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노신경/ 시간의 풍경과 내면풍경, 그리고 관념적인 풍경

고충환

노신경/ 시간의 풍경과 내면풍경, 그리고 관념적인 풍경



동물은 순간을 살고, 인간은 시간을 산다는 말이 있다. 시간은 인간의 발명품이라고도 했다. 동물에게 순간은 부분이 아닌 전체이기에, 매번 순간이 전부이기에, 매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고, 여기에 의미가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 반면 시간은 순간과 순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깊고, 순간을 지속을 위한 한 계기로서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이처럼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이러저런 파생개념들, 이를테면 관계에 대한, 사이에 대한, 지속에 대한, 흐름에 대한, 원인과 결과 곧 인과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가 가능해진다. 시간을 시간 자체로서보다는 의미화를 위한 한 과정으로 보고, 순간을 순간 자체로서보다는 지속된 흐름의 한 지점이며 계기로서 보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에게 순간은 현재에 정박하게 해주는 당위로서보다는, 도래할 시간이며 미래의 사건을 예비하고 예시해주는 의미의 씨앗이 된다. 



이로써 기다림 곧 도래할 시간이며 미래의 사건에 대한 지향은 인간의 숙명이 된다. 어쩜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이랄 수 있을 것인데, 유독 인간에게 현실은 과거를 되불러오고 미래를 지향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향수와 회고, 배신과 복수, 화해와 용서, 변화와 혁명의 계기로서만 의미를 갖는다(여기에 인간 삶의 드라마가 있다). 그러므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어쩜 인간에게 진정한 현실인식(엄밀하게는 현실 자체)은 없다고도 얘기할 수가 있게 된다. 현실을 현실 자체로서보다는 의미화의 한 과정으로 보고, 시간을 사는 대신 시간을 헤아리는 동물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예술을 원초적인 행위이며 상황논리의 표현으로 본다면, 시간을 헤아리는 행위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예술표현이 된다. 이로써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시간을 가시화하려는 시도들이 예술의 명분으로 호명되는 이유도 덩달아 설명할 수가 있게 된다. 




이처럼 의미화의 동물인 인간에게 기다림은 숙명이라고 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기다림은 여성의 운명과 관련이 깊다.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기다림의 또 다른 형식인 그리움으로 목이 길어진, 물레질이나 바느질로 날밤을 새는, 동서양을 통 털어 발견되는 여성주체의 생활사 내지 여성신화들이 이런 운명을 증언해준다. 그리고 그렇게 여성주체가 찾아낸 것이 바느질이며 자수다. 자수는 말하자면 기다림의 표상이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고스란히 침전된 기다림의 물적 형식(기다림이 육화된 형식?)이면서, 기다리는 시간 자체를 의미화하고 의식화한 자기반성적 사유의 결과물이다. 시대며 세태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인간에게는 그리고 특히 여성주체에게는 여전히 이런 기다림의 DNA(원형적 DNA?)가 유전된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정도와 경우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시간에 물적 형식을 부여하는 예술표현은 이런 인간의 근원적 자의식(시간을 사는 대신 시간을 헤아리는)과 관련이 되고, 특히 여성주체의 성적 정체성(기다림의 자의식과 표상)에 연동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시간에 물적 형식을 부여하는 예술표현)은 그대로 시간을 매개로 관계에 대한, 사이에 대한, 지속에 대한, 흐름에 대한, 그리고 어쩜 인과에 대한 존재론적 자의식을 표상하는 노신경의 작업과도 관련이 깊다. 박음질을 매개로 시간 자체와 시간으로부터 파생되는 개념 군들을 조형하고 형식화한 것이며, 그 이면에서 작가 자신의 자의식을 반영하고 여성 고유의 성적 정체성을 암시한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자수에는 기다림이 육화된 시간이며 기다림을 표상한 시간개념이 탑재돼 있다. 전통적인 자수에는 말하자면 외관상 서로 다른, 그러면서 이면에서 하나로 통하는, 그런 조형의지가 공존한다. 소재 자체를 조형하는(그 자체 소재주의로 부를 만한) 의지와 함께, 소재와는 무관하게 시간을 조형하는(어쩜 존재론적 자의식에 더 가까운, 시간을 헤아리고 기록하고 물화하는) 의지가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는 것이다. 






inbetween 0519, sewing on the Korean paper, 50 x 60.6 cm, 2014





노신경의 작업이 그렇다. 비록 시대도 재료도 방법도 바뀌었지만 그의 작업에는 이런 전통적인 자수의 정신성 내지 형식논리가 고스란히 보존되고 변주되면서 또 다른 형식을 얻고 있다. 화면을 수틀 삼아 소재를 조형하고 시간을 조형하는 것.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장지에 채색을 하고 그 위에 재봉틀로 박음질을 하는데, 채색과정과 박음질 과정이 상호 긴밀하게 어우러져서 굳이 두 층위를 구분할 수도 없거니와, 나아가 아예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하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자수의 수틀에서처럼 화면은 그 자체 어떤 소재에 바쳐진 조형의지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주체의 아이덴티티와 동일시되는 육화된 형식이 구현되고 실현되는 장이다. 그 자체 작가의 인격이 분유된 한 부분인 것이며, 자족적인 한 세계인 것이다.


 


여기서 박음질이라는 방법론이 의미심장하다. 바로 시간을 표상하는 것인데, 박음질에 의해 수놓아진 한 땀 한 땀의 박음질 자국은 시간의 한 계기로서의 순간들을 의미하고, 그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을 이룬다. 그러나 그렇게 이루어진 시간의 궤적은 연속적이지도 선형적이지도 않다. 연속적인가 하면 분절적이고, 분절되다가도 새롭게 연이어진다. 연접(일관성의 한 계기로서의 접속이 이루어지는)과 이접(차이를 만들기 위한 한 계기로서의 접속이 이루어지는), 단절과 분절 같은 시간과 관계의 계기들이 하나의 층위로 섞이면서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다만 무한순환을 반복할 뿐인, 그런 비연속적이고 비선형적인(그리고 어쩜 카오스적인) 시간 개념을 열어놓는다. 여기에는 다소간 자동기술적인 일면이 있고, 우연을 조형을 위한 적극적인 한 계기로서 도입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생체리듬과 느낌의 강도와 같은, 사사로운 경험의 성분들이며 지점들이 간여된다.  



말하자면 박음질 자국은 호흡의, 느낌과 감정의, 의식과 무의식의 물화되고 육화된 형식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박음질 자국은 마치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의식의 부름에 따라서 시간이 임의로 재편되는)에서처럼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뒤섞이고, 베르그송의 지속에서처럼 느낌의 강도에 따라서 시간은 빠르게도 그리고 느리게도 흐른다. 물리적인 시간, 연속적인 시간, 선형적인 시간개념 대신 부침하는 의식과 무의식, 느낌의 강도, 그리고 호흡의 질에 따라서 재편되고 재구성되는 시간개념(어쩜 주관적인 층위에서의 시간경험)을 열어놓는 것. 이를테면 명상할 때의 호흡과 깊은 한숨 그리고 불안정할 때의 호흡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며, 작가는 그 다름과 차이를 낱낱이 박음질 자국으로서 기록해놓고 있는 것이다(아마도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어쩜 시간의 결과 함께 이런 호흡의 질감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한 자락이 연과 연기설에 맞닿아 있다. 나와 네가 만나지는 확률에 대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식을 증언해주고 있다. 




작가는 이처럼 박음질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혹은 헤아리듯 시간을 조형한다. 그리고 소재적인 측면에서 풍경을 조형한다. 풍경이 표면에 드러난 조형이라고 한다면, 시간은 그림의 이면에 잠재된 조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렇게 표면적인 조형과 잠재적인 조형이 하나의 층위로 어우러져서 상호작용하는, 그런 그림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풍경적인 요소로 치자면, 마치 정적인 수면 위로 연잎이며 연꽃이 다소곳한 정경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어귀를 보는 것도 같다. 소소한 바람이 불어와 수면에 잔잔한 파문을 그리고 있는 것도 같고, 바람이 공기의 밀도를 조율하는 것도 같은 풍경들이다. 전통적인 미덕으로 치자면 기운생동 중 특히 운율이 감지돼오는(기가 남성적 기운이라면, 운은 여성적 기운에 가깝다), 그런 풍경들이다. 작가의 전작이 추상적이라고 한다면, 근작에서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이런 재현적이고 풍경적인 요소가 강조된 느낌이다. 



여기서 00같은, 다소간 유보적인 표현에 주목할 일이다. 그림에서의 풍경은 풍경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결정적인 풍경은 아니다. 그 자체 결정적인 풍경이라기보다는 보는 이 저마다의 관심사나 이해관계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읽히는, 그런 열린 의미구조를 가지고 있는 풍경들이다. 암시적인 풍경이라고나 할까.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라고 했다. 그려진 것을 통해서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이로써 관객이 사사롭게 간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며, 관객이 저마다의 해석으로 그림의 의미구조를 완성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어쩜 그 여지며 계기야 말로 그림의 전통적 미덕 가운데 하나인 여백의 또 다른 의미이며 진정한 의미일 수 있다. 작가는 그렇게 암시적인 풍경이며 내면풍경을 그려놓고 있었다. 



내면풍경이라고 했다. 내면풍경 자체는 재현적인 풍경보다는 관념적인 풍경에 가깝다. 이러저런 관념을 표상한 것인데,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일련의 띠 그림들이다. 작가는 장지에 바로 박음질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 알록달록한 조각 천을 박음질해 조형의 일부로서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렇게 도입된 조각 천으로 치자면 단연 공단이 많은데, 천 같지 않게 번쩍거리는 표면질감과 화려한 색감 그리고 여기에 섬세하게 수놓아진 자잘한 문양들이 어우러져서 여성적인 감수성을 표현하고 전달하기에 그만인 소재 같다. 작가는 그 조각 천이 화면을 세로로 종단하는 띠 그림을 그렸다. 때로 띠 그림은 자투리 천을 박음질해 세로로 층층이 탑을 쌓듯 쌓아올린 형태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어느 경우이든 중심성이 강한 구도가 두드러져 보이는데, 아마도 내적 질서의식을 표상할 것이다. 색동천에 반영된 전통적인 미감과, 탑 혹은 탑돌이로 나타난 기다림의 미학(기원은 결국 기다림의 한 형태이며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 그리고 여기에 내적질서라는 푯대를 마련해놓고 싶었을 것이다(어쩜 중심을 잡고 싶다는 바램의 무의식적 발현일 수도). 



작가는 그렇게 시간의 풍경과 내면풍경 그리고 관념적인 풍경이 하나의 층위로 어우러진, 그런 비결정적이고 암시적이고 관조적인, 그리고 아마도 여성적인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