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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화 / 존재의 생명력을 표상하는 색깔들

고충환




속도감이 여실한 거침없는 붓질들, 현란한 원색대비가 두드러져 보이는,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 색깔들, 나이프로 발라 올린 두툼한 마티에르와 물성, 헐거운 밀도와 촘촘한 강도가 분방한 듯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구조, 중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마구 흘러내리다 맺힌 얼룩들, 타시즘을 연상시키는 흩뿌려진 색점들, 물길을 따라 번져나가다 멈춘 비정형의 자국들, 붓질과 붓질이, 색깔과 색깔이 서로 부닥치면서 그어놓은 경계들, 그리고 자국과 자국이, 얼룩과 얼룩이 서로 스미면서 지워진 경계와, 그렇게 생성된 중간 계조의 색조가 무분별하게 어우러진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고, 액션페인팅을 연상시키고, 소위 몸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표현이란 원래 내재적인 것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을 말하고, 추상표현이란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형식이 추상적인 경우를 의미한다. 원래 내재적인 것? 억압된 욕망일 수도, 맹목적인 드라이버(자기실현)가 생명력과도 동일시되는 리비도일 수도, 에너지의 핵 아니면 기일 수도 있다. 삶의 환경이 문명화되면서 변방으로 밀려난 것들, 인격 혹은 인성에서 추방된 것들, 이를테면 자연성과 본성, 야성과 야생, 주술과 마술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현대사회는 고도로 제도화된 탓에 이런 반 혹은 탈 제도적이고 무분별하고 건강한 생명력의 표출을 위한 자리가 없다(미하일 바흐친은 욕망의 무분별한 분출과 건강한 생명력의 표출을 반제도적이라고 본다. 제도가 그 분출이며 표출을 억압하는 것). 그걸 말하자면 종교가 떠맡고 예술이 도맡고 있는 것. 그러므로 예술가는 어쩜 현대판 무당일 수 있고, 그 하는 짓이 종교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억압된 것을 풀어서 해소시켜주고 승화시켜준다. 일종의 치유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그리고 특히 작가의 그림은 카타르시스며 자기정화와 통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그러므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로서 카타르시스를 꼽는다). 



실제로도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아마도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도 그러했을 것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표출했을 건강한 생명력이며 좋은 기운을 그림을 보는 사람도 나눠 받고 있다고나 할까. 바로 동일시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카타르시스가 가능해지기 위해선 비극의 주인공에 자기를 동화시켜야 하고 동일시해야 한다. 이런 동화현상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극이 잘 작동할 때 비로소 작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가의 그림이 관객을 부르는 힘이 있고 호소력이 있어서 가능해지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인격이 관객에게 전달되고, 작가의 인성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작가와 관객이, 개체와 개체가, 존재와 존재가, 우주와 우주가, 세계와 세계가, 생명과 생명이 서로 소통하는 것인데, 작가가 일관되게 천착해온 생명소통이란 주제가 아마도 이런 차원이며 경지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동화현상이며 생명소통이 잘 일어나는 그림으로 치자면 어떤 형식의 그림일 수 있는가. 그 그림은 모르긴 해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직접 마음을 파고들어 움직여야 한다.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그린 그림, 그래서 무의식을 파고들고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 직접적인 그림, 생생한 그림, 날 것 같은 그림, 그래서 마치 건강한 생명력의 표상과도 같은 그림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재현적이고 서사적인 그림보다는 추상적인(직접적으로 와 닿는) 그림이 그 요구에 걸맞을 것이다. 하나같이 작가가 그리는 그림이기도 하거니와,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 요구되는 이러저런 형식요소 중 특히 색깔이 다른 요소들, 이를테면 형태나 구조보다 이런 동화현상이며 생명소통이 더 잘 일어나고 더 잘 작동할 것이다. 색깔은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추상적인 그림도). 그래서 작가의 그림에서 색깔은 결정적이다. 색채화가로 널리 알려진 앙리 마티스는 회화에서 결정적인 것은 표현이며, 다른 요소들은 다만 표현을 도울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표현은 기실 색깔을 의미했다. 마티스는 안락의자처럼 편안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도 했는데, 아마도 색깔을 매개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이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색깔은 현란할 정도로 컬러풀하고, 그래서 건강한 생명력의 무한분출과 자기실현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간색을 쓰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국과 자국, 얼룩과 얼룩이 서로 스미면서 중간계조의 색조를 만들 뿐, 화면은 온통 현란한 컬러들로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 생명 있는 것들이 낱낱이 컬러로 환생해 저마다 자기존재를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색깔들은 다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작가의 색채감각은 한눈에도 전통적인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오방색에 바탕을 두고 이를 변주한 것 같고(알다시피 동양에서 오방색은 우주를 상징하고, 존재를 상징하고, 세계를 상징한다), 색동옷과 색동천, 사찰의 단청빛깔이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한차례 해체된 연후에 재구성되고 재조합되는 것 같고, 그리고 그렇게 우주가 재구조화되는 것 같고, 당나무나 신목에 치렁치렁한, 바람에 춤을 추는 조각 천 같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라고 했다. 기본적으론 작가의 감각 내지 감수성 아니면 이를 밀어올린 내재적 에너지(혹은 내공?)라고 하겠지만, 이보다는 작가가 유전인자로 물려받은 어떤 원형적 존재 내지 계기로 봐야 한다. 그게 뭔가. 바로 무속이고 주술이다. 범신론이고 물활론이며, 샤머니즘이고 토테미즘이다. 어떤 영성(혹은 마찬가지 의미지만, 영적 기운)이 존재를 파고들어 생활화된 것, 그리고 그렇게 생활감정으로 자리 잡은 것 곧 기질 내지는 체질이라고 봐야 한다. 그 기질이며 체질이 색깔을 덧입고 외화 된 경우라고나 할까. 




그리고 액션페인팅을 우리말로 옮기면 몸그림이 된다. 머리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개념미술이다. 가슴은 느낌으로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표현주의다. 그리고 몸은 감각(감?)으로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몸그림이다.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리고,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몸그림은 직접적이다. 어떤 전제도 없이 화면에 바로 육박해 들어간다. 그렇게 들어가 일을 치고 저지른다. 그렇게 저지르다 보면 문득 형태가 보이고, 그 형태가 다른 형태를 부른다. 불현듯 색깔이 보이고, 그 색깔이 다른 색깔을 불러들인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자유 연상적이고 자동 기술적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초현실주의적인가. 몸 그러므로 무의식의 부름을 따라 그린 그림으로 치자면 초현실적이고, 형식으로 치자면 초현실보다는 추상미술에 가깝다(물론 초현실주의에도 앙리 미쇼와 같은 칼리그래프를 변주한 추상미술을 떠올리게 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이런 몸그림은 말 할 것도 없이 존재의 건강한 생명력이며 자기실현에 맞춰진 작가의 주제의식에도 그대로 부합한다.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핵심은 생명력이다. 바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존재의 생명력(생명 에너지 혹은 기)을 춤추는 것 같은, 폭발할 것 같은 색깔로 옮기는 것이다. 폭발할 것 같은? 작가의 그림은 생명 있는 것들의 존재주장으로 인해, 넘치는 생명력으로 인해 화면이 좁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의 그림에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여백이 없다. 공간공포(빌헬름 보링거에 의하면, 어떤 여백도 참아내지 못하는)랄 것까지야 없겠지만, 색깔들의 역동이 화면을 채우고, 팽창시키고, 확산시킨다. 그 자체로 완결된 체제로서보다는 화면 안쪽과 바깥쪽이 서로 연장된 것 같고, 그 연장의 임의적인 단절처럼 보인다. 양식사에서 여기에 부합하는 개념을 빌려오자면, 일종의 후기 바로크 혹은 바로크의 현대판 버전 정도로 볼 수도 있겠다(르네상스의 안정체제와는 비교되는, 부조화, 불균형, 불협화를 매개로 조화를 꾀하고 균형을 일궈내는). 



여기에 흥미로운 경우로서 일종의 모자이크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주목된다. 비정형의 사각 면들을 무슨 조각보처럼 하나의 화면으로 엮어놓은 그림이다. 면과 면들이, 모나드(존재의 원소)와 모나드가, 개체와 개체가 서로 만나 관계하고 어우러지면서 세계가 형성되고 우주가 작동한다. 생명 있는 것치고 저 홀로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삼라만상이 서로서로 관계하는,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고 되비치는 인드라망의 거울그물로 연결돼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신이 주제로서 제안해놓고 있는 생명소통과도, 그리고 나아가 불교의 연기설(세속적으로는 인연)과도 하나로 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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