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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민/ 뒤러는 예술을 우울한 기질이라고 했다

고충환

화가들의 작업실은 어디인가.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림이 생산되는 현장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발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이 무슨 제품이나 상품처럼 취급되는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한 것일 수 있겠고, 여전히 작업실을 예술가의 혼이 깃든 창작의 산실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불경스럽게 비칠 수도 있겠다. 개념미술 이후에는 작업실과 함께 거점이라는 명칭이 쓰이기도 하는데, 브리핑룸이나 작전상황실과 같은 약간은 삭막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최초의 작업실은 어디인가. 그건 원래 조합이었다. 화가들의 조합이 있었고, 화가들은 조합에 소속된 조합원들이었다. 그리고 이후 그림이 집단창작이 요구되는 벽화로부터 개별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이젤페인팅으로 옮아가면서 화가들도 덩달아 조합에서 독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아틀리에 개념과 좀 더 이후에는 스튜디오 개념이 그 독립공간을 지칭하게 된다. 아틀리에와 스튜디오 간에 실질적이고 기능적인 차이는 없지만, 화실과 작업실이 불러일으키는 약간은 다른 분위기 정도로 구별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를테면 정물대와 석고상, 난로와 야전침대 그리고 턴테이블이 화실의 향수를 구성하는 필수품목이라고 한다면, 작업실은 상대적으로 그 향수가 덜한 편이다. 현대미술이 다변화되고 복합적으로 되는 것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로 보인다. 

화가들은 다른 화가들의 작업실이 궁금하다. 그래서 문학의 숭배자들이 문학관을 순례하듯이 지금은 기념관이나 개인미술관으로 변한 대가들의 작업실을 순례하기도 한다. 이 순례에는 거저 궁금한 것 이상의 위대한 작가들의 예술혼을 그리워하고 경외하는 애틋한 감정이 묻어있다. 대가들에 대한 오마주라고나 할까. 남경민의 그림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실제로 현지를 순례하는 대신, 작가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 속에서 순례를 한다. 미술사를 통해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순례를 위한 길잡이가 되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면서 일정하게 변형된다. 미술사에서 불러낸 공간과 작가가 속해져 있는 현실공간을 하나의 화면 속에 편집하고, 미술사가 속해져 있는 역사적인 배경과 작가의 현실인식이 하나로 짜깁기된다. 



남경민, 몬드리안에 의한 환영(Illusion by Mondrian), 2006, Oil on canvas



실제로 그림 속에 작가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처럼 자신이 속해져 있는 현실공간과 미술사적 공간을 편집하고, 현실인식을 역사적인 배경과 짜깁기하는 방법으로 대가들의 작업실을 엿보는 상황을 연출한다. 비록 그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작가는 실제로 대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한다. 엄밀하게는 작가가 직접 방문하는 대신 자신의 분신인 나비를 내보낸다. 그러므로 그림에 등장하는 나비는 대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싶고 대가들과 대화하고 싶은 작가자신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며, 나비는 그렇게 시공간의 차이를 넘어 작가의 염원을 실현하게 해준다. 이처럼 그림 속에서 작가는 나비로 대체되는데, 마찬가지로 대가들 역시 빈 의자 위에서 무슨 환영처럼 나풀거리는 나비로 대체된다. 나비는 말하자면 작가의 분신이면서 동시에 대가들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 그러므로 나비는 어쩜 시공간을 넘나들고,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고, 실재와 상상력을 넘나들면서 작가와 대가들을 만나게 해주는 뮤즈의 전령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그려진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고 낯설다. 친근한 것은 알만한 사물들이 등장해서이고, 낯선 것은 그렇게 알만한 사물들이 배치되고 배열되는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작가의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보면 볼수록 낯설다. 바로 차이 나는 시공간이, 현실과 비현실이, 실재와 상상력이 하나의 화면 속에 편집되고 재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을 재확인시켜주는 대신, 그림 속 현실이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가의 그림에는 각종 다양한 상징적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대개는 대가들의 그림에 실제로 등장했던 오브제들로서, 빈 의자 위에서 비현실적으로 나풀거리는 나비와 함께 대가들의 또 다른 영혼을, 인격을, 분신을 상징한다. 이를테면 프리다 칼로의 작업실에 등장하는 새장에 갇힌 새와 휠체어 그리고 화살에 찔려 피를 흘리는 사슴은 화가 자신의 신체적 장애가 만들어준 트라우마와 자의식이 키운 예술을 상징한다. 그리고 반 고흐의 방 한쪽에 놓인 빈 병속의 날개는 욕망과 좌절을 상징하며, 살아생전 결코 빛을 보지 못했던 요절한 천재를 상징한다. 이외에도 해골은 삶의 무상함을, 시든 백합은 순결의 무상함을, 꺼진 촛불은 진리의 무상함을, 그리고 모래시계는 무상한 삶의 시간을 상징한다. 

무상함은 바로크 미술에서 유행했던 감정으로서, 당시 그림을 그린 대가들의 감정일 수 있겠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림을 재해석한 작가의 감정일 수도 있겠다. 어쩜 삶이 무상하고 예술이 무상할지도 모른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정작 보면 볼수록 오리무중에 빠지는 그림 속 의미처럼 작가가 그린 화가의 작업실 그림은 사실은 무상함이 주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가의 작업실은 무상함을 생산하는 공장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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