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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석 / 상실된, 그리운, 삶의, 존재론적 원형의 벽을 그리다

고충환

권영석 / 상실된, 그리운, 삶의, 존재론적 원형의 벽을 그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오랜 성벽에서 세상을 본다. 그 표면의 얼룩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연이 보이고 풍경이 보인다. 홍수와 같은 재해가 보이고 전쟁과 같은 역사가 보인다. 심지어 새벽의 정적을 파고드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린다고도 한다. 이쯤 되면 대단한 상상력이라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논리의 비약으로 볼 일은 아니다. 여기서 작가로 하여금 한갓 얼룩에서 세상을 보게 만든 것은 아마도 심안이며 혜안일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선입견 없는 눈으로 보면 비가시적이며 형상 없이 존재하는 것들이 보인다. 선입견 없는 눈? 현실과 현실인식은 다르다.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닌, 인식작용이다. 인식작용으로 보는 한 현실을 보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인식으로 보고, 관성으로 보고, 길들여진 눈으로 보는 한 현실은 붙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떻게 볼 수가 있는가. 여기에 현상학적 에포케가 있다. 인식과 관성과 선입견을 괄호로 묶어 맨눈으로 보고 마치 생판 처음 보듯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도 비로소 자기의 민낯을 보여줄 것이다. 



권영석, 생, 캔버스에 오일, 2015


하이데거는 지극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상이 자기를 열어 보이는 순간이 오는데, 그걸 세계의 개시라고 불렀다. 여기서 개시는 그저 열어 보인다는 의미로서보다는 세계가 자기 속에 품고 있던 비의를 내어준다는 계시의 의미로 봐도 되겠다. 결국 예술이란 지극히 보는 것, 잘 보는 것, 제대로 보는 것이 관건이다. 가시적인(감각적인) 층위를 뚫고 비가시적인(관념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맨눈으로 보고 민낯을 보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라야 비로소 그걸 그릴 수도 있는 일이다. 어쩜 모든 그림은 얼룩일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시점 내지 관점에 따라서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이는 암시적인 형상을 품고 있는(특히 작가의 그림의 경우에 굴 껍질을 재료로 차용한 탓에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래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 형태며 색깔이 미묘하게 달라져 보이는, 그런 암시적인 형상을 내재화하고 있는).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억압된 욕망이며 실재계의 민낯을 은폐하고 있는. 권영석은 바로 이처럼 얼룩을 그린다. 비정형의 얼룩 속에 정형의 형상을 품고 있는 그림을 그리고, 무분별한 붓질 속에 분별한 서사를 숨겨놓고 있는 그림을 그린다. 


권영석의 그림은 추상이다. 적어도 처음 본 인상은 그렇다. 그저 무분별한 붓질과 비정형의 얼룩들 그리고 마치 낙서와도 같은 스크래치가 어우러진, 때로 컬러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무채색 위주의 허옇고 거뭇한 그림이 전면균질회화나 단색조의 그림으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무관하지도 않은, 오히려 그 연장선에 있는, 그런 그림이다. 여기서 권영석은 모더니즘 회화의 세례를 받고 있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그 세대에 속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유의 그림이 체질에 맞는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 회화는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당위성을 그림의 의미내용이나 서사보다는 형식에서 찾았고, 이는 그대로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 나타난다. 이러저런 형식적인 요소며 성질이야말로 회화의 충분조건이며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작가의 그림으로 치자면 붓질과 얼룩, 스크래치와 마티에르 그리고 무채색의 색감이 그렇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이런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변주하거나 재해석한 것이며, 이로부터 회화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고 모색한 그림인가. 모더니즘 패러다임이야말로 작가의 그림이 정박해있는 지정학적 장소로 볼 수가 있는가. 여기서 다소간 주저하게 된다. 작가는 분명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주의를 이어받고 있지만, 작가를 엄밀한 모더니스트로 자리매김하기에는 뭔가 역부족이거나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다. 형식요소에 천착하면서도 형식주의로 환원되지는 않는, 형식요소를 빌려 뭔가 재현 내지는 서사에 해당할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다), 형식요소로 하여금 재현 내지 서사의 응축된 형식이 되게 하는, 그리고 그렇게 응축된 형식으로 하여금 어떤 정서적 환기를 꾀하는, 그런 지점이 읽힌다. 


응축된 형식? 어떤 정서를 환기시키는 형식? 정서가 응축된 형식? 여기서 작가의 재료에 대한 이해가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굴 껍질을 곱게 갈아 물에 가라앉힌 침전물을 재료로 사용한다. 작가의 그림에 두드러져 보이는 마티에르도 알고 보면 이런 재료에 연유한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굴 가루를 침전시키는데, 이때 침전되는 것은 다만 재료만은 아닐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 자체를 동시에 작가의 정서와 감정의 앙금으로 그리고 개인사의 침전물로 볼 수는 없을까. 작가의 심연에 내려앉은, 작가의 무의식에 아로새겨진,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개인사와 유관한, 그리고 때론 작가에게 속한 것이면서 정작 작가에게마저 알려지지 않은, 아득하고 먼 뭔가를 그림 위로 호출하고 현재 위로 되불러오는, 그런 경우로 볼 수는 없을까. 


때론 작가에게마저 알려지지 않은(아마도 몸은 알고 있을)? 그렇게나 멀고 아득한? 그건, 일종의 원형일 수 있겠다. 먼 과거로부터 유래해서 작가의 유전자에 이식된,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그런 일종의 존재론적 원형일 수 있겠고, 작가의 그림은 다름 아닌 그런 존재론적 원형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그림일 수 있겠다(모든 먼 것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변질된다). 가깝게는 고향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그림일 수 있겠다. 여기서 고향은 그저 실재하는 지정학적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현대인이 상실한 것들이며, 어른들의 유년으로 아로새겨진, 그런 무형의 장소며 없는 장소를 아우른다. 작가에게는 그 장소가 자연이다. 작가의 유년은 산과 들에 널린 도자기 파편으로 기억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바닷가에 널린 굴 껍데기로 아로새겨진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도자기의 파편과 굴 껍데기로 기억되는 추억의 침전물을 그렸고, 그 그리움의 앙금을 그렸다. 비정형의 얼룩들과 스크래치들이 어우러져 그림 위로 밀어올린 마티에르는 말하자면 그런 기억의 흔적이며 추억이 남긴 자국들이다. 그 자체론 형태도 색깔도 없는 기억과 추억과 같은, 그런 그리운 시간의 몸을 그린 그림이다. 


발터 벤야민은 실제로는 아득하고 먼 것인데 마치 가까이 있는 양 느껴지는 경험을 아우라라고 했다(벤야민은 아우라란 말로서 종교적인 그림이며 오리지널한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득하고 먼 것을 현재 위로 되불러올 때 느껴지는 경험 내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인 환기 정도로 보면 되겠고, 이때의 환기는 그대로 작가의 그림과도 통한다. 아우라를 우리말로 옮기면 분위기가 된다(그저 분위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 분위기가 있어야 비로소 기억도 불러올 수 있고, 그리움도 되불러올 수가 있다. 혹은 그렇게 현재 위로 호출된 기억이며 그리움이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작가는 굴 가루로 그린 그림 위를 한지로 덮는다. 그렇게 덮어서 가리면서 굴 그림(바탕화면?)과 한지가 하나의 지층으로 혼입돼 한 몸을 이루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그림에서 드러나 보이는 굴의 물성이 도드라지는 것을 상쇄하고 부드럽게 감싸, 어떤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기서 알다시피 한지는 반투명이다. 드러내면서 숨기고 숨기면서 드러낸다. 그렇게 굴 가루의 물성과 한지의 물성 사이에 이미지가 갇힌다. 그리고 그렇게 갇히면서 드러낸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일종의 사이의 미학으로 부를 수 있겠다. 굴의 물성과 한지의 물성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 유년과 현재 사이, 존재론적 원형과 현존재 사이로부터 어떤 분위기를 파생시키는, 그리움과 삶의 생채기를 흡사 시간의 화석처럼 각인하고 있는, 그런 그림으로 볼 수가 있겠다. 



권영석, 생(1), 캔버스에 오일, 2015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그저 추상적이기만 한 추상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엄밀한 추상이 의미가 없다기보다는 사실상 엄밀한 추상은 없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겠다.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추상은 동시에 어느 정도 재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외형상 추상적 형식을 빌려 재현과 서사를 암시하는, 추상적 형식 속에 도자기 파편과 굴 껍데기의 물성을 침전시킨, 그리고 그 물성 속에 바다와 자연이, 유년의 추억과 원형적 그리움이 스미게 한 작가의 그림에도 그대로 통한다. 인간은 의미론적 동물이다. 유형무형의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고야 마는. 나아가 비존재에서마저도. 그리고 그렇게 심지어 점 하나에도 우주가 담기고, 한갓 얼룩에마저 세계가 함축된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라고 했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고, 추상적인 것을 통해 재현적인 것을 암시하는. 그렇게 예술은 어쩜 그리는 기술이라기보다는 그리지 않는 기술일 수 있다. 그렇게 그리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잘 드러나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 앞에 서면 바다에 떠밀려온 유년의 추억이 보이고, 존재론적 원형이 들려주는 소리가 들린다. 혹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리를 되새김질한 소리며 자연(아님 원형?)과 내가 공명하는 소리와 같은, 그런 내적 울림일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도 그렇게 그림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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