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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 / 선혈처럼 붉은, 침묵보다 어두운

고충환

마크 로스코 / 선혈처럼 붉은, 침묵보다 어두운


미술사적 배경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거나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 미국 뉴욕은 현대미술의 메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소위 모더니즘패러다임으로 대변되는 미국 발 추상미술의 이론적 초석을 놓은 클레멘테 그린버그와 헤롤드 로젠버그로 알려진 두 평론가가 있다. 세부적으로 클레멘테 그린버그가 엄격한 형식주의자라고 한다면, 헤롤드 로젠버그는 상대적으로 감성주의자라고 하는 차이를 견지한 점이 다르다. 그 차이는 그린버그가 명명한 뉴욕색면화파와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로젠버그가 리드한 액션페인팅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부연하면, 모더니즘패러다임은 로젠버그보다는 그린버그의 형식주의를 대변하는 논리로서, 장르적 특수성을 강조한 점이 눈에 띤다. 말하자면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회화의 당위성을 회화의 본질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본질은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적인 요소와 특히 평면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귀결되고, 따라서 재현과 서사 그리고 표현과 같은 전통적인 개념을 위한 자리가 없고, 심지어는 창작주체의 개성이 간여될 여지마저 없다. 철저하게 형식적인 회화, 익명적인 회화, 몰개성적인 회화를 추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추구는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 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동어반복적인 전언으로도 확인된다. 그림은 다만 그림일 뿐, 어떤 의미를 위한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회화란 이러저런 일화를 그린 것(재현적인 것)이기 이전에 특정의 색깔들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인상파의 한 분파인 나비파의 화가 모리스 드니의 말과도 통한다. 그린버그가 인상파를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도 알고 보면 바로 여기에 있다(알다시피 인상파 그림은 자잘한 터치들이며 중첩된 평면들로 환원된다). 

마크 로스코, 캔버스에 오일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화가로서 잭슨 폴록, 바넷 뉴먼, 윌렘 드쿠닝, 마크 로스코를 예로 든다. 돌이켜보면 잭슨 폴록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에 가깝고, 바넷 뉴먼은 색면화파에 그리고 윌렘 드쿠닝은 액션페인팅에 가깝다. 바넷 뉴먼만이 엄밀한 형식주의라는 그린버그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마크 로스코는 어떤가. 그는 색면화파인가. 그의 그림은 엄밀한 형식주의를 수행하고 있는가. 굳이 따지자면 그의 그림은 외관상 색면으로 환원됨으로 색면화파로 범주화된다. 그리고 표현이 내면적인 파토스를 의미하고, 추상표현주의가 내면적인 파토스를 추상적인 형식으로 그려낸 그림을 의미한다는 전제 하에서 추상표현주의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로스코의 그림은 각각 색면화파와 추상표현주의를 통해 의미하고자 했던 그린버그의 엄격한 형식주의를 실현하고 있는가. 여기에 문제가 있다. 로스코의 그림을 색면화파로 분류하기에는 감성적이고(그린버그는 색면화파가 파토스보다는 에토스에 부합하기를 바랐다), 추상표현주의를 감성적인 그림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린버그 자신의 형식주의에 대한 요청과 충돌한다. 그의 그림은 말하자면 외형상 색면화파로 그리고 추상표현주의로 범주화되면서도, 한편으로 이 말로서 그린버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엄격한 형식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린버그의 형식과 로젠버그의 감성이 만나지는 접점에 로스코의 회화가 위치한다고나 할까. 그린버그가 헛짚었다고 볼 일은 아니지만, 이보다는 차라리 우리에겐 스승도 부모도 없었고 우린 언제나 혼자였다는 작가의 고백에서처럼 자신이 범주화되는 것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만의 형식을 추구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침묵하는 회화, 말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그림

 

  심장박동, 열정(파토스), 동맥혈, 마당에 세워둔 자전거에 슨 녹, 폭풍처럼 번지는 불, 루소의 태양(루소가 그린 원시림 속에 달처럼 떠있는), 들라크루아의 깃발(잔 다르크가 민중을 이끌면서 손에 들고 있던), 엘 그레코의 예복(접신의 황홀경을 색깔로 환원해놓은 것 같은 노란색), 피렌체 대리석(마치 피부와도 같은), 원자의 섬광, 면도하다가 벤 자국, 면도거품 속의 피, 러시아 국기(작가는 러시아 태생이다), 나치 깃발(집단무의식? 전체주의의 광기?), 중국 국기(마오주의?), 용암, 바다가재, 전갈, 내장, 불꽃, 죽은 야수파 화가들(마티스도 로스코처럼 색채 화가였다), 손목 긋기(로스코는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피로 그린 그림으로 별칭 되는 선혈처럼 붉은 그림을 그린 후 면도칼로 동맥을 그어 자살했다), 싱크대에 흐르는 피, 사탄...내 예술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살아서 숨 쉰다. 이게 형식주의자의 자기고백이며, 형식주의적인 그림에 대한 설명일 수 있는가. 로스코의 그림은 추상이 아니었다. 삶의 응축된 표현이었고, 생명주의(바이탈리즘)를 그린 것이었다. 

  비극적인 경험만이 예술의 유일한 원천이다. 나는 오로지 비극, 황홀경, 운명처럼 근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고백에서처럼 그의 그림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색깔로 환원해놓은 것이며, 침묵하는 색깔로 응축해놓은 것이다(침묵이야말로 가장 명확하다). 근본적인? 말과 침묵은 같은 뿌리다. 말은 수많은 진실을 속이고 자극하고 상처 입히며 우리가 사는 이유를 설명한다(재현적인 회화는 설명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침묵(추상? 근본적인 색깔?)으로 끝나고, 바로 그처럼 말(설명)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임은 비로소 시작된다고 하는 마임이스트 마르셀 마르소의 침묵이 바로 그 근본적인 지점이다. 말이 생성되는 곳이며, 말이 침전되는 곳이다. 말없이 말해지는 곳이다. 마임이 말없이 말을 하는 것처럼, 로스코도 재현 없이 말을 하고 서사 없이 말을 한다. 재현도 서사도 없는 말이란 무슨 의미인가. 의미를 넘어선 말이고, 인식론적 대상을 넘어선 말이고, 특정의 의미에 정박되지 않는 말이고, 부유하는 말이며, 뿌리 없는 말이다. 

  이런 뿌리 없는 말로 인해 로스코의 그림은 문학적이다. 재현도 없고 서사도 없는데, 문학적이다? 그의 그림은 꼭 무슨 풍경 같다. 더러 세로로 그린 그림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가로로 그린 그림들이 많다. 그림에는 가장자리도 있다. 그 가장자리가 꼭 무슨 창문 같다. 그래서 마치 창문을 통해 본 풍경 같다. 그 풍경에는 가로로 연장된 지평선이며 수평선도 있다. 수학자이자 사상가인 파스칼은 수식의 끝에서 무한공간으로 열린 선을 만난다. 그리고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가 창을 통해 본 풍경은 아마도 내면풍경일 것이고, 삶과 죽음, 현세와 내세, 유한과 무한, 인식론적 대상과 불가지가 만나는 경계의 풍경일 것이고, 무한으로 열린 풍경일 것이고, 침묵하는 풍경일 터이다. 더러 다른 색깔들이 없지 않지만, 그 풍경을 이루는 색깔은 대개 붉은 색과 검은 색 사이의 스펙트럼에 해당하는 색상을 보여준다. 그 한쪽 끝에 붉은 색이 그리고 다른 쪽 끝에 검은 색이 있다. 그렇게 피와 생(바이탈리티)이 죽음의 색깔과 대비되고, 말이 침묵과 대비된다. 로스코는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킬 거라고 했다. 죽음이 생을 삼키고 침묵이 말을 삼킬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프로이센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이 자행한 학살현장을 그린 그림으로 프란시스코 고야의 검은 그림 시리즈가 있다. 로스코가 그린 블랙은 이런 이성이 마비된 시대를 상징할 수도, 파스칼이 마주한 무한공간을 상징할 수도, 말이 끝나고 침묵이 시작되는 경계를 상징할 수도 있겠다. 


마크 로스코, 캔버스에 오일


  이 모든 계기며 갈래들이 모여, 작가의 그림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명상에로 이끈다. 그래서 실제로 일련의 다크 페인팅으로 채플 곧 일종의 명상센터를 꾸몄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내면과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제임스 터렐 역시 빛을 질료로 한 자신의 작업을 통해 명상의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고, 실제로도 명상센터를 계획하고 있다. 로스코의 다크 페인팅이 죽음과 대면하게 하고 죽음과 화해하게 하고 죽음을 넘어서게 한다면, 터렐의 빛 공간은 죽음(혹은 삶 혹은 존재)이 승화되고 기화되는 어떤 계기를 열어놓는다. 이처럼 명상은 어둠과 빛, 죽음과 삶을 싸안는, 그 자체 양가적인 측면을 내재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재현회화에서 그림은 창을 의미했다. 그 창을 통해 현실의 닮은꼴인 유사현실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로스코는 자기내면을 향해 열린 또 다른 창(외경과는 비교되는 내경?)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로스코와 마찬가지로 색채화가인 마티스는 마치 안락의자와도 같은 편안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로스코의 그림 역시 편안한가?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명상센터를 열었고, 죽음을 예견하는 그림을 남기고 자살을 한, 그리고 그렇게 이율배반이 부닥치는, 그런 작가의 그림 역시 편안한가? 터렐의 빛 공간처럼 평화로운가? 최소한 고요하고 승화시켜주는가? 혹 작가의 다크 페인팅은 모든 번민을 빨아들이고, 죽음마저 흡입해 들이는, 그리고 마침내 말이 무색해지고 설명이 그 의미를 잃는, 침묵 속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그런 블랙홀(감정의 블랙홀?)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뿌리 없는 말은 유목이다. 그리고 평생 뿌리 없는 말(리좀)에 천착했던 질 들뢰즈 역시 자살로서 유목을 실현했고 유목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므로 자살은 어쩜 죽음마저 넘어서는 명상을 위한 또 다른 계기일지도 모르고, 작가의 다크 페인팅은 그 방증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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