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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억/ 미래에서 온 좀비들, 진화된 존재들의 역설

고충환

서동억/ 미래에서 온 좀비들, 진화된 존재들의 역설 


서동억은 작업과 함께 생업으로 컴퓨터 관련 일을 한다. 이런 남다른 이력 탓에 진즉에 컴퓨터에 익숙한 편이고, 작업 역시 컴퓨터로부터 이끌어낸다. 작업과 생업이 서로 연동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보기에 따라선 미디어 시대에 걸 맞는 창작환경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이렇게 작가가 컴퓨터로부터 이끌어낸 것으로 치자면 키캡(컴퓨터 자판)이 있다. 키캡을 입자 삼아 하나의 전체형상을 만드는 것이며,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그런, 미디어 친화적인(?) 조형을 만드는 것이다. 형식적인 혹은 소재적인 측면에서 그렇고,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컴퓨터가 등장한 이후 세상을 온통 바꿔놓고 있지만, 그 중 가장 기본적인 경우로 치자면 이미지를 합성하는 기술이 되겠다. 그래서 합성 이미지를 주제화한다. 정리를 하자면 키캡을 입자 삼아 합성(합체)된 이미지를 조형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형된 형상으로는 페가수스(신화에 나오는 천마로서,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투사한)와 울프가 합성된 페가수스울프, 푸들과 울프가 합성된 푸들울프, 산양과 개가 합성된 산양개,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는 낙타를 조형한 카멜피쉬, 해마와 박쥐가 합성된 해마박쥐, 마치 도시의 제왕인 듯 마천루 꼭대기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귀가 큰 아프리카 여우, 과일과 꽃을 합성한 벌레잡이 식충식물 에세리아나, 그리고 히아신스와 파프리카가 합성된 히아리카가 있다. 여기서 아프리카 여우의 큰 귀는 도시의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진화된 것이고, 과일과 꽃이 합성된 식충식물(팜므파탈의 원형적 혹은 상징적 이미지?)은 곤충을 더 잘 유혹하기 위해서 진화된 것일 터이다. 그리고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도 작가는 바로 이런 진화된 존재들에 주목한다(진화된 그들의 영역이 근작의 주제다). 


진화된 존재? 아마도 그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의미는 인간이 꿈꾸는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눈앞에서 실현돼 보이는 가상현실의 매력일 것이고, 우성과 우성을 결합해 보다 강력한 신 존재를 만드는 유전자 공학의 마력일 터이다. 꿈의 산업이 불러올 장밋빛 미래라고나 할까. 그러나 섣부른 꿈은 금물이다. 어쩜 진화는 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사실일지도 모른다. 롤랑 바르트는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로 가장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는데, 어쩜 그런 신화적 사실의 한 버전이며 경우일지도 모른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작가가 진정으로 전달하고 싶은 속뜻을 이해하기 위해 그 진상을 보자. 진화된 존재로 하여금 진화하게 해주는 동력은 사실은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의 욕망이다. 보다 강력한 존재, 보다 매력적인 존재, 신 존재며 신인류를 향한 인간의 열망이다(신화적 존재는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고, 신화는 인간의 욕망이 지어낸 이야기며 욕망의 드라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왜곡된 전체주의의 망상이 도사리고 있다. 존재를 그리고 인간을 정상(말할 것도 없이 진화된 존재가 정상으로 정의되거나 재 정의될)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그리고 정상으로 하여금 비정상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작가가 조형해놓고 있는 진화된 존재들이며 사실은 합성된 이미지는 이미지 정치학을 떠올리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며, 실재가 아니다. 실재는 더 이상 문제시 되지도 않고,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재는 이미지에 의해 억압되고, 이미지가 실재를 가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미지가 실재를 삼키고, 모든 것을 삼킨다. 작가의 진화된 존재들은 이런 현실에 대한 역설처럼 읽힌다. 



장 보들리야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존재하는 양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시뮬라크라라고 했다(시뮬라크라는 원래 허구, 허상, 허깨비라는 어원을 함축하고 있고, 조형예술과 관련한 핵심개념 중 하나). 작가가 조형해놓고 있는 동물 형상들이 바로 이런 시뮬라크라들이다. 다르게는 이종과 변종들이며 비정상들이다. 보들리야르의 시뮬라크라는 그저 가상현실 상에서 허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미지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바로 의식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드는, 존재의 이면을 파고드는, 그런, 보다 근본적인 차원을 겨냥하고 있다. 그게 뭔가. 바로 욕망이다. 결국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 시뮬라크라를 생산하는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그 욕망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원형적 이야기가 신화다. 신화는 말하자면 시뮬라크라들의 고향이고 원천이며 보고다. 여기서 천마 혹은 비마는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고, 목양신은 무분별한 성적 욕망을 상징하고, 스핑크스는 수수께끼(삶은 온통 수수께끼?)를 상징하고, 천리안은 사물을 꿰뚫어보는 능력 곧 혜안과 심안을 상징한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의 게임 산업이 이런 신화적 존재들이며 시뮬라크라들 그리고 무한능력소유자들을 되살려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상현실이 현실을 대신하고, 사물화 된 인간(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들? 신인류? 초인?)이 인간을 대신하고, 무분별한 욕망이 억압된 욕망을 대신하는, 이런 게임 산업이 가장 강력한 산업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 의미심장하지가 않는가. 시대가 돌고 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신신화적 사회로 퇴행한다고 해야 할까. 그 진상은 거꾸로 읽으면 된다(마치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에서처럼). 말하자면 각각 무한능력소유자들이 무능력한 현실을 증언하고, 무분별한 욕망의 화신들이 억압된 욕망을 증언하고, 신신화적 사회가 신화의 부재와 재생산을 증언하고 있는 것. 


그렇게 작가가 조형해놓고 있는 이종들이며 변종들은 친근하고 낯선데, 그것들이 친근한 것은 알만한 동물들이 소재로 등장해서이고, 그럼에도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이질적인 것들의 무분별한 결합에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친근함과 낯설음이 공존하는 것으로 치자면 캐니와 언캐니를 들 수가 있겠다. 언캐니는 진즉에 캐니의 일부로서 잠재돼 있었고, 실재계는 상징계의 일부로서 잠수 타고 있었다. 각각 캐니가 그리고 상징계가 억압한 욕망으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잠재되고 억압된 욕망이 이중그림으로 그리고 다중그림으로 그리고 숨은 그림 찾기 놀이로 구현된 것이 초현실주의이다. 초현실주의는 말하자면 억압된 욕망(언캐니)과 소외된 현실(실재계)에 연유한 낯 설은 현실을 그린 것인데, 영화 모던타임스에 등장하는, 기계부품을 연기하는 찰리 채플린에서 그 극화된 경우를 엿볼 수가 있겠다. 고도로 자동 기술화된 사회에서 인간은 한갓 사물로 변질(사물화)되고, 시뮬라크라로 변질된다. 보들리야르의 시뮬라크라는 바로 이렇듯 인간의 사물화(페티시즘)며 사물화 된 인간을 겨냥한다. 


그러므로 작가가 조형해놓고 있는 이종들이며 변종들은 바로 이렇듯 사물화 된 인간의 역설적 알레고리들이라고 보면 되겠다. 역설적 알레고리들? 그것들은 키캡 곧 입력키 혹은 명령키를 세포 삼아 구조화돼 있다. 그래서 몸체의 아무 키나 누르면 마치 자동기술화 사회를 수행하는 자동인형처럼 작동할 것 같고, 최소한 움직일 것 같다. 그래서 단자들 하나하나는 마치 전체주의의 세포단위들 같다. 외부로부터의 명령에 일사불란한 군중들이며 잘 훈련된 군대 같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이상으로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로는 신화와 진화를 들 수 있겠다. 여기서 신화와 진화는 마치 짝패처럼 혹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간다. 진화가 곧 신화일 수 있다는 말이다. 진화는 어쩜 과학적 사실도 생물학적 사실도 자연적 사실도 아니다. 인문학이 발명한 가장 교묘하고 정교한, 그러면서도 알고 보면 허술한, 그런 인공물이고 공작품일 수 있다. 이미지가 현실을 대신하고, 이미지가 현실을 삼키는 현실에서 현실은 곧 이미지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어쩜 의식을 넘어 무의식에 아로새겨진, 감각적 대상을 넘어 인식론적 표면에 프린트 된, 무슨 홀로그램처럼 불가지(지각되지도 인식할 수도 없는) 앞에서 아롱거리는 이미지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를 숨겨놓고 있는 현실의 역설적 증언일 수 있고, 정상은 비정상을 억압하는 현실의 반어법적 인정일 수 있다. 작가의 신화적 존재들이며 진화된 그들이 이런 역설적이고 반어법적인 현실이며 현실인식을 침묵으로 혹은 무표정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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