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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파 / 문학적 수사와 그림 사이, 폭력과 사유의 경계

고충환




레이디 엑스는 나무를 사랑하는, 좀 남다른 페티시를 가지고 있는 여자다. 작가는 레이디 엑스를 통해 소녀가 성에 눈을 뜨는 과정을 그려 보인다. 레이디 엑스로 대리되는 여자, 소녀 그리고 유령과 같은 타자들의 성적 정체성 문제를 그려 보인다(유령의 성적 정체성 문제? 좀비의 성? 주검의 성? 네크로필리아? 시체애호증? 시간? 뵈클린의 주검의 연주? 슈베르트의 죽음의 선율? 살로메의 춤? 유디트의 엑스터시?). 


그런데, 엉뚱하게도 필자에게 레이디 엑스는 좀 다르게 다가왔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레이디 엑스는 xx년과 xx놈으로 다가왔다. 이 말은 성에 대한, 그리고 성(비정상성?)으로 대리되는 타자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도덕과 윤리의 수위며 수준을 말해준다. 즉 여기서 xx는 언어로 드러내놓고 호명하기에는 껄끄러운 것들, 거북살스러운 것들, 낯 뜨거운 것들, 버릇없는 것들, 뻔뻔한 것들, 이상한 것들, 이질적인 것들, 낯선 것들, 좀 아닌 것들, 불안한 것들, 두려움을 야기하는 것들,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들,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의심스러운 것들, 그로테스크한 것들, 히스테릭한 것들, 폭력적인 것들, 예민한 것들, 고독한 것들, 나무와 사랑하는 것들, 숲과 사랑하는 것들, 식물과 사랑하는 것들과 같은, 타자들을 대리한다. 


년과 놈까지는 봐줄만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그렇다면 누가 수위를 조절하고 수준을 명하는가.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가름하고 판결하는가. 등재하고 삭제하는가. 인정하고 처벌하는가. 바로 상식과 합리, 논리와 지각이다. 바로 건전한(?) 사회가, 건강한(?) 제도가 합의의 이름으로 그어놓은 금이고 경계다. 금기며 터부다. 고도로 정치적인 사회에서 합의는 공모를 위한 구실이고, 도모의 다른 이름이다. 거기에 개인을 위한 자리는 없고, 개별을 표시해주는 좌표는 없다. 개인주의가 첨예화되는데 정작 개인이 소외되는 것, 인본주의가 팽배해지는데 정작 인간이 소외되는 것이 정치적 현실이고 아이러니고 딜레마다. 


그러나 여하튼 알다시피 페티시는 성적 성향의 문제다. 성적 성향은 고정된 좌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에 연동된다.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이 달라지면 조준도 달라지고 좌표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욕망의 탈주선을 따라 자유자재로 이행하고 옮겨 다닌다. 그렇게 옮겨 다니면서 욕망 자체를 재편하고, 재구성하고, 재구조화한다. 그건 어쩜 잉여와도 같은, 비존재의 존재들이다. 존재가 아닌 존재들이며, 이성의 이름으로 한 번도 호명된 적이 없는 탓에 부정형으로서만 호명될 수 있을 뿐인(이를테면 비이성적인) 존재들이며, 역설과 아이러니와 모순을 통해서만 명명될 수 있을 뿐인 존재들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그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라고 부를 만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좀비들이고, 삶의 그림자로서의 죽음이며,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이고, 빛을 부각하는 어둠이다. 


그렇게 작가는 어둠의 순례를 그리고, 무의식의 순례를 그리고, 죽음의 순례를 그리고, 숲의 순례를 그린다. 그 숲엔 타자들이 산다. 이를테면 식물들의 사생활, 식물들의 밀실, 폭력의 역사, 전이되는 폭력, 비정상성, 발달장애를 가진 가족, 우울(뒤러는 예술이 우울한 기질이라고 했다), 수미산, 믿음, 인식론적 한계, 나무를 사랑하는 여자, 여성적 감각들, 자연, 비존재의 존재, 낮의 유령들, 불안, 두려움, 공포, 여성적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 리얼리티, 히스테리, 세계의 끝, 어제까지의 세계, 삶의 근원적 무의미를 긍정하는, 인과의 부조리 같은. 그리고 윤리 같은. 그 숲은 결코 깨어나지 못할 잠에 빠진 숲속의 공주처럼 이성이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자는 숲이며, 미네르바의 올빼미마저 날아오르지 않는 숲이며, 주술과 마술과 요술이 연기를 피워 올리는 숲이다. 마치 프란시스코 고야의 검은 그림에서처럼. 


그건 무슨 헤테로토피아적 공간 같다. 사회학으로 치자면 군대, 정신병원, 감옥, 기숙사처럼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부재하는 장소이며, 억압의 계기들이 해소될 기미가 없이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는 장소이다. 존재론으로 치자면 비존재의 존재, 존재가 아닌 존재, 타자들의 처소다. 의미론으로 혹은 언어학으로 치자면 미처 의미화 되기 이전의 의미들이며, 아마도 의미의 원형들이 최초의 다의성과 다성성(상호간 이질적인 주체들이 동시에 말을 하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침묵하는 언어로 말해지는, 시가 산문을 찢는, 문장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의미가 존재가 되는, 개념이 육질을 얻는, 그런 공간이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를 작가적 텍스트와 독자적 텍스트로 구분한다. 그저 읽기만 하는 텍스트가 독자적 텍스트고, 읽으면서 동시에 자꾸 또 다른 책이며 별도의 책을 쓰게 만드는 텍스트가 작가적 텍스트다. 장파의 글이 그렇고 그림이 그렇다. 그의 작업에서 글은 그림과 구별되지가 않고, 그 경계를 허물면서 하나로 아우러진다. 글이 그림을 밀어올리고, 그림이 글을 견인한다. 글과 그림이 서로 숙주가 돼 기생한다고나 할까. 그의 글도 그리고 그림도 그 자체로 완결된 체계며 닫힌 체계로서보다는 열린 체계, 비결정적인 체계, 이행하는 체계, 움직이는 체계, 가변적이고 가역적인 체계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의미는 다른 의미를 부르고, 그렇게 다른 의미를 불러들이는 계기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렇게 의미들의 무한다발로 연속되고 증폭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그 자체로는 결코 완결되지도 결정되지도 닫히지도 않는다. 의미를 생성시키고 부풀리고 확장시키고 되돌리는 무한반복운동을 수행하는 운동성의 텍스트이며 활성의 텍스트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 활성은 묘한 것이 주검을 일으켜 세우는 활성이고,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활성이다. 


마무리하면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최종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에로스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에로스는 타나토스와 같이 간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에로스가 타나토스에 의해, 삶이 죽음에 의해, 삶의 충동이 죽음충동에 의해 세척된다기보다는 해체되고 찢어발겨지는, 그런 폭력적인 느낌이다(마치 디오니소스 축제의 광란의 밤에서와 같은). 정화에서 승화로? 카타르시스에서 숭고로? 아마도 그렇게 이행해가는 미묘한 경계 위에 작가의 그림은 위치해 있을 것이다(폭력과 성스러움 혹은 폭력도 에로스라는 말이 힌트 내지는 암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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