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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섭 / 마치 천일야화에서처럼, 이야기들의 무한연쇄를 열어놓는 조각

고충환

오광섭 / 마치 천일야화에서처럼, 이야기들의 무한연쇄를 열어놓는 조각


  한국 현대조각의 현실에 견주어볼 때 오광섭의 조각은 이례적이다. 우선 그는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키웠다. 카라라는 말하자면 작가의 모색기에 일종의 산실 역할을 해준 곳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카라라는 대리석 산지로서, 예나 지금이나 돌조각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만큼 이곳에 유학한 한국작가들 중 대개는 석조를 베이스로 한 작업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주조형식의 조각을 취하고 있고, 그것도 가장 전통적인 밀랍주조 형식의 조각을 취하고 있다. 전통적이라고 해서 아카데믹한 조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방법이 전통적일 뿐, 그의 조각은 전통적인 조각과는 거리가 멀다. 주조방법 중에서도 밀랍주조는 세부가 살아있는 섬세한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만큼 지난한 노동과 장인정신이 요구된다. 이런 장인정신과 함께 작가적 상상력이 결부된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를 개발하고 정립한 경우라고 해야 할까. 



마테리얼 걸 (Material Girl), 26.2 x 29.2 x h32.5 cm, 브론즈, 2015


  방법이 전통적인 만큼 그의 조각은 금속(브론즈) 재질에도 불구하고 금속 특유의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조과정에서 작가의 손 감각에 순응했을 밀랍 재질의 부드러운 느낌과 자국이 여실하고, 여기에 온기마저 전달된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은 분명 금속성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의 조각은 말하자면 세부가 살아있어서, 그 세부를 들여다보는 맛이 있다. 어떤 이야기를 숨겨놓고 있어서 그 이야기를 발굴하고 재구성하는 재미가 있다. 여기에 흔히 조각이 겨냥하고 있는(특히 한국에서) 개념적이거나 기념비적인 느낌보다는 정겨운 인상이다. 그리고 무슨 연금술사처럼 금속재질을 마치 흙이나 밀랍을 주무르듯 하고, 이로써 날카롭고 단단한 재질을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의 재질로 변질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이례적인 경우로 치자면, 작가의 조각은 탈모더니즘적이다. 알다시피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장르적 특수성에서 조형의 당위성을 찾는다. 이를테면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회화의 본질에서 회화의 당위성을 찾고, 조각을 조각이게 해주는 조각의 본질에서 조각의 존재의미를 찾는다. 본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본질주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조각의 경우에 그 본질은 흔히 물성과 양감과 같은 형식요소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일종의 형식주의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재질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서 다가오는 양감 곧 덩어리를 제안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조각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엔 재현과 서사, 의미내용과 이야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작가의 개성을 위한 자리도 없다. 정리를 하자면 물질적이고 형식적인 조각, 나아가 몰개성적인 조각이야말로 모더니즘 조각의 도그마에 부합하는 경우랄 수 있겠다. 

  작가의 조각은 이 모든 예에서 벗어나 있다. 구상이면서도 아카데믹한 조각과 다르고, 재현과 서사, 의미내용과 이야기를 강조한 것이, 그리고 여기에 유기적인 덩어리 대신 부분과 부분의 집합(무분별한? 유기적인? 우연한?)으로 구조화된 형식이 모더니즘패러다임을 수행하고 있는 물성조각이며 추상조각과도 다르다. 작가의 조각은 말하자면 아카데미조각에도 부합하지 않고 모더니즘조각으로도 범주화되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작가의 조각은 어떻게 자리매김 될 수가 있는가. 아카데미와 모더니즘, 구상과 추상, 형식과 의미내용과 같은 조형과 관련한 성과의 지점 지점들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합류되어지는 어떤 지점, 그리고 그렇게 새로이 생성되어지는 어떤 지점, 마치 형식의 깔때기 내지 서사의 깔때기에 비유할 만한 그런 제3의 어떤 지점을 가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워있는 철인(鐵人), 33 x 43.8 x h31.6 cm, 브론즈, 1994


  작가의 조각에서 받는 첫인상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서보다는 부분과 부분의 집합으로 구조화돼 있다는 점이다. 형식도 그렇거니와 서사도 그렇다. 작가의 작업이 일종의 관계의 미학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말이다. 관계의 미학? 어떤 부분과 부분이 어떻게 관계 지워지는가에 따라서 형식도 서사도 그리고 의미내용도 결정된다. 그런데 그 부분과 부분이 만나지는 관계는 얼핏 무분별해 보이고 우연해 보인다. 그러면서 희한하게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다. 크고 작은 기계뭉치와 사람형상이, 새와 곤충 그리고 동물과 같은 유기적인 형태가 결합하고, 집이나 건축물과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가 잡다한 그리고 그 출처며 쓰임새가 아리송한 고철조각과 결합된다. 그렇다면 작가의 조각은 흔히 고철조각으로 알려진 정크아트를 실현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그 자체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재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 말고, 작가의 조각은 정크아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각각 정크아트는 시간을 증명하고 있는 물성(이를테면 녹 슨 철판과 같은) 쪽에, 그리고 작가의 조각은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며 서사 쪽에 방점이 찍힌다. 

  그리고 그렇게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것들이 우연하게 결합된 것 같은 조형이 어떤 골동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조각은 말하자면 벼룩시장(우리로 치자면 황학동)과 같은, 그 자체 일종의 추억의 집이며 기억의 아케이드랄 수 있는, 아득하고 아련한 시간의 자장 속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먼지를 헤집고 시간의 지층 속을 배회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렇게 일종의 유사 고고학적(기계주의 시대에 해당하는 가까운 근대?) 발굴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향수의 출처는 무엇이고 그 정서는 어디에 연유한 것인가. 바로 초현실주의에서 그 출처며 연유를 찾을 수가 있겠다. 알다시피 초현실주의는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며, 기계주의 시대가 속한 가까운 근대에 매료됐던 이즘이고, 시인으로 치자면 보들레르 그리고 이론가로 치자면 발터 벤야민(시간을 거니는 만보가 내지 가까운 근대를 소요하는 산책자)과도 공유하고 공감되는, 그런 인문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도 그렇지만, 특히 부분과 부분의 이질적이고 무분별하고 우연한 집합은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알려진 바와 같이 사물의 전치는 외관상 이질적이고 무분별하고 우연하게 사물과 사물을 관계지우는 기술을 말하고, 이로부터 예기치 못한 의미, 다른 의미며 차이 나는 의미를 파생시키는 기술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파생되는 제3의 의미를 통해 잠자고 있는 의식, 말하자면 무의식이며 잠재의식을 캐내고 싶고, 의식의 원인을 발굴하고 싶다. 그렇다면 작가의 의식 속엔 어떤 원인이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가. 작가의 조형엔 어떤 무의식이라도 잠재돼 있는가. 유년의 기억(예컨대 장난감과 깡통로봇에 대한 추억), 전통적인 아이콘(거북비와 석등, 향로와 수레바퀴), 이국적인 아이콘(실크해트와 팬파이프), 자연에서 받은 인상, 신화와 전설(예컨대 이성을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종교적인 신념(성당 혹은 성소를 연상시키는 건축물과 촛대), 그리고 문명 혹은 사회비판적인 자의식(주로 직설법으로서보다는 알레고리 곧 일종의 우화 내지 우의화의 형식을 빌린),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존재가 유래했을 일종의 원형의식 내지 원형적 그리움과 같은, 한마디로 타자로부터 건너와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것들 일체가 하나로 버무려져 있다. 

  그것들은 그렇게 작가의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혹은 일종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외화 되면서 조형의 형식을 덧입고 자기를 실현한다. 그렇게 무의식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은 논리적이기보다는 비논리적(논리를 뛰어넘는 도약?)이고, 합리적이기보다는 비합리적(상식을 넘어서는 비약?)이다. 초현실주의로 치자면 자동기술법 내지 자유연상기법에서처럼, 그리고 문학으로 치자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에서처럼 우연하고 무분별하게 관계되고, 이질적이고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결합된다. 그래서 작가의 조형은 어쩜 어떤 결정적인 의미며 닫힌 체계를 지향하기보다는, 비결정적이고 열린 의미체계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물이 결정적인 의미로 경화되기 이전의 사물 자체를, 존재가 인식론적 틀로 결정화되기 이전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하이데거는 존재 혹은 존재자와 존재 자체를 구분한다). 의미화 되기 이전의 사물 자체, 존재 자체, 세계 자체와 만나고 싶고 대면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비결정적인 의미를 향해 열린다. 하나의 의미는 또 다른 의미를 부르고, 하나의 서사가 또 다른 서사를 불러들인다. 꿈이 현실을 부르고, 현실이 꿈에 연동된다. 의식이 무의식을 암시하고, 무의식이 의식을 밀어 올린다. 그리고 그렇게 의미와 의미가, 서사와 서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이어지면서 의미가 부풀려지고 서사가 팽창된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무분별한 이야기들의 무한연쇄구조에 바탕을 둔 하이퍼텍스트며, 무분별한 이야기들의 무한연동체제를 실현하고 있는 하이퍼링크에서 예시되고 있는 이야기구조와도 무관하지가 않겠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무슨 천일야화(이야기의 끝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그래서 영원히 끝나지도 끝낼 수도 없는 이야기)에서처럼 이야기들의 연쇄를 풀어놓는다. 무의식에 잠자고 있던 서사의 고리를 끊어, 무의식(억압된 욕망?)의 자기실현을 돕는다. 그리고 그렇게 서사적인 조각이며 문학적인 조각(이야기하는 조각?)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미술관 개념이 작가의 조형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는데 일정한 도움이 되겠다. 사람들은 저마다 미에 대한 기준을 머리에 이고 다닌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미의식을 가지고 있다. 무슨 말인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의식이 이미 조형이고, 상상력이 이미 형상이라는 말이다. 작가의 조각은 마치 작가의 머릿속을 그대로 쏟아놓은 것 같다. 그렇게 쏟아져 내린 사색의, 기억의, 추억의, 신념의, 태도의 편린들이 관객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관심사가 다르고 인문학적 배경이 다르다. 그렇게 다른 배경에 가 닿으면서(여기서 작가는 의미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에 비유된다) 작가의 조각은 저마다 다른 의미들을 덧입고 환생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풍경조각, 서사조각을 하나로 아우르면서, 특히 유독 한국적 현실에서 귀한 초현실주의를 자양분 삼아 조형의 그리고 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는다. 꿈과 현실이, 상상력과 현실이, 의식과 무의식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합류돼 흐르는 어떤 지점을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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