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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훈 / 점찍기, 점묘와 수행 사이

고충환




물속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일렁이는 수초 같은, 대지의 표면에 하얗게 핀 소금 꽃 같은, 투명한 창에 맺힌 이슬방울 같은, 연무 같은, 물 알갱이 같은, 얼핏 지평선과도 같은 아스라한 풍경이 보이는 것도 같은, 구름이 보이고 노을이 설핏 감지되는 것 같은, 파도 같은, 파도가 해변에 들고 나면서 모래 위에 남긴 자국 같은, 모래바람이 모래 위에 그려놓은 흔적 같은, 몽글몽글한 나무 같기도 하고 숲 같기도 한, 세포 덩어리 같은, 밑도 끝도 없이 중첩되면서 아스라하게 멀어지는 준봉 같은, 물이 흘러내리면서 아니면 흩뿌려지면서 빛에 부딪혀 산란하는 빛 알갱이 같은, 물과 빛이, 물방울과 빛 알갱이가 서로 희롱하면서 아롱거리는 것 같은, 엄청난 메뚜기 떼가 일시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새떼가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면서 이리저리 군무를 추는 것 같은, 그리고 그렇게 군무를 추면서 비정형의 패턴을 그려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 유성이 그려 보이는 궤적 같은, 빛 알갱이 같은, 모래 같은, 먼지 같은, 그리고 점 같은. 


작가의 그림은 00같다. 그 속엔 자연풍경이 들어있고, 우주의 섭리가 들어있고, 세계를 단위원소로 쪼개놓은 미시세계가 들어있고, 존재를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킨 거시세계가 들어있고, 여기서 저쪽으로 이행하는 운동이 들어있고, 아롱거리며 산란하는 움직임이 들어있고, 미세하게 떨리는 파장이며 파동이 들어있고, 쏴 하는 혹은 슈 하는 소리가 들어있다. 에토스 속에 파토스를 품고 있는, 절제 속에 격정을 가두고 있는, 정적인 가운데 움직임을 암시하는 정중동이 제시되고 있다고나 할까. 그림이 소리를 연상시키고 소리가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공감각이 제안되고 있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먼지 같고, 점 같고, 얼룩 같다. 점은 원형이면서 원형이 아니다. 다만 원형처럼 보일 뿐 사실은 먼지처럼 비정형이다. 그리고 그렇게 비정형이란 점에서 점은 먼지와 통하고, 먼지는 얼룩에 연동된다. 


캔버스에 점찍기(과정), 2015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비정형의 얼룩 속에 자연풍경이 들어있고, 전쟁이 들어있다고 했다. 알 수 없는 자국 속에 알만한 세상사가 다 들어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온다고도 했다. 대단한 혜안 아니면 심안 아니면 상상력이라고도 하겠지만, 사실 알고 보면 모든 그림은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자잘한 붓질이 그렇고, 크고 성근 스트로크가 그렇고, 터치가 그렇다. 붓질이며 스트로크 그리고 터치 자체는 무분별한 것이지만, 이런 무분별한 단위원소가 모여 분별한 것을 드러내고 현상시킨다. 무분별한 것이 분별한 것을 드러낸다? 


그건, 알고 보면 착각이다. 착각의 원리가 아니라면 그림도 없고 이미지도 없고 일루전도 없다. 그렇다면 착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심적 거리 혹은 미적거리에 의해 가능해진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비정형의 얼룩이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너무 멀어지면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러다가 적정거리에서 보면 비정형의 얼룩들이 모여 비로소 형상을 드러내고, 알 수 없는 자국들이 어우러지면서 알만한 형상을 드러내 보인다. 여기서 적정거리란 사실 멀고 가까운 거리를 조율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쩜 그림이란 알고 보면 이런 조율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무분별한 것이 먼저고 분별한 것이 무분별한 것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코스모스는 카오스를 전제로 한다는, 유가 무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유태 신비주의 사상인 카발라에 보면 점은 신을 상징한다. 도상학 아니면 상징주의 운운하겠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 상징은 낯설지가 않다. 신을 우주가 기원하는 원인으로 본 것이며, 형상이 유래하고 존재가 유래하고 만물이 유래하는 단위원소를 점으로 환원한 것이며, 그리고 그렇게 신과 원인이 연계되고, 신의 관념적 실재와 점의 기하학적 실재가 상호연동된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그렇고(모든 존재는 순수관념인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플로티노스의 일자가 그렇고(모든 존재는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 기독교의 유일신이 그렇고(이데아와 일자가 교부신학으로 각색된 것), 불교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이 그렇다(모든 존재는 저마다 우주를 떠도는 한 점이고, 고립무원이며, 고독자다). 


루시앙 골드만이라면 숨은 신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예로부터 기하학은 순수관념에 속하고, 수학에 속하고, 신에 연유한 것으로 여겨졌다(이를테면 신성비례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점은 기하학의 시점이며 정점이다. 그리고 기하학이 신이다. 윌리엄 브레이크가 그린, 컴퍼스로 우주를 측량하는 신을 그린 그림에서와 같은 신의 현현이다. 그리고 그렇게 점은 우주의, 존재의 원인이며 종점이다. 


캔버스에 점찍기, 아크릴, 2015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점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점을 찍는다. 여기서 그린다는 행위와 찍는다는 행위는 미묘한 그리고 어쩌면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린다는 행위는 주관적인 행위이고 해석적인 행위이며 의식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찍는다는 행위는 객관적인 행위이고 자기를 비우는 행위이며, 그래서 어쩌면 아에서 무아로(그리고 재차 진아로) 이행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의식적인 행위인가, 아니면 무의식의 결과인가. 처음엔 의식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다보면 문득 자기가 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점이 찍혀지는 순간이 올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점이 찍혀지는 순간들의 지속을, 그리고 그 지속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의식으로 돌이켜보는, 그리고 그렇게 우연과 필연이, 위와 무위가 교차하는 과정이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자기가 지워질 것이다. 자기가 찍고 있는 점처럼 하나의 점으로 환원되고, 점과 더불어 드러나면서 점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하나의 점으로 환생할 것이다. 얼룩처럼, 먼지처럼 사라지면서, 형상으로, 이미지로, 일루전으로 환생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연풍경을 연상시키고, 내면적인 풍경이며 관념적인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풍경이란 것이 알고 보면 사실은 무수한 점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점들의 결속에 의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임의적이고 잠정적인 형상들이며, 점들의 결속이 흩어지기라도 하면 이내 사라지고 없어질 덧없는 풍경들이다. 


작가는 이 덧없는 풍경에 힘입어 존재의 단위원소를 그리고, 우주의 단자(모나드)를 그린다. 형상을 그리고, 이미지를 그리고, 일루전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존재가 지워지는, 그리고 그렇게 아에서 무아로, 그리고 재차 진아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무한순환반복 하는 자기수행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러므로 보기에 따라서 그 그림은 종래에는 어쩌면 하나의 점과도 같은, 얼룩과도 같은, 먼지와도 같은 덧없는 것들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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