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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북, 예술가가 만든 책

고충환

아티스트북, 예술가가 만든 책 


김명수_균형_북아트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한 권의 책을 펼쳐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미셀 투르니에는 책과 독자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깨알 같은 흡혈박쥐들이 책 속에서 날아올라 독자의 피를 빠는 극적 경험이며 사건을 겪는 것으로. 여기서 종이는 절벽이며, 활자들은 흡혈박쥐에 해당한다. 책을 펼치는 순간, 절벽에서 잠자고 있던 흡혈박쥐들이 날아올라 독자의 폐부를 찌르고, 독자를 울리고 웃기고, 독자를 설레게 하고 가슴을 쥐어뜯게 만드는 것이다. 독서행위가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상호작용을 유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한 권의 책이 독자를 사로잡는 의미작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모두는 작가에 의해 자극을 받은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책이며 텍스트를 읽는 책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만든 책이 있다. 참여 작가(김명수)의 논법을 빌려 말하자면 사물로서의 책이다(그 자체 내용으로서의 책이며 읽는 책에 대비되는). 읽는 책에서 일어나는 일은 의미론적인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책을 읽는 순간 일어나는 일이며, 익명의 주체가 독자가 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여기서 만든 책은 읽는 책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감각적인 층위로 확장시킨다. 읽는 책이 의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만든 책은 몸으로 책을 겪는 것이다. 읽는 책이 인식론적인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만든 책은 존재론적인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오감이 총동원되는, 감각과 감각이 상호작용하면서 독자의 폐부를 찌르고, 독자를 울리고 웃기고, 독자를 설레게 하고 가슴을 쥐어뜯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여기에 이처럼 독자를 설레게 하고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만든 책들이 있다.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자전거,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 한지와 전통자수와 조각보와 같은 전통적인 것, 존재의 시간을 환기시켜주는 실,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기억과 환기와 회상에 젖게 만드는 오브제들, 순환하는 자연, 삶의 순간순간을 기록한 흔들리는, 빛바랜 사진들, 일상적인 사물들, 사람들 사이의 소통의 계기들, 도시와 건물들, 길거리 문화와 거리에서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들, 그리고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그 자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레는 마음이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빈병들이다. 마들렌 과자에서 나는 향과 입속에서 바삭거리는 소리가 계기가 돼, 화자를 유년으로 데려다주는 것을 프루스트효과라고 한다. 대개는 이런 유년으로, 지금은 희미해진 흔적으로 남은 잔상 속으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 수 없는, 일정한 왜곡을 동반한, 그 자체 불완전한 기억 속으로, 미지의 세계로, 대개는 과거형으로 기술되는 시점이며 지점들로 데려다주는 계기들이다. 

만든 책은 몸적이다.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오감이 총동원되는 것이다. 동시에 시적이다. 읽는 책에 비해 그 의미가 함축적이고, 비결정적인 의미를 향해 열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흡혈박쥐들이 책 위로 날아올라 나의 폐부를 찌르고, 너를 설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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