 되었다. 이로부터 조각은 장소특정성의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공간과 공간을 매개하는, 장소에 성격을 부여하고 변형시키는, 마치 사진에서의 인덱스 곧 지표며 좌표와도 같은 문제(지정학적 위상학의 문제? 증명의 문제?)로 확장된 것. 



이처럼 조각에 구멍을 낸 것이 조각을 공간으로까지 확장시켜준 것이라면, 조각에서 좌대가 사라짐으로써 조각은 현실에 연결되고 연장된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조각에서 좌대는 조각으로 하여금 나, 조각이야, 라고 선언하게 해주는 어떤 미적 근거였다. 조형예술을 일상과, 조각을 현실과 구별시켜주는 미학적 장치였다. 그렇게 조각은 현실에서 분리됨으로 인해, 현실에서 붕 떠 있음으로 인해 현실과는 다른 무엇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고수할 수 있었고, 품위(아우라?)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어쩜 좌대야말로 예술을 현실 내지 일상과 구별하고 차별해온 전통적인 미학적 태도며 이해관계를 증언해주는 증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조각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조각이 현실의 일부가 되었고, 현실이 조각의 부분이 되었다. 현실을 매개하고, 현실에 개입하고, 현실을 간섭하고, 현실을 코멘트 하는 무엇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이 현실이 되었다. 



현실에서 그 현실은 조각을 설치미술로까지 확장시키고 변형시킨다. 그리고 설치미술 이후 현대미술의 풍경은 걷잡을 수 없는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지평을 열어 보이는데, 그 한 가운데에 조각이 위치해 있는 것. 그리고 그렇게 레디메이드는, 그리고 오브제는 예술품과 일상품, 예술행위와 일상적인 행위를 구별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개념적 차이(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에 지나지 않게 되고, 덩달아 예술은 조형에서 맥락의 문제로 축소가 되었고, 그리고 그렇게 다만 개념적으로만 차별되고 변별되는 근거며 원인이며 계기 한 가운데에, 그리고 그 의미가 축소된 배경 한 가운데에 조각이 위치해있다. 



이처럼 현실이 된 조각, 다만 최소한의 개념으로서만 현실과 구별되는 조각을 담론의 층위에서 보자면 탈의 논리에 연동되고 탈의 논리에 의해 촉발된다. 탈의 논리는 무엇으로부터의 탈을 전제한다. 무엇보다도 장르적 특수성으로부터의 탈을 들 수가 있을 것인데, 조각으로부터의 탈을 의미하고, 조각과 다른 여타의 장르에 해당하는 것들을 구별시켜주는 관습으로부터의 탈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조각과 회화의 차이가 사라지고(회화적인 조각, 조각적인 회화), 조각과 사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사진조각). 조각이 회화처럼 시점 문제를 다루고, 회화만큼이나 납작해지고, 회화와 마찬가지의 때깔을 입는다. 그리고 사진처럼 실재와 허구, 이미지와 이미지의 정치학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본질주의(조각의 본질은 양감과 질감과 물성이다)로부터의 탈을 들 수가 있을 것인데, 먼저 양감으로 치자면 양감을 결여한 조각, 부드러운 조각(소프트스컵처)과 움직이는 조각(키네틱아트), 풍선조각(발룬아트)과 공기조각(에어아트)이 이로부터 파생된다. 그리고 물성을 예로 들자면 물성을 결여한 조각, 소위 비물질 조각, 이를테면 빛(라이트아트), 소리(소리조각), 그림자(그림자조각), 물(한스 하케에서 보는 것과 같은 물에서 얼음으로 그리고 재차 수증기로 순환하는 프로세스아트? 혹은 수상조각? 혹은 물을 스크린처럼 사용하는 수상쇼?)을 소재로 한 조각(조각과는 다른 조각? 조각이 무색해진 조각?)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에 조각의 전통적인 수공성(직조)으로부터의 탈로 치자면 우연성의 도입을 들 수가 있겠고, 이로부터 팽창조각과 압축조각(세자르), 그리고 중력조각이 파생된다. 그렇게 현대조각은 이미 조각이 아닌 조각이 되었고, 더 이상 조각이 아니어도 무방한 조각이 되었고, 조각이 무색해지는 조각이 되었다. 그렇게 지금도 여전히 탈 혹은 비 조각이 조각의 이름으로 새로이 등재되면서 조각의 범주를 확장시키고, 조각의 의미를 갱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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