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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태/ 멀찌감치, 그리고 가까이 더 가까이

고충환


몽타주, 부엉이, 45 x 31 x 30 cm, 스테인리스 스틸, 2015


김인태/ 멀찌감치, 그리고 가까이 더 가까이 


김인태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으로 치자면 본다는 것의 문제를 들 수가 있겠다. 외관상 드러나 보이는 양상은 다르지만, 개념미술에 바탕을 둔 전작에서나 조형에 방점이 찍힌 근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언제나 보는 것을 문제시한 것이었다. 작가에게 보는 것의 문제는 조형의 기본이었고(그래서 조형예술을 시각예술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한다는 것의 문제에 연동된 것이었다. 보면서, 동시에 인식하는 것.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사실은 인식론적 문제인 것. 


전작에서 보면, 얼굴의 좌우측면을 하나의 평면 위에 펼쳐놓아 시각의 한계를 확장시킨 것이나, 두 개의 얼굴이 하나로 포개진 이중그림을 통해 보는 것은 결국 관점과 욕망에 연동된 것임을 주지시킨 것이 그렇다. 보는 것은 결국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이미 인식된 것을 보고, 아는 것을 본다. 그리고 사실은 혹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이처럼 주체의 자의식에 연동돼 있다. 곤충(잠자리?)의 눈 구조를 모방해 만든 일종의 거울 눈을 통해 피사체가 다중적으로 혹은 다면적으로 분열돼 보이게 한 것이나, 셀프카메라(자기를 향한 캠)와 모니터를 매개로 자기가 자기를 보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연출해 자기는 자기를 볼 수 없다는, 다만 타자의 눈이며 욕망을 경유해서만 자기를 볼 수 있을 뿐이라는 실존주의적 자의식을 비틀어 보인 일련의 작업들이 이런 보는 것과 자의식이 연동된 문제를 다룬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다면, 근작에서 보는 것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현상하는가. 외관상 작가의 근작은 개념보다는 조형에 방점이 찍힌 것이고, 그럼 만큼 보는 것의 문제의식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의 근작은 한눈에도 곰, 호랑이, 사자, 말, 코뿔소, 상어, 그리고 복어와 같은 동물들을 소재로 한, 작가의 말마따나 차갑지만 따뜻한 느낌의 조형물들이다. 여기서 조형이 차가운 것은 스테인리스스틸의 금속성의 소재를 재질로 한 탓이고, 그럼에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정교하고 섬세한 손맛(스킬?)이 금속성의 재질감을 완화하거나 상쇄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멜레온 도료를 조형의 표면에 도포해 환상적인 표면질감을 연출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의 조형을 멀찌감치 보면 동물들이 보인다. 


여기서 작가는 조형물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동물형상은 사실은 자잘한 입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형태를 이룬 것으로 드러나는데, 그 입자들로 치자면 나비와 동그라미 그리고 물결패턴(물고기?)들이다. 나비형태의 입자들이 모여 동물형상을 만들고, 동그라미 형태의 입자들이 모여 복어형상을 만들고, 물결패턴이 모여 상어형태를 만든다. 하나의 단위구조가 모듈이 돼 반복 증식되는 과정을 통해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조형한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 그 자체 일종의 소우주랄 수 있는 세포들이 모여서 인간을 만들고 생명을 만들고 존재를 만드는 것. 여기서 동그라미 형태의 입자는 아마도 복어의 비늘을 조형한 것이고, 물결패턴은 상어가 유영하는 바다 속 정경에 착안한 것일 터이다. 


문제는 나비형태의 입자들이다. 작가는 특히 나비에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왜 하필이면 나비일까. 나비는 알에서 애벌레로 그리고 재차 번데기를 거쳐 최종적으로 나비로 변태된다. 작가가 나비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렇듯 변태에 있다. 그저 자기변신으로서보다는 하나의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다중적인 측면들을 보라는 주문이며, 관점에 따라서 하나의 사물대상도 얼마든지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인식이 그 이면에 깔려있다. 그렇게 자신의 조형을 멀찌감치 보고, 그리고 재차 가까이 다가가서 보라는 작가의 주문에는 이런 인식이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삶이 꼭 그럴 것이라는 코멘트(이를테면 삶의 다양성이며 존재의 다면성과 같은)도 함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나비가 갖는 상징성이다. 나비는 꿈을 상징한다. 나비는 말하자면 애벌레의 꿈을 상징한다. 그리고 환영을 상징하기도 한다(하늘거리는, 그리고 나풀거리는 나비의 날갯짓만큼이나 비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없을 것). 이로써 혹 조형이, 존재가 통째로 꿈이며 환영일지도 모른다. 삶이 송두리째 일장춘몽일지도 모른다. 나비들이 풀풀 날아가 버리면(마치 픽셀이 해체되면서 덩달아 형체도 해체되는 디지털이미지에서처럼), 그러면, 손에 잡힐 듯한 실체는 무엇이고, 믿어 의심치 않던 실재는 어떻게 되는가. 작가가 굳이 나비를 입자 삼아 형상을 조형한 이면에는 이런 삶에 대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자기반성적 성찰이, 모든 견고한 것들을 허무는 성찰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표면적으론 무거운 걸 가볍게, 그리고 차가운 걸 따뜻하게 느껴지게끔 유도하려는 일종의 연금술적 기획 내지 발상이 작용하고 있겠지만, 이와 더불어서 환영을 매개로 실재(감각적 실재?)를 재고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안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몽타주, 사자, 130 x 100 x 32 cm, 스테인리스 스틸, 2015



작가의 조각은 이처럼 각각 동그라미와 물결패턴 그리고 나비를 입자삼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형상을 일구는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입자들은 단위세포에 해당하며, 이런 단위세포의 집합으로 우주가, 생명이, 존재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아마도 사회도.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는 세계를 그리고 삶의 양태를 구조와 패턴으로 이해하는 구조주의자의 일면이 있다. 이렇듯 일종의 구조주의 조각으로 명명할 만한 작가의 조각은 널리 알려진 조각의 형식논리로 치자면 투각에 해당한다.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는 점에서 그렇지만, 단위세포를 일일이 용접해 엮어나간 과정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직조인 만큼 형식과 방법이 중요하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남다른 스킬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 스킬(도구?)을 매개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질문(어쩜 주제?)에 감각적으로 답하는 것일 터이다. 


아마도 이런 답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인데, 조각으로는 드물게 일종의 이중조각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이중그림과 액자소설처럼 회화와 문학에는 하나의 형식논리로 알려져 있지만). 복어형상 속에 스테인리스스틸 구를 넣어 마치 복어가 알을 품고 있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에 맞춰진 작가의 주제의식으로 되돌아가 보자. 말하자면 복어가 품고 있는 알을 적어도 외관상 실제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엑스레이 필름과도 같은 일종의 투시법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어의 몸통 속엔 아마도 치어들이 떼 지어 작은 상어 형태를 이룬, 그런 파란색으로 채색된 형상이 들어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마치 상어가 파란 물결 속을 유영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상이 아닌 조형인 만큼 실감을 따지기보다는 정황적으로 이해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 가시화할 수 없는 것을 가시화한 것이다. 복어가 품고 있는 생명을 가시화한 것이고, 상어의 꿈을 가시화한 것이다. 일종의 암시의 기술이 시도되고 있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실제로도 예술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런 암시의 기술이 결정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명도 꿈도 그 자체로는 색깔도 형태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작가는 어쩜 그 자체로는 감각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관념을 조형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본다는 것의 주제의식을 되새길 일이다. 이 일련의 이중조각은 진정으로 보고자 한다면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볼 수도 있고, 절실하면 존재의 원형(하이데거 식으론 존재의 존재다움)에 가 닿을 수도 있다는 전언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본다는 것의 문제며 인식론적인 문제(결국 이미지는 보는 것인가 아니면 읽는 것인가, 라는 문제로 귀결될)를 개념으로 그리고 조형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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