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장성재 / 돌의 본성, 돌 속에 숨은 생명에너지

고충환




돌은 사람보다 오래 산다. 손 안에 속 들어오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사람보다 어린 것은 없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한 세월동안 온갖 이질적인 것들, 잡다한 것들, 다른 것들을 자기 품에 끌어안아 켜켜이 쌓은, 그리고 그렇게 단단한 덩어리로 응축된 시간의 결정체다. 그래서 잘 보면 결도 있고 잡티(잡석)도 많다. 시간이 만들어준 흔적이고, 시간이 만든 조형이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기고, 평생 크고 작은 암 덩어리와 더불어 사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면 되겠다. 돌은 겉살과 속살도 틀린다. 거죽은 허연데 속살은 시커멓고, 매끄러운 표면에 반해 거친 속살을 숨겨놓고 있는 경우도 많다. 조각가는 무엇보다도 이런 돌의 본성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때론 돌의 본성에 순응하면서, 그리고 더러는 돌의 본성을 이용하면서 자기화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성재는 줄곧 돌조각으로 일관해왔다. 그래서 돌의 본성을 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돌의 본성을 안다는 것은 어느새 자기의 심성도 돌의 본성을 닮아간다는 말이 아닐까. 돌의 본성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돌의 본성이 조각의 표면 위로 드러나 보이게 한다. 자기를 실현하려는 돌의 본성(돌의 욕망?)을 돕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돌의 자기실현을 도울 뿐만 아니라, 그 본성을 조형요소로서 끌어안는다. 이를테면 작가의 조각은 돌의 겉살과 속살을 모두 보여준다. 겉과 속을 대비시켜 거친 표면이 숨겨놓고 있는 부드러운 속살을 강조한 것이며(외강내유?), 그 다름과 차이를 부각한 것이며, 그 자체를 조형문법으로서 제안한 것이다. 여기서 비록 속살을 광택마감 처리해 균일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결도 보이고 잡티도 여실하다(아마도 돌의 본성에 해당할). 작가의 조각은 이처럼 돌의 본성 자체를 주제화하고 대상화하고 조형으로 옮겨놓은 것이란 점에서, 돌의 본성이며 조각의 본질 곧 최소한의 형식논리에 충실한 경우란 점에서 모더니스트로서의 일면이 읽힌다. 한편으로 마찬가지 의미지만, 돌의 본성을 알고, 돌의 본성에 순응한다는 점에서, 자기를 실현하려는 돌의 본성을 돕는다는(돌의 물성을 강조하고 부각한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자로서의 일면도 있다. 



조각의 기본은 카빙과 몰딩이다. 재료 안쪽으로 파 들어가 깎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형태를 찾아가는 것이며(카빙), 주형을 이용해 형태 그대로를 떠내는 것이다(몰딩. 그 지평이 전통적인 조소의 경우를 넘어, 라이프캐스팅과 재 제작된 레디메이드에로까지 확장되는). 현재로선 두 경우 모두 직조로 분류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직조는, 그리고 일품조각은 아무래도 카빙 쪽일 것이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현대를 열어준 조각의 혁명은 재료에 구멍을 내는 것이며, 조각에서 좌대가 사라진 것이다. 재료에 구멍을 내 이쪽에서 저쪽을 볼 수 있게 하고, 공간과 공간이 하나로 통하게 해 공간감을 확장시킨 것이다. 그리고 일단 좌대에서 내려온 조각은 설치로까지 자기를 확장시키는 활로를 열어준다. 때론 조각의 이름으로 그리고 더러는 탈조각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허다한 형식의 지점들이 자기좌표를 확장시키는 구실이며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 가운데 장성재의 조각은 카빙의 전형적인 사례를 예시해준다. 어느 정도냐면, 조형의 결과물로서의 만들어진 형태, 최종적인 형태보다는 카빙이라는 기법이며 방법론 자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여실하다는 말이다. 흔히 조각에서의 아방가르드를 형식논리에서 찾는다(물론 회화도 그렇지만). 이런 형식, 저런 형식, 이런 방법, 저런 기법을 실험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때의 실험이 어떤 형태를 전제하고 지향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형태에 부수되는 경우로서가 아니라, 형식실험 자체가 형태가 되고 조형이 되는 차원, 형식실험 자체가 여하튼 질료를 매개로 한 것이므로 어떤 경우로든 형태를 띠고 현상할 수밖에 없는 차원, 그리고 그 자체가 새로운 조각의 한 형식으로서 예시되고 제안되는 차원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차원이 현대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고 확장시킨 것으로 치자면 지대하다.

 
물론, 작가가 조각을 하면서 어떤 알만한 혹은 알 수 없는 형태를 전제하거나 지향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처음으로 조각에 입문한 당시를 유추해보면, 특히 지금과 같은 돌조각이며 특정의 형태에 입문한 당시를 생각해보면, 최종 결과물로서의 형태와 함께, 혹은 형태보다도 더, 돌을 파내고 깎아내는 과정이며 방법이며 기법 자체가 주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재미는 지금도 여전히 작가의 조각을 실질적으로 견인하는 중요한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이며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미 그대로 작가의 조각의 형식논리로서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그 기법, 그 방법, 그 형식논리가 먼저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형태며 의미일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할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돌 안쪽으로 파내고 깎아 들어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선 돌에 구멍이 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작가는 구멍을 매개로 공간감을 확장시키는 한편으로, 모더니즘의 형식논리와 아방가르드의 형식실험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가장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재료와 기법을 수단으로 조각의 지평을 확장시켜놓고 있었다. 



그렇게 조각된 작가의 조각을 보고 있으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마치 푸딩과 같은 부드러운 소재를 스푼으로 떠낸 것 같다. 혹은 그렇게 떠내진 패턴들이 어우러진 파도 같고 물결 같다. 푸딩? 파도? 물결? 재밌는 건 이것들이 하나같이 부드럽고 유기적인 소재들이라는 점이며, 그 소재가 돌이라는 단단하고 결정적인 소재와 부닥치고 충돌한다는 점이다. 실제 소재와 조형이 연상시키는 소재가 다르다. 실제로는 단단하고 결정적인데, 정작 그 조형은 부드럽고 유기적인 질감이며 촉감을 연상시킨다. 돌의 본성에 반하는, 그래서 어쩜 반자연주의적인 일면이 읽힌다.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로 치자면, 사물의 변성이며 물질의 변질에 천착했던 중세 연금술에도 소급된다. 돌을 물 주무르듯 하는, 돌에서 정작 돌보다는 물을 연상시키는, 연금술의 현대판 버전이 예시되고 있다고나 할까. 경성에서 연성으로, 감각적 실체에서 관념적 실체로, 존재에서 부재로, 유에서 무에로 이행해가는 사물의 변성과정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물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조각은 겉과 속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파도와 물결은 원래 돌 속에 속해져 있던 것이다. 돌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바로 파도와 물결이 돌의 본성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본성을 작가가 자신의 조형감각으로, 혹은 보다 적극적으로는 자신의 혜안으로 형상화하고 가시화한 것이다. 여기서 돌의 본성은 사물대상의 본성으로, 존재의 본성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물대상은 그리고 존재는 평소에는 자신의 본성을 숨겨놓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평소에는 숨겨진 채로 있는, 본성으로서의 파도며 물결이란 뭔가. 바로 사물대상이, 존재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원천일 수 있다. 이를테면 그 자체가 존재에 내재된 에너지며, 기며, 생명력의 표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그러므로 존재를 피직스와 나투라로 구분했는데, 감각적 사물대상으로서의 자연을 피직스로, 그리고 그 사물대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동력이며 운동성을 나투라로 명명했다. 동양으로 치자면, 감각적 사물대상을 양으로, 그리고 그 감각적 사물대상의 원인을 음으로 각각 구분한다. 작가가 형상화시켜놓고 있는 돌 속의 파도며 물결은 바로 이런 나투라며 음의 또 다른 표상형식이 아닐까. 비록 그 자체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마치 정중동에서처럼, 차고 오르는, 혹은 휘몰아치는 것 같은, 파도의 운동성을 잠재하거나 연상시키는 형태가 이런 에너지의 장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형상화해놓고 있는, 돌이 자기 속에 품고 있는, 파도며 물결은 어쩜, 모든 존재는 저마다 에너지의 장들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물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돌 이야기를 해보자. 돌 속에 잠재된 에너지가 아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태 자체에 주목해보자.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작가의 조각은 돌 속으로 움푹 파인 형태가 무슨 타제석기 같고 마제석기 같다. 타제석기나 마제석기는 어쩌면 자연이 만든 형태일 수 있고, 자연의 조형일 수 있다. 반쯤 자연이 만들어준 형태에서 어떤 쓰임새를 발견하고 그 형태를 갈고 다듬은 경우로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조형의 원천은 자연에 있다. 사람이 만든 인공적인 조형도, 문명의 이기도 그 원천을 따져보면 하나같이 자연에서 빌려온 것이며, 자연에서 착상된 것이며, 자연을 변용한 것들이다. 이처럼 자연을 변용한 형태를 조형으로 옮겨놓은 작가의 조각은 그러므로 다시금 자연주의적인 일면을 획득한다. 그 이면에선 인류문명의 기원에 대한, 최초의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도구적 인간(호모파베르)에 대한, 도구와 자연과의 관계(이를테면 기능주의?)에 대한 관심과 함께, 박물학과 고고학적 발굴과 같은 문명사적인 비전이 엿보인다. 



한편으로 인간이 자연에게서 빌려온, 그리고 그렇게 빌려와 자기화한 조형으로 치자면 기하학적 형태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기하학은 수학으로 여겨졌고, 자연에 연유한 패턴으로 여겨졌고, 자연에서 발견한 질서(구조?)로서 받아들여졌다. 바로 그 기하학에 대한 관심, 이를테면 수학과 패턴, 질서와 구조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작가가 근작에서 새로이 시도하고 선보이는 금속조형이다. 돌조각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치자면, 하나의 단위구조가 반복 재생산되는 식의, 그리고 그 자체가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증언해주고 있는, 패턴이 두드러져 보인다는 점이다. 돌조각에서와 같은 비정형 패턴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원과 삼각형 그리고 육각형과 같은 정형 패턴들이 어우러져 조형을 만든다. 하나같이 기하학의 기본형(우주의 관념을 형태로 도상화한 경우)에 해당하며, 특히 육각형 패턴에 바탕을 둔 조형은 인류가 처음으로 집에 대한 착상을 얻어왔다는 벌집구조를 연상시킨다(그리고 방사형의 도시구조를 거미줄에서 착상해왔다는 설도 있다). 프레스에 의한 공기압력으로 휘게 만든 철판 조각들을 일일이 용접해 붙여 만든 연후에 그 표면을 부식 처리한 이 조형물들에선 금속임에도 금속 같지 않은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이며 색감이 감지된다. 다시금 사물의 변성이며 물질의 전환에 대한 연금술적인 관심이 재확인된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보다는 금속에서마저 자연적인 혹은 자연우호적인 성질을 요구하는 작가의 체질이 더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따지고 보면 금속도 자연이긴 하지만, 여하튼). 


이로써 작가는 돌조각에서 유기적이고 우연적이고 가변적이고 감각적인 형태를, 그리고 금속조형에서 기하학적이고 필연적이고 수학적이고 관념적인 패턴과 구조를 각각 형식실험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그 형식실험을 통해서 조형을 일궈내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크게 보면 둘 다 작가의 조형적 관심사에 해당하는 것들이고, 작가의 조각을 뒷받침하는 감각의 두 축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향후 그 형태며 구조가 그리고 패턴이 어떻게 진화해갈지, 그리고 그 자체가 돌조각과는 어떤 차별화를 기하게 될지가 사뭇 궁금해지고 기대가 된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