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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의 정의, 관계의 기술과 재정의의 작동원리

고충환

한국화의 경계, 한국화의 확장

한국화의 정의, 관계의 기술과 재정의의 작동원리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물활론과 범신론과 같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자연 같은 것은 이제 없다. 최소한 의미를 상실했다. 한적하다싶으면 송전탑이 가로 막고 서 있고, 숲 속의 자투리땅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공원들이 조성돼 있다. 이제 군 초소는 전원풍경의 일부가 되었으며, 산 정상에는 헬리콥터를 유도하기 위한 H자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그런가하면 험한 곳일수록 산세도 빼어나 그만큼 등산객도 더 많이 찾는다. 이처럼 사람이 찾는 산이 아닌, 적막강산을 생각하기도 어렵고 현실성도 없다. 등산객은 말하자면 현대판 산수풍경에 빠질 수 없는 한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풍경(인공풍경?) 대신 오히려 관광엽서와 휴양지 광고 브로셔 그리고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등장하는 빙하와 화산, 물개와 펭귄이 더 친숙하고 더 살갑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비의를 품지도 주술을 부리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흘러간 옛 노래로 되돌아와 향수를 달래주거나 하릴없는 풍문으로 떠돌 뿐. 이런 상실의 시대에 자연과 풍경, 풍수와 오행, 전원과 산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욱이 산수를 그리고 수묵을 그리는 행위는 무슨 최소한의 의미라도 남아있는 것일까. 

그동안 한국화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다. 그 논란은 대개 한국화의 개념규정과 범주에 대한 것이었고, 주로 형식적인, 방법적이고 기법적인, 그리고 재료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었고, 사실상 장르적 특수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화에 대한 개념규정과 범주의 문제는 과연 한국화라는 장르적 특수성의 벽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인가. 장르적 특수성은 더 이상 양보하거나 물러 설 수 없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것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화라는 장르 규정은 서구의 논법을 따른 것이다.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회화의 본질에서 회화의 당위성을 찾고, 조각을 조각이게 해주는 조각의 본질에서 조각의 존재이유를 찾은, 소위 모더니즘패러다임을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화의 본질은 뭔가. 한국화를 한국화이게 해주는 형식논리는 뭔가. 흔히 알려진 바대로라면 지필묵이 그것이다(엄밀하게는 이마저도 중국의 국화와 일본화와 겹친다. 그럼에도 여하튼).  

이 논법은 차이를 통해서 장르적 특수성을 규정한 것이다. 차이를 통해서? 여기서 차이를 전복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 말하자면 지금도 여전히 예술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고 유효하다면, 그건 다름 아닌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차이를 장르적 특수성을 보장해주고 강화하는 계기로서보다는 장르적 특수성을 허무는 계기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지는 철판회화(김종학)로 그리고 공간드로잉(김태호)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은 서체(이강소)로, 선조(정현)로, 포도나무줄기(차기율)로, 아님 레이저빔으로 변주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묵 역시 숯(우종택)으로 그리고 목탄(이재삼)으로 확대 재생산될 수 있을 터이다(숯이며 목탄 자체가 이미 묵이긴 하지만. 여하튼). 예술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라고 했다. 논법은 허물라고 있는 것이고, 장르적 특수성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탈장르가 현대미술의 공공연한 사실 내지 현실임을 인정한다면, 적어도 논리의 비약은 아닐 것이다(오히려 새삼스런 면이 없지 않다).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미술관은 예술의 존재방식과 관련해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람들은 저마다 머릿속에 예술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저마다의 미술관을 머릿속에 이고 다닌다는 말이다(미래의 미술관? 아님 가장 오래된 미술관?). 이건 무슨 말인가. 보통 그림을 그릴 때, 머릿속에 먼저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실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머릿속 그림과 끊임없이 비교한다. 머릿속 그림과 실제 그림이 부합하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한다. 여기에 우연마저도, 변수마저도, 그리고 무의식마저도 예외는 없다. 머릿속 그림에 관한한 예기치 못한 상황 같은 것은 없다. 버벅거릴 수는 있지만. 그리고 미처 머릿속에 등재되거나 명명되지 못한 것으로 인해 당혹스러울 수는 있지만. 

다시, 무슨 말인가. 머릿속 그림이란 무슨 의미인가. 머릿속에 미술관을 이고 다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관념이 곧 그림이라는 말이다. 의식이 곧 그림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생각도 그림이고 공간도 그림이고 설치도 그림이고 소리도 그림이고 냄새도 그림이다. 문학도 그림이고 말도 그림이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머리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 그것은 편집과 구성을 한다는(곧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리는 질감으로 환원되고, 냄새는 색깔로 환치된다. 오감은 저마다 고립된 섬으로 있다가도, 다른 감각과 만나질 때 공감각과 연상작용을 향해 열린다. 그렇게 열리면서 감각의 경계를 넘어 모든 감각경험을 그림으로, 이미지로, 뷰로, 장면으로 환원시킨다. 시각의 독재 운운할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각(곧 그림)으로 읽는다는 것은 사실상 몸으로 읽는다는 것으로, 시각으로 환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몸으로 환원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일이다. 

전시는 생각의 기술이다. 인식론적 지도를 그리는 기술이다. 그 지도를 어떻게 그리는지 여하에 따라서 한국화의 경계도 재설정될 수가 있고, 확장도 가능해질 일이다. 그리고 그 경계며 확장 가능성은 논법을 허물고 장르적 특수성의 경계를 넘는 것일 때에야 비로소 의미도 있고 완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확장은 경계 바깥쪽(탈장르)을 향할 수도, 그리고 안쪽(한국화의 심화와 천착이 한국화의 변질과 내파를 불러오는)을 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그 바깥쪽과 안쪽이 있다. 곽훈(다완 시리즈와 동양에서 온 소리), 구본창(백자), 김선두(콜라주), 김선형(청색), 김승영(극지의 기후), 김종학(철판회화), 김태호(공간 드로잉), 김호득(문득), 나점수(거실 거실한), 박병춘(라면풍경과 검은 비닐봉지풍경), 서정태(깊고 푸른 밤), 송수련(배채법과 내적시선), 오숙환(모래톱 같은, 별자리 같은), 오태학(벽화기법? 유년의?), 우종택(시원의 기억), 유근택(세계의 기원), 이강소(허, 그 자체로 충만한), 이재삼(달빛어린), 이종구(현실주의), 이철주(수묵추상), 임택(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진 산수유람), 장상의(수묵풍경), 정경화(검은 풍경), 정현(침목과 침묵), 조환(철판 레이저 커팅), 차기율(순환의 여행, 방주와 강목 사이), 함섭(한지조형), 홍순주(색면 콤포지션), 홍지윤(퓨전동양화). 

여기서 작가들은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지점들이다. 지점들은 저마다 고립된 섬으로 있다가도, 다른 지점들과 만나질 때 공감각과 연상작용을 향해 열린다. 그리고 그렇게 열리면서 지점들의 경계를 넘어 모든 지점들을 하나로 수렴해 들여 한국화를 재정의 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재정의 된 한국화는 다른 전시에 의해 재차 재정의 될 것이고, 그렇게 재정의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한국화의 정의는 결정적인 의미로서보다는 이렇듯 관계의 기술과 현재진행형의 작동원리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번 전시는 그렇게 한국화를 정의하는(아님 정의 해보는) 의미 있는 시도 내지 실험의 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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