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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승희/ 말씀과 이성과 빛으로 숨은 신

고충환



루시앙 골드만은 신을 숨은 신이라고 했다. 숨은 신은 본질과 편재성을 자기의 본성으로 내재화한다. 본질은 하나이고, 편재는 도처에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이면서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신은 그러므로 자기 모순적이다. 후기구조주의의 용법을 빌려서 말하자면 다중심이다. 변방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 중심, 변방을 생산하는 계기로서의 중심 같은 중심은 이제 없다. 존재가 생성되고 미치고 전개되는 유형무형의 모든 지점이며 지평이 중심인, 그런 다중심이 있을 뿐. 그렇다면 하나인 신은 어디에 편재하는가. 소여된 것과 인위적인 모든 곳에 편재한다. 소여된 것으로 치자면 자연이 되겠고, 인위적인 것으로 치자면 도덕이 되겠다. 도덕 자체는 인간(부르주아)의 발명품이지만, 그 이면에는 숨은 신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쩌면 양심이며 무의식마저 그럴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신의 현현이라고 보았다. 윤리적 공감이며 윤리적 참여를 호소해오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타자로 보고, 그 타자의 얼굴 속에 신이 숨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여하튼 신은 숨은 신이다. 신은 이처럼 숨어 있는 탓에 상징을 통해서만 신과 대면할 수가 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그리고 나무를 태우지 않으면서 타는 불과 같은. 손에 잡힐 듯한 감각적 실재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현세가 아닌 내세의 메타포를 위해 그려진 낭만주의 풍경화에 등장하는 폐허 이미지와 같은. 그리고 그렇게 신화와 종교에는 신을 지시하기 위해 허다한 상징들이 호출된다. 특히 종교는 이런 신을 호명하기 위한 상징들의 집이랄 만하고 백과사전이랄 만하다. 그렇게 무수한 상징들 중 가장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경우로 치자면 단연 빛을 들 수가 있겠다. 특히 중세기독교미술에서 성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동안 님부스(후광)와 같은 도상학(이코노그래피)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빛의 세례 그러므로 어쩌면 신의 세례와 같은 보다 직접적인 경험(접신?)의 차원을 열어놓고 있다. 빛 곧 신이 나와 함께 한다는, 신의 몸속에 거한다는, 신이 지금 여기서 나를 만지고 더듬고 있다는 생생한 현장감이며 현실감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 

손승희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형상화하고 전달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화육론 곧 빛의 몸을 덧입은 신의 현현이다. 물론 조형적 성과에 대한 작가적 자의식이 기본이겠지만, 조형에서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마찬가지로 재료와 방법이 작가의 자의식과 별개일 수 없다는 점, 최소한 상호작용적임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경우에는 조형적 성과와 신의 표상이 같이 간다고 보면 되겠다. 


재료의 측면에서 손승희의 작업은 유리조형으로, 그리고 장르적 특수성을 따지자면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으로 각각 범주화된다. 유리조형이라는 큰 틀 속에 스테인드글라스라는 장르개념이 포함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알다시피 유리조형에도 여러 질이 있고, 특히 현대미술과 관련해 볼 때 유리조형은 지금까지의 기능이나 장식 위주의 조형적 한계에서 벗어나 조형 자체를 추구하는 것으로 인해 현대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놓고 있다. 조형이 기능에 부수되는 차원에서 벗어나 조형 자체가 목적이고 지향인 경우로 이행한 것이며,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유리의 재료적 특성이며 특질이랄 수 있는 투명성과 투과성이다. 투명성과 투과성으로 인해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 것이며, 여기에 거울이라도 매개될 양이면 반영성이며 자기 반영성까지도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주제 면에서 반영성은 중요한데, 자기반성적 경향성이라는 존재론적 자의식을 주제화할 수 있게 해준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현대유리조형의 대개는 바로 이런 투명성과 투과성(공간 확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반영성과 자기반영성(자기반성적 경향성을 주제화하게 해주는)을 매개삼아 자기표현을 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손승희의 작업은 유리조형 중에서도 스테인드글라스에 속한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현대적인 문법으로 그리고 동시대적인 감수성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스테인드글라스는 유리조형 중에서도 가장 전통이 깊고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 만큼 일반적인 유리조형의 경우에 비해 그 운신의 폭이 한정된 편이다. 장인적인 스킬이 요구되는 만큼 아무나 접근할 수는 없고, 그런 만큼 성공적일 경우에 전통과 현대,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층위로 만나지는 접점을 효과적으로 부각할 수 있다. 그 접점을 짚어내는 일은 중요한데,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강화하기 위해 그리고 나아가 자기를 확장하기 위해 전통을 불러들이고 과거를 호출하는(이를테면 오래된 미래와 같은) 현대미술의 경향이며 양상으로도 분명히 확인되는 부분이다. 

일반유리조형에 비해 운신의 폭이 한정적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그 자체 스테인드글라스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스테인드글라스가 가능하기 위해선 유리 소재를 다룰 수 있는 스킬은 물론이거니와, 공간적인, 건축적인, 종교적인 이해가 필수적이고, 특히 빛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이 요구된다. 비록 스테인드글라스는 아니지만, 빛에 대한 감수성으로 치자면 빛과 공간(그리고 유리?)을 매개로 명상적인 계기를 열어 놓고 있는 제임스 터렐 같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가 있겠다. 이미 어느 정도 그 본성의 일부로서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만, 유리조형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차제에 본격적인 빛의 예술로 이행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런 비물질 예술, 이를테면 물과 빛과 공기와 바람처럼 상대적으로 그 실체가 희박한 소재들이며 질료들을 매개로 한 예술(이를테면 프로세스아트)은 현대미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경우에 속한다. 


이처럼 스테인드글라스는 공간적이고 건축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이해가 요구되는 탓에 작가의 작업은 주로 교회를 위한 성물의 형태로 봉헌된 경우가 많다. 그 자체가 성물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반영하고 실현한 조형이고 작품인 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다양한 유리소재의 작업을 시도하는데, 대략 앤틱글라스와 슬랩글라스 그리고 오팔글라스가 그것이다. 앤틱글라스는 스테인드글라스 중에서도 가장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투명한 착색유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오팔글라스는 젖빛 유리라고도 하며, 반투명재질의 착색유리로서 주로 모자이크와 같은 패턴이 있는 이미지를 재현할 때 사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특징적인 경우로 치자면 단연 슬랩글라스를 그 예로 들 수가 있을 것인데, 덩어리 색유리라고도 한다. 광물로 치자면 미처 가공되기 이전의 광석이며 원석 그대로의 거친 질감과 비정형 형태에나 비교될 만한, 그런 유리원석을, 유리블록을 연상시킨다. 이런 색유리 덩어리들을 이용해 조형했을 경우에 그 인상이며 결과는 전형적인 스테인드글라스와는 사뭇 다르다. 실제로도 작가의 작업을 보면 여러 면에서 현대미술을 위한 조형적 가능성을 상당할 정도로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덩어리인 탓에 조각적이고 입체적인 조형을 가능하게 해주고, 특히 유리 고유의 물성을 부각하게 해준다. 그리고 비정형의 형태가 빛을 굴절시켜 보다 암시적인 표현이며 인상을 연출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정형의 덩어리로 인해 재현적이고 서사적인(이를테면 앤틱이나 오팔글라스라면 가능할) 경우보다는 상대적으로 추상형식의 표현에 어울린다. 여기에 그 추상형식 자체가 역시 추상적인 형태의 현대적인 건물구조에 어울린다. 이를테면 건물 내부에 이런 색유리 덩어리들을 세로로 배열해 놓은 작품을 보면 마치 하늘에서 빛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도 이를 통해 작가는 전통적인 물의 세례와는 비교되는 빛의 세례를 형상화한다. 세례란 무엇인가. 거듭나기 위한 의식이고 의례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치자면 신에 귀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이를테면 신의 은총과 같은), 무신론자는 명상의 계기를 만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천지창조의 말씀>(2008)을 보면, 일종의 말씀의 벽이며 빛의 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구현했다. 저마다 한 알의 씨앗이 되어 그 씨앗으로부터 세상을 향해 빛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빛을 퍼트리는 빛의 씨앗이라고나 할까. 주지하다시피 태초에 신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렇게 신이 최초로 창조하신 것이 빛이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신이 곧 말씀이고 빛이다. 신이 말씀으로 스스로를 창조한 것이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 곧 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쩜 신과 말씀과 빛과 이성은 하나다. 그 하나로부터 세상이 유래한다. 세속적인 학문으로 치자면,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세상은 이데아를 모방한 것). 그리고 플로티노스의 일자와도 같은(세상은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 작가의 이 작업은 말하자면 신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극적 순간을 조형한 것이며, 그 말씀의 씨앗이 빛이 되어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는 극적 상황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외에도 현대미술과 관련해 특히 주목되는 경우로는 <기도>(2007)를 들 수가 있다. 여기서도 작가는 역시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데, 그 제작과정이 예사롭지가 않다. 성경에 등장하는 테마(이를테면 로사리오 기도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기도와 같은)를 그린 것인데, 성당의 신자들이 직접 참여해 테마 그대로를 연기하고, 그 연기를 바탕으로 그림으로 옮겨 그린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역할극이 행해지고 있는 것인데,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소통(커뮤니케이션아트)을 주제화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봄으로써 진정한 소통의 실현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의 주체에 스스로를 동화시켜보는 경험과 함께, 내가 그때 거기에(당시 기도현장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그리고 지금 여기에(내가 항상 다니는 교회에 내가 있다는) 있다고 하는 항상적인 존재확인으로 인해 개인으로선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준다. 그때 그곳에서처럼 지금 여기에 신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생한 느낌이며 현실감을 준다. 사실주의 내지 현실주의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반영된, 그리고 그 고민이 재치 있게 실현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작가는 광의로는 유리조형을, 그리고 협의로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매개로 종교적인 예술(성물)과 세속적인 예술(조형예술) 모두를 실현한다. 그러나 이 둘을 동시에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모두를 아우르게 해주는 매개가 있어야 하고, 작가의 경우에 그 매개는 빛이다. 성스러운 빛과 감각적인 빛, 그리고 아마도 관념적인 빛과 물질(질료)적인 빛을 매개로 신을 표상하는 것. 그러나 신은 숨은 신인 탓에 틀에 박힌 도상으로도 그리고 낡은 감각으로도 자칫 오히려 더 숨을 수도 있다. 이처럼 숨은 신을 형상 위로 불러내기 위해선 형상 자체가 현대미술로 거듭나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어쩜 표상 없는 기호일지도 모르고(질 들뢰즈), 그 의미를 알 수도 없고 잊히지도 않는 상처일지도 모를(롤랑 바르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직 개별적(개인적)으로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를(현대미술이 그렇고, 그리고 혹 종교도 그럴지도 모를), 그런 숨은 신을 조형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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