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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희 / 현실과 존재론적 사실 사이, 유배지에서 그림 그리기

고충환

정석희 / 현실과 존재론적 사실 사이, 유배지에서 그림 그리기


작가 정석희는 원래 서양화를 전공했고, 연이어 영상을 전공했다. 엄밀하게는 커뮤니케이션아트를 전공했다. 탈장르현상과 학제 간 경계 넘나들기가 보편화된 현실에서 장르 운운하고 전공 운운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보통 실제로 작업을 실행하는 단계에선 장르적 특수성이 문제시되지도 않거니와 따지지도 않지만, 작가의 작업에선 회화와 영상과 같은 장르적 특수성이 여실히 보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관상의 장르변화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무슨 말이냐면 회화를 근거로 영상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고, 영상작업에서마저 회화 아님 회화성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말이다. 형식상으로 드로잉 애니메이션과 페인팅 애니메이션이 그렇다. 해서, 그의 영상작업은 회화 고유의 색감이며 질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아님 본격적인 영상작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비록 형식은 영상이지만 정작 영상보다는 회화 혹은 회화성에 방점이 찍히는 그런, 어쩜 일종의 움직이는 그림으로 형용될 만한 아날로그적이고 질료가 두드러져 보이는 그런, 감각지점을 짚어내고 있다. 회화와 영상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속되고 연동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구럼비, 페인팅, 애니메이션(2분 10초), 2014


형식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미디어비평가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쿨미디어와 핫미디어로 구분했다. 정보량이 적고 정보의 질이 애매한 경우, 그래서 수용자의 적극적인 해석적 참여가 요구되는 미디어가 쿨미디어다(롤랑 바르트의 작가적 텍스트). 이에 반해 정보량이 많고 정보의 질이 선명한 경우, 그래서 수용자의 참여 여지가 별로 없는 미디어가 핫미디어다(바르트의 독자적 텍스트). 그리고 맥루한은 영화를 핫미디어로 분류했다. 모르긴 해도 맥루한의 분류대로라면 회화는 쿨미디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외관상 회화에서 영상으로(물론 영화와는 다르지만, 여하튼) 옮아간 작가의 경우는 쿨미디어로부터 핫미디어로의 이행으로 볼 수가 있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작가의 작업은 회화에 근거를 두고 있고, 영상에서마저 회화 혹은 회화성이 그대로 간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에서 쿨미디어(곧 회화)에 대한 맥루한의 정의는 의미심장하다. 수용자의 적극적인 해석적 참여가 요구되는, 의미론적으로 헐렁하고 느슨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는, 다의성에 대해 열린 의미구조를 가지고 있는, 그런 텍스트성을(회화도 일종의 텍스트로 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주지하고 있는 것이다. 수용자의 참여가 결정적이라는 의민데, 이처럼 수용자에(저자 혹은 창작주체보다는) 방점이 찍히는 아님 무게중심이 실리는 경우가 소위 수용미학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수용미학의 핵심은 소통이며, 이는 그대로 커뮤니케이션아트로 나타난 작가의 이력과도 통한다. 정리를 하자면 작가의 영상작업은 회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비록 형식은 영상이지만 여전히 회화 혹은 회화성이 견지되고 있고, 이런 형식논리를 매개로 수용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꾀하는 의미내용을, 이를테면 사회학적인, 존재론적인, 그리고 실존적인 서사가 강한 의미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사회학적인, 존재론적인, 그리고 실존적인 서사가 강하다고 했다. 이를테면 세월호 참사를 다룬 에피소드, 구럼비 바위의 용천수에 사는 정령이라는 신화적 존재를 매개로 극단적인 이념대립과 화해를 꾀한 구럼비, 철원의 노동당 청사와 세월호 침몰을 오버랩 시켜 분단의 현실이 단순한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주지시킨 끝나지 않은 이야기, 있음과 없음, 허상과 현실, 그리고 안과 밖의 경계를 다룬 숲에서 길을 잃다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존재의 이중성을 부각한 빛에 의한 변주가 그렇다. 


하나같이 뜨거운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건들이고, 존재론적인 사건들(아님 조건 아님 한계들)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보기에 사회적 사건은 동시에 작가에게 일어난 사건이었고, 사회적 사건을 사회적 사건 자체로서보다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심화시키는 힘이 있다. 사회적 사건을 사사로운 사건과 동일시하는 연민이 있고, 사회적 사건을 존재론적 사건으로 끌어올리는 시적 승화가 있다. 피박 터지는 이념대립을 존재론적 어둠 속에 감싸 안는, 그런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 일말의 의문이 생긴다. 작가의 작업은 서사가 뚜렷한 편이고, 그렇다면 핫미디어로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작가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그 의미구조가 헐렁하고 느슨한 회화를 기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여기에 그 서사구조는 외관상 보기에 결코 논리적이지도 않고 인과적이지도 않고 직선적이지도 않다. 순간순간 작가적 상상력이 매개가 돼 현실적 서사와 존재론적 서사의 경계가 자유자재로 넘나들어진다. 현실적인 서사가 존재론적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 호출되는가 하면, 순수한 상상력이 현실적인 서사의 허를 찌르고 들어온다. 



숲에서 길을잃다, 페인팅, 애니메이션(3분 42초), 2012


현실적인 서사와 존재론적인 서사, 순수한 상상력과 신화적인 상상력,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이 그 경계를 허물고 상호 간섭하고 연동되는 식의,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밑도 끝도 없이 물고 물리는 순환서사구조가 흡사 하이퍼텍스트 내지 하이퍼링크를 떠올리게 한다. 초현실주의로 치자면 자유연상기법 내지 자동기술법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무분별한 분절과 이접구조 그리고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적 사건을 유지하고 있고, 사회적 사건을 존재론적 사건으로 승화시켜내고 있다. 인간(아님 삶)에 대한 연민과 함께 사회적 사건을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볼 버릇하는,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이 상호 간섭하고 매개되는 경우로 보는 작가의 몸에 밴 사유(육화된 사유) 탓에 가능한 일이라고 봐도 되겠다. 


작가의 영상작업은 회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회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영상 곧 한 편의 움직이는 그림이 가능하기 위해선 적게는 수십 장 그리고 많게는 수백 장(때에 따라선 수천 장)에 해당하는 컷 그림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 그렇다면 그 많은 컷 그림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님,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바로 여기에 작가의 작업이 갖는 특수성(방법적인? 형식적인?)이 있다. 작가는 검은 화면에서 아님 흰 화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목탄이나 페인팅으로 드로잉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탄과 지우개를, 밝은 색 채색과 어둔 색 채색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그림을 그려나간다. 한 컷 한 컷 진행될 때마다 컷 컷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리고 그렇게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서 먼저 그린 컷이 나중에 그린 컷에 가려져 지워진다. 그렇게 종래에는 최종적인 그림 한 장만이 달랑 남겨진다. 작가는 그렇게 남겨진 그림과 영상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이처럼 한 장의 그림은 최종적인 장면을 보여주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한편의 영상에 나타난 모든 컷들을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다. 밑그림이 윗그림을 밀어올린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인과론으로 치자면 밑그림이 윗그림의 원인에 해당하겠다. 그렇게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이렇듯 보이지 않는 그림들이 있었기에 최종적인 그림의 색감과 질감과 분위기가 결정된다. 여기서 롤랑 바르트의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을 떠올릴 일이다. 양피지에 존재를 쓰고 지우기를 거듭하다보면 마침내 양피지가 너덜너덜해진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위에 쓰인 최종적인 존재는 진정 최종일까. 혹 진정한 존재는 그 과정에서 지워진 존재의 흔적들의 총체이며 부정된 전체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최종은 과정을 함축하고 있고, 과정이 사실상 최종의 몸을 이루고 있다.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몸, 존재의 흔적이 차곡차곡 쟁여진 몸, 사실상 한 장의 그림을 그리면서 아님 한 편의 영상을 제작하면서 일었던 작가의 사유의 흔적들이 낱낱이 기록되고 등재된 몸을 작가는 혹 회화 아님 보다 적극적으론 진정한 회화로서 제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그 자체 회화의 또 다른 존재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선 영상보다 회화가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서사는 시간이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서사는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무분별한 분절과 이접구조 그리고 불연속성으로 구조화돼 있다고 했다. 무분별한 분절과 이접구조 그리고 불연속성으로 구조화된 서사? 시간? 바로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을 예시해주고 있다. 무분별한 그리고 우연한 사유와 감각의 편린들이 상호 개입되고 간섭하면서 유기적인 연속성을 이루는 시간이며, 불연속적인 것들이 연속성을 이루며 흐르는(고여 있는? 포개진?) 시간이다.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과도 상통한 개념으로 봐도 되겠다. 작가에게 진정한 회화는 어쩜 최종이 아닌 과정일 수 있다고 했다. 그 과정과도 통하는 지속 개념을 매개로 작가는 현실과 상상력을 날실과 씨실 삼아 직조하고 있고, 현실이 된 상상력이며 존재론적 사실로 육화된 상상력을 그려내고 있었다.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에 바탕 한 것이기에 공허하지가 않고, 존재론적 사실로 육화된 것이기에 진정성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는 매번 유배지로의 여행을 떠난다. 작가에게 그림 그리기는 유배지로의 여행을 의미한다. 어쩜 유배지는 그림 그리기의 유비를 넘어, 삶의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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