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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연/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 그리운 존재 그리고 어쩜 부재

고충환


김정연, From oneself


청년기 혹은 사춘기, 진정한 삶 혹은 진정한 현실, 은신과 은신처, 보기의 재구성, 자아, 공간과 대화하기. 김정연이 그동안 자신이 그린 그림들에 부친 주제들이다. 실제 그림과 주제가 문자 그대로 일치하지도 않거니와 작가가 지나쳐온 주제들이지만 근작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단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도 의식도 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더러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다. 변하지 않는 것, 다만 변주될 뿐인 것, 그리고 그렇게 매번 다른 형식을 덧입고 반복 재생산되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에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계기일 수 있고,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첩경일 수 있다. 


청년기 혹은 사춘기는 전환기에 따른 불안정한 정체성이며 경계 위의 정체성으로 특징된다. 이로부터 경계에 대한 인식이며 사이에 대한 인식이 유래하고, 존재의 불분명하고 불투명한 부분에 대한 관심이 견인된다. 그리고 그 인식이며 관심 그대로 진정한 현실에 대한 의심으로 연결된다. 무엇이 진정한 현실인가. 회화적 재현과 사진적 재현에 연이어 디지털적 재현을 거치면서 그 자체 또 다른 현실로 제안된 이미지에 친숙한 세태에게 현실이란 무슨 의미인가. 현실보다 이미지가 더 친근한 세대에게 실재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변형과 합성으로 현실이 자유자재로 재구성되는 디지털적 현실에서 본다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그리고 그렇게 보아진 현실은 현실인가 아니면 현실을 닮은(혹은 같은 의미지만, 현실을 모방한) 또 다른 현실인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에 대한 스펙터클 소사이어티(기 드보르)는, 그리고 실제로는 없는데 사람들의 의식이며 인식 속에서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뮬라크라(장 보들리야르)는 현실인식을 투명하게 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 뿐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다만 그 경우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숨고 싶다. 그렇게 숨을 수 있는 방으로 치자면 무의식만한 것도 없다. 숨을 수 있는 방이라고 했다. 바로 무의식을 공간으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내면공간을 외화(자기내면을 이미지 혹은 회화로 재현)하는 일이며, 자기 자신과의 은밀한 만남이며 커뮤니케이션이 비롯되고 가능해진다. 


한 작가의 의식으로 보기에는 복잡한가. 일관성은커녕 오히려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드는가. 그렇지는 않다. 잘 보면 보인다. 작가의 근작을 지지하는 개념이며 형식논리가 전작에 숨어 있었고, 그렇게 숨어 있던 것이 근작의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결정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도래할 그림을 위한 개념이며 형식논리를 위한 은신처도 근작이 예비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을 견인하는 일관성은 유동적인 일관성이며 움직이는 일관성이다. 이 움직이는 일관성을 매개로 작가는 나아가고 되돌아오는 운동을 반복할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에서 존재에로, 내면에서 외면에로, 사진에서 회화에로, 시간에서 공간에로, 신화에서 현실에로, 현실에서 비현실 혹은 몽환적 현실에로, 그리고 그 반대 방향으로도. 그렇게 이행하면서, 차이를 만들면서, 덧칠하기를 거듭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고, 그렇게 되돌려진 자기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자기반성적인 사유의 전형처럼. 



김정연, 화양연화


그렇다면 근작은 어떤가.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화양연화라고 부른다. 꽃 모양이 가장 예쁠 때를 의미하며, 이로부터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예쁜 꽃을 그리고, 예쁜 꽃으로 대리되는 자신의 혹은 존재 일반의 호시절을 그리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작가의 주제는 역설적으로 읽을 때 그 진상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예쁘고 아름다운 것일수록 덧없음의 강도도 크다. 모든 것은 강도의 문제다. 존재가 희박하면 부재도 흐릿하지만, 존재가 충만하면 부재도 절실하다. 동양으로 치자면 화무십일홍이 되겠고, 서양의 경우에는 바니타스의 전언을 떠올려볼 일이다. 


결국 근작에서의 주제는 그 겉 뜻이 화양연화이고, 그 속뜻은 화무십일홍이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일수록 덧없고 가엽고 그립다. 작가는 근작에서 그렇게 덧없고 가엽고 그리운 것들을 그린다. 사실 따지고 보면, 존재는 부재를 향해가는 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다. 존재는 부재로, 삶은 죽음으로, 있음은 없음으로 이행해가는 것이 진상이다. 목적이며 지향이랄 것까지야 없겠지만, 존재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의미일 수 있다. 그래서 작가가 그리는 것은 작가의 개인사를 통해 체득된 혜안에 의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혜안은 작가에게 한정된다기보다는 존재일반에 대해 열려있는, 그런 보편적인 가치며 공감을 얻는다. 다시, 그렇게 작가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이며, 덧없고 가엽고 그리운 존재 일반을 그리고 존재의 성정(운명?)을 그린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주제의식을 어떤 형식논리로 풀어내는가. 작가의 형식논리 혹은 방법론은 사진과 회화의 경계 위에 세팅된다. 작가의 그림은 사진적이고 사진 친화적이다. 사진 같은 회화며 회화 같은 사진, 모두가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이루어진다. 작가의 작업 중에는 실제로 그림과 함께 디지털프린트도 있지만, 작가의 회화적 감수성은 아무래도 사진으로 대리되는 이미지로부터 키워지고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프레임도, 각도도, 시점도, 질감도, 그리고 분위기마저도. 그렇게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이미지는 사진을 연상시키고, 특히 다게레오타입이나 은판사진 그리고 핀홀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같은 초창기 사진을 연상시키고 회화적인 사진을 연상시킨다. 어쩜 작가의 작업에서 그림과 이미지와 사진을 굳이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고, 그것들이 만나지는 접점에서 이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것 같다. 


그렇게 제안된 이미지를 보면 피사체 혹은 모티브 간의 경계가 애매하고, 가장자리가 흐릿하게 지워진다. 마치 목탄화에서 화면 아래로 흘러내린 목탄가루가 여실한 것처럼 피사체는 느슨한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존재감이 희박해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희박한 존재감으로부터 특유의 아우라며 분위기가 발산된다. 입자들은 마치 피사체를 견고하게 하기보다는 해체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피사체는 구축되기보다는 해체되고 있는, 분해되고 있는, 사라지고 있는 도중을 연상시킨다. 그럼, 그 피사체들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바로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작가는 바로 이처럼 시간의 풍화로 인해 희박해지고 지워지고 사라지는 존재의 순간을 그림 속에 붙박여 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쩜 작가의 진정한 주제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시간을 형상화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간을 형상화하는 것은 다만 어떤 분위기를 통해서만 우회적으로 표현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고,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 분위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그림이든 사진이든, 사람이든 꽃이든 그 색깔이 대개는 모노톤으로 처리돼 있어서 심지어 원색마저도 튀지가 않고 침잠해 보인다. 그런가하면 모노톤으로 그린 꽃그림은 꽃보다는 꽃의 실루엣(존재보다는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처럼 보인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내면적이고 내성적인, 관념적이고 명상적인 인상이며 분위기가 강하게 어필돼오는 편이다. 


여기서 작가가 그저 이런 인상이며 분위기에 끌린 것일 수도 있고, 그래서 작가의 작업이 단순한 형식논리에 대한 흥미에 의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예쁘고 아름답고 덧없고 가엽고 그리운, 희박하고 지워지고 사라지는 존재의 성정에 부합하는, 그리고 그 성정이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그리고 그렇게 형식과 내용이 합치되는 감각지점을 찾았고, 그렇게 찾아진 존재현상을 그린 것이다.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대리하는 여자, 의미와 무의미를 대리하는 라마승과 같은 존재의 이중성이며 양면성을 그린 것이며, 존재와 함께 존재의 반영(혹은 부재)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어쩜 현실로 소환된 현실의 일부로서의 비현실이며 몽환적 현실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으로 이중화면 내지 다중화면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마다 독자적인 그림이면서, 동시에 하나로 합체되었을 때는 또 다른 의미를 띠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하나의 그림 속에 다른 그림이 포함되는, 그런 일종의 이중그림이며 액자그림(그 자체 문학에서의 액자소설과도 비교되는)의 사례로도 볼 수가 있겠다. 여기서 큰 그림과 작은 그림, 겉 그림과 속 그림 간에 그 의미가 서로 부합할 수도 상충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건 그림들 간에 그리고 모티브들 사이에 상호적인 의미의 교환이 일어나고 있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의미론적 끈으로 연결된, 그런 상호작용을 매개로 그림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심화시키는 한 방법론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아름답고 덧없는, 혹은 무의미를 그림자처럼 숨겨놓고 있는 의미와 같은, 존재의 이중성 내지 양면성(양가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색 바랜 흑백사진 속 모티브를 보는 것 같은,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지우면서 현전하는 피사체와 대면하는 것 같은, 시간의 공기(입자? 질감?)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존재를 목격하는 것 같은, 그런 애매하고 모호한, 아득하고 아련한 그리움(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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