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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진 / 심연보다 깊은, 검은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가물거리는

고충환





김명진은 한지를 나무껍질에 대고 탁본을 떠낸다. 그리고 그렇게 떠내진 한지를 세로로 길게 자른 조각을 화면에 연이어 붙여 나가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이러저런 형상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으로 치자면 사람형상도 있고, 관념적인 형상도 있고, 숲과 같은, 그리고 식물에 혈류가 흐르는 것과 같은 중의적이고(중의적인?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모든 그림이 중의적이다) 암시적인 형상도 있고, 그저 우연하고 무분별해 보이는 얼핏 알 수 없는 형상도 있다. 작가는 이 일련의 형상들을 풍경이라고 부른다. 풍경? 바로 작가가 세계를 보는 자신의 관점을 반영하고 그린 그림들이다. 이를테면 관념적인 풍경 같은, 내면적인 풍경 같은, 존재론적인 풍경 같은, 그리고 활경 곧 움직이는 풍경 같은. 보기에 따라서 그 그림들이며 풍경에 동원된 기법은 전통적인 자개의 끊음질 기법을 연상시키는데, 실제로 부친의 가업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 프로세스는 다분히 공작적이고 구축적이어서 자칫 기계적인 화면을 낳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작가는 말하자면 여기에 회화적 감각을 매개로 그렇게 공작적이고 구축적인 화면을 허물고 해체한다. 공작성과 회화성, 필연성과 우연성, 그리고 구축적인 과정과 해체적인 프로세스가 길항하고 부침하면서 한편으론 수행성이 감지되는, 그러면서도 마치 그린 그림을 연상시키는 분방한 화면이 연출된다. 니체 식으로 치자면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 곧 구축과 질서를 지향하는 충동과 해체와 활성을 겨냥한 충동이 상호 삼투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기법은 수행성을 향하고, 화면은 활성을 향한다. 이처럼 하나의 화면 속에서 수행성과 활성이 같이 가기란 쉽지가 않다. 수행성을 통해 견고한 화면을 구축하면서, 동시에 여기에 활성을 불어 넣어 견고하게 구축된 화면을 흔들고 움직이게 하는 것, 닫으면서 열고, 열면서 닫는 운동의 극성을 동시에 싸안고 실현하는 것에 작가의 그림이 갖는 미덕이 있고 미학이 있다. 


목마, 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 65x53cm, 2015

수행성이 감지된다고 했다. 작가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이고, 그 과정이 자기를 잊게 해주고 오롯이 자기에 집중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그 경향성의 회화는 사람형상과 같은 알만한 그리고 결정적인 형상을 향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우연하고 무분별해 보이는 알 수 없는 형상을 향하고, 결정적인 형상보다는 비결정적인 형상, 활성의 형상, 움직이고 있는 형상, 여기서 저기로 이행 중인 형상, 생성하는 형상,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인 형상을 지향한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일정정도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이며 자유연상기법과도 통한다. 하나의 형상이 다른 형상을 부르고, 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파생시키는,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미처 그려지지 않은 그림을 암시하는, 그리고 그렇게 그려지지 않은 그림을 그려진 그림의 일부로서 싸안는 그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탁본 자체가 초현실주의의 프로타주와 무관하지가 않다. 우연적인, 무의식적인, 그리고 자동기술적인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일종의 내면적인 풍경이며 관념적인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기법 자체는 공작적이지만, 정작 그 공작적 기법은 활성의 이미지며 형상을 향한다. 그렇게 작가의 화면은 구축적인 것에서 해체적인 것으로, 결정적인 것에서 비결정적인 것으로, 필연적인 것에서 우연적인 것으로, 지시적인 것에서 암시적인 것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진화하면서 근작에 이르는데, 근작에선 전작과는 사뭇 다른 의미 있는 변화가 발견된다. 두드러진 경우로 치자면 여백이 많아지고, 그 여백 속에 마치 무의식의 심연과도 같은 검은 어둠이 들어앉는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는 그 어둠 속에 개인적인 서사를 들어앉힌다. 그 서사 자체는 작가에 연유한 개인적인 것이지만, 어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서사처럼 보인다. 검은 어둠은 존재론적 어둠이고,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풍경과 정경, 사건과 정황에 맞닥트릴 때 흔히 데자뷰란 표현을 쓴다. 여기서 데자뷰란 표현은 흥미로운데, 그것이 그저 실제로 과거에 있었던 일과의 우연한 맞닥트림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데자뷰는 때로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는 일에도 들러붙는다. 과거를 현재로 되불러올 때, 곧 기억이 매개가 될 때 일정한 왜곡이 일어나고, 여기에 기억은 일종의 자기 환상을 만들어낸다. 어쩜 기억이란 현실이나 실재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순수한 혹은 그저 무분별한 환영과 착각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정리를 하자면 좋았던 기억을 과장하고, 나쁜 기억을 축소하거나 아예 지우는 것. 그렇게 지워진 기억이 잠수를 타면서 무의식의 지층을 이루고, 그리고 그렇게 잠수를 탄 무의식이 의식의 그림자가 돼 어른거린다. 말하자면 의식이란 언제나 무의식의 그림자(자크 라캉이라면 오브제 아라고 했을)를 동반하면서 숨겨놓고 있는 것. 그러므로 의식 자체가 양가적이랄 수 있고, 데자뷰는 바로 그 양가적인 의식이 자기를 표현하는 형식일 수 있다. 


데자뷰와 맞닥트리는 계기로는 여럿 있을 수 있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여행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행이 계기가 돼 환경도 바뀌고 의식도 바뀌고 그림도 바뀐다.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을 놓고 무슨 새삼스런 변화냐고 하겠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평소 그림을 통해 이미 여행을 하고 있었고(이를테면 기억의 숲과 같은, 사실상 자기에로의 여행으로 봐야할), 그러던 차에 모처럼의 실질적인 여행이 변화를 가속시켰을 것이다. 제주창작스튜디오에 일 년 정도 기거하면서 작업을 한 것인데, 그곳 풍경에서 작가는 왠지 친근하면서 낯선 풍경을 봤고, 아마도 원형적 고향과 닮은 풍경을 봤고, 다름 아닌 자신이 섬 소년이었다는 오랫동안 잊힌 기억을 되살려냈다. 그리고 그렇게 실제의 섬 위에 존재론적 섬이 포개지고, 과거의 바다가 현재의 바다 위로 오버랩 되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 


소녀 복사-알아내지 못한, 캔버스에 한지, 먹, 콜라주, 100x145cm, 2015

이를테면 한바탕 태풍이 휘몰고 간 바닷가에는 어디서 떠내려 왔는지 알 수 없는 부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빌이며 목마, 그리고 열매와 별과 같은 잡동사니 오브제들이다. 여기서 실제로 그것들이 그때 그기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발견된 것일 수도(발견된 오브제?),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낸 것일 수도, 상상으로 지어낸 것일 수도, 그리고 실제로 만들고 조형한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사실은 하나같이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사물들이며, 그 사물들이 역시 수수께끼 같은 유년의 기억을 되불러온 것이란 점이다. 요람을 흔드는 바람이며, 낡은 목마가 삐걱거리는 소리, 그리고 모빌에 매달려 퇴색된 빛으로 발광하는 유리장식과 같은. 친근하고 낯선, 알만한 형상에도 불구하고 오리무중인, 캐니와 언캐니가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는 그 사물들 위로 그리고 불분명한 기억 위로 검은 바다가 일렁인다. 배가 침몰했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동료가 죽었다. 그리고 그렇게 물에 떠밀려온 사물들은 어쩜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흘려보낸 것인지도 모르고, 기억이 유년으로부터 흘려보낸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검은 바다라고 했다. 검은 바다야말로 작가의 근작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며 모티브일 수 있다. 전작에서 곧잘 검은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검은 그림 자체가 이처럼 뚜렷한 형식이며 상징적 의미를 얻었던 적도 없었다. 작가의 그림에서 검은 바다는 말하자면 죽음이 불러일으킨 존재론적 사건이, 유년의 기억이, 무의식의 지층에 잠자고 있던 억압의 계기들이, 그리고 어떤 알 수 없는 세계가 상연되는 스크린이다. 그 스크린 위로 알듯 모를 듯 양가적인 이미지며 모티브들이 부유하고, 마치 기억의 환영처럼 어른거린다. 그리고 그렇게 어른거리는 환영들 가운데 마치 서커스에서 본 것 같은, 어깨에 올라탄 어린아이가 주목된다. 아마도 현재의 자기 위에 올라탄 작가의 유년일 것이다. 


매직리얼리즘으로 유명한 보르헤스의 소설에는 현재의 자기가 과거의 자기와 만나는 장면을 그린 소설이 있다. 상실된 줄도 모른 채 꿈을 꾸는 자기를 상실된 자기가 바라본다. 어쩌면 삶이란 상호간 단절된, 이질적인 지층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일지도 모르고, 다름 아닌 상실의 과정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낭만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말 중에 고귀한 야만인이 있다. 당시 여기저기서 고대 유물들이 발굴되고, 그렇게 영화로운 시대는 현재가 아닌 과거지사였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고귀한 야만인은 바로 그 영화로운 시대를 살았던 고대인들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렇게 고귀한 야만인들이 현대인들의 어깨를 짓누른다. 


이처럼 어깨에 올라탄 어린아이는 작가가 꾸었던 유년의 꿈(아마도 문학소년?)을 상징하고, 현재의 자기를 조종하는 과거의 자기를 표상한다. 어린아이의 손에는 끈이 달려 있어서 아이가 그 끈으로 어른을 조종하는데, 어른은 무쇠 신을 신고 있어서 현실에 붙박여 있는 것 같다. 이처럼 현실에 붙박인 삶을 사는 어른을 조종하는 어린아이를 작가는 거인이라고 부른다. 거인은 어쩜 꿈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모든 꿈꾸는 사람이 거인인 것.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그리고 상실을 증언하기 위해 소환되는 유년을, 꿈을, 거인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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