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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영 / 페티쉬, 살색의 허물거리는, 번들거리는, 이물스런

고충환

강도영 / 페티쉬, 살색의 허물거리는, 번들거리는, 이물스런


잔혹가족. 잔혹동화란 장르가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기왕의 동화에 대한 다시읽기(재독서)를 수행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왜 멀쩡한(?) 동화를 다시 읽는가. 그리고 그렇게 다시읽기를 수행한 이전과 이후 동화의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알다시피 동화의 주요 독자층은 유아들이다. 아이들에게 교육이 될 만한, 꿈을 꾸게 해주는, 그런 유익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 동화를 읽고 자란 아이들은 착한(?) 어른이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이야기는 원작이 아닌, 원작을 각색한 것이었다(이데올로기였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이데올로기들이다). 선을 위해 악을 억압하고, 미를 위해 추를 억압하고, 진리를 위해 가설을 억압하고, 삶을 위해 죽음을 추방하고, 생산을 위해 놀이를 변방으로 밀어낸(특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그런 왜곡된 이야기였다. 애초에 선과 악을, 그리고 미와 추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구별한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렇게 억압된 것이 귀환한다. 진리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실과 실재와의 차이에 직면한 것이며,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상징계의 틈새로 출몰한 실재계의 민낯을 본 것이다. 요람에 담긴 채 행복한 줄만 알았는데, 불현듯 요람을 흔드는 알 수 없는 손의 실체를 보아버린(아님 알아챈) 것이라고나 할까. 


강도영, 구르는 공 위에서 중심잡기, 2015


그리고 여기에 잔혹가족이 있다. 알다시피 가족이데올로기는 끈질기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뒷받침되는, 끈끈한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애는 구성원에 대한 무조건적인 희생과 사랑, 용서와 배려의 온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가족애는 어쩜 가장 강력한 억압의 원천일 수 있고, 사회적 억압의 축소판일 수 있다.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걸 할 수 있고, 모든 게 가능하다. 그래서 갈등과 불만도 즉각적이고, 폭발과 상처도 적극적이다. 가족 상호간엔 굳이 가면(페르소나)을 쓸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페르소나는 사회에 내어준 주체, 사회가 보고 싶고 사회에 보여주고 싶은 주체다. 그 가면 뒤에 숨은 주체가 아이덴티티다. 그렇게 사회적인 나는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리되지만, 가족에게서만큼은 굳이 자신을 분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혹 가족에게서마저 가면을 써야 할 가족 아님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불통은 가족으로부터 예비 되고 있었고, 가족에게서 해체는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정황을 가족해체라고 부른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가족은 해체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몸은 하난데, 머리가 셋이다. 아님 넷? 다섯? 대상은 하난데, 관점과 해석은 가지각색이다. 작가는 그렇게 생각과 이해관계가 다른, 해체되는 가족을 그렸고, 불통의 관계를 그렸고, 해체와 불통의 온상을 그렸다. 그리고 그 온상은 머잖아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대 재생산될 것이었다. 


구르는 공위에서 재주를 부리다. 여기에 구르는 공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아님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아님 차라리 전전긍긍해하는 안쓰런 표정의 여자가 있다. 안쓰런? 설핏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님 우는 것 같기도 하다. 그 표정은 사실 웃음과 울음 사이의 알 수 없는, 혹은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그런 어떤 정황에 대해서 말해준다. 여기서 나는 이중으로 분열된다. 발은 전전긍긍해하고, 얼굴은 웃는다. 발은 무의식적 실체 아님 억압된 실체를 대변해주고, 얼굴은 가면 곧 페르소나를 대변한다. 그래서 너는 나를 모른다. 너는 결코 나를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너는 오로지 내가 지어보이는 표정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네가 보는 얼굴은 사실은 네가 보고 싶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상호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그런 전제된 약속이며 약호와도 같은 것이며, 건널 수 없는 선(금지된 선)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내가 너에게 지어보이는 웃음 속에, 표정 속에, 얼굴 속에 없다.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없고, 지금 여기에 없다. 


실제로 그림이 그려진 경우로 치자면 최근작에 해당하지만, 의미론적으로 볼 때 가족에게서 싹튼 해체와 불통의 문제의식 내지 자의식이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대 재생산된 것이란 점에서 전작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단 한 점의 그림이지만, 해체되는 사회며 불통의 사회,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 오로지 가면만을 인정할 뿐 진정성(실재?)은 보고 싶지도 볼 필요도 없는 사회, 아니 오히려 실재를 틀어막기에 전전긍긍해하는 사회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그림이다. 웃음과 울음 사이라고 했지만, 그저 그렇게만 환원되지는 않는, 어쩜 억압된 것이 자기를 가장한 채 밀어 올리는 것일지도 모를, 그리고 그렇게 그 자체 실재계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그런 알 수 없는 표정이 보면 볼수록 오리무중의 기호며 미증유의 기호에 빠트리면서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나는 실재계와 대면하는 것이 두렵다). 


발가벗은 인간. 그리고 작가는 곧잘 연고지를 찾는다. 바다를 끼고 있는 그곳 어시장에는 이러저런 해물들이 많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가는 빨간 고무다라에 담긴 해삼과 개불에, 특히 개불에 필이 꽂힌다. 빼곡한 개불들이 꼭 발가벗은 사람들이 꼬물거리는 것 같고, 남근처럼 이물스럽고(아담의 출현), 징그럽다(소름개불). 사람이 사람구실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옷 때문이다. 동물과 사람을 구별하는 것도 옷이고, 자연과 문명을 분별하는 것도 옷이다. 옷이 뭔가. 페르소나고 가면이다. 권력이고, 지식이고, 신분이고, 자본이다. 그게 없음,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사람만이 이런 옷을 입는다. 오죽하면 이데올로기(곧 옷)가 개인을 호명할 때 개인은 비로소 주체로서 태어난다고 했던가. 이를테면 착한 놈, 나쁜 년, 돼지 같은 놈, 빌어먹을 년 같은. 그러므로 알튀세의 주체론에는 천민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발가벗겨져 있다. 그래서 착한 놈도, 나쁜 년도, 돼지 같은 놈도, 빌어먹을 년도 따로 구별이 없고, 분별할 수도 없다. 그럼, 만인이 평등한 사회가 오는가.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일종의 유토피아를 그려놓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답은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이 옷을 벗을 일도 없거니와, 설령 벗었다 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발가벗겨진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이기주의(무의식에마저 파고든)에 갇혀 전전긍긍해하는 형국을 그려 보이고 있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해삼이며 개불 같은 연체동물들은 감각기관이 따로 없다(감각 없는 우리들). 혹 몸 전제며 자체가 감각기관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다만 보기에 어떻게 비치는지가 문제이며, 이를 통해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관건일 것이다. 감각기관이 따로 없다는 것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따로 없다는 것이고, 소통부재를 의미하고, 불통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렇게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들리지 않는 이야기). 대화를 해도 언제나 어긋날 뿐, 내가 하는 말은 결코 너에게 가 닿지 못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너는 언제나 대화를 하는 척할 뿐, 결코 들으려하지도 않고 듣고 싶은 마음도 없다(일방적인 대화). 그런 집단 불통(집단 불신?) 증후군을 앓는 와중에서도 나는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기꺼이 너를 핥아줄 용의가 있고 준비도 돼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편을 만들기에 열심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편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 핥아준다. 나는 그런 네가(그리고 나도) 싫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회를 좀먹는, 그리고 종래에는 사회 전체를 죽음에 빠트리는 암 덩어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소름 돋는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청춘착취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런 감각기관 없는 사람들이 안쓰러워 눈을 붙여주고 귀를 이식해준다. 제발 좀 나를 쳐다보라고 주문하고, 내 말을 좀 들어보라고 주문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마저도 헛수고일 뿐, 그렇게 눈을 가지게 된, 그리고 귀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저마다 보고 싶은 것을 볼 뿐, 그리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을 뿐 속수무책이고 묵묵부답이다. 오히려 그렇게 덧대어진 눈알과 귀로 인해 꼴만 더 우습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허물거리는 연체동물의 몸통에 무슨 암 덩어리처럼 돌출된 눈알이며 귀가 일종의 그로테스크리얼리티를 열어 보인다. 사람들의 내면에 억압된 것들, 드러나지 않았어야 했을 것들, 괴물성을 예시해 보인다. 


작가의 감각기관 없는 사람들은 의미론적으로 질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뒤집어놓은 것 같다. 들뢰즈에게 기관 없는 신체는 길들여지지 않은, 훈육되지 않은, 그래서 항상적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의식의 백지상태며 의식의 영도지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작가가 보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의식화돼 있고, 저마다의 자의식에 갇혀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불통이다. 그래서 다시, 작가의 감각기관 없는 사람들은 사실은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겨냥한 반어법처럼 읽힌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Anomi-cation이라는 주제로 부른다. Anomie와 Communication의 합성어다. 각각 아노미는 정신적인 패닉상태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은 소통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이 정식화한 아노미는 자신의 유명한 자살론과 함께 물질문명사회의 허구를 꿰뚫는 두 축이다. 이로써 작가의 주제의식은 대충, 정신적인 공황상태 혹은 시대 하에서도 소통은 가능한가, 라고 물어오는 절실한 자기반성 내지 문제의식을 겨냥하고 있다. 이 문제의식 자체가 예사롭지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작가가 사용하는 독법 내지 화법은 눈에 띠게 공격적이고 냉소적이다. 그 자체 청춘의 특권이며, 여전히 뜨거운 피의 특질이라고 보고 싶다. 위선보다는 위악이 더 낮다는 말이 있다. 최소한 그 의미의 진위며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 자기반성적인 비판의식이 작가의 그림을 견인하는 원동력이며,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생산적인 그리고 긍정적인 계기로 작용하리라 본다(위악은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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