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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구/ 나무에서 나무에로

고충환

김상구/ 나무에서 나무에로 


김상구 작가가 목판이라는 단일 판종에 전념해온 지 수십 년이 흘렀다. 그만큼 오랜 경륜과 누적의 성과, 그리고 나무에 대한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실험과 나무의 본질 규명에 쏟은 원숙함을 읽을 수 있다. 단일 판종에 대한 그의 이러한 일관된 태도는 일종의 도(道)의 경지를 느끼게 했다. 흔히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칼의 운용과 판각행위를 도의 경지에 비유해 온 예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터라 이러한 생각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근작에서 선보이는 작업 역시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일련의 과정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나무를 추상화해 표현하고 있는 형식이 중심이 되고 있으며, 이외에도 청색과 적색의 모노톤 작업, 그리고 흑백의 대비가 강한 비교적 단순화된 형식으로 아우를 수 있다. 특히 나무가 지니는 의미는 실로 작업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나무는 추상적 관념과 구상적 형상 사이를 왕래하며, 그 결과로써 긴장과 이완의 역학구조를 낳고 있다.  
추상화로 보이는 듯한 그림도 그 출발은 자연이라는 작가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해석에 근거한다. 세부적으로는 자연에 대한 선험적인 느낌과 그것에 대한 해석,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연에의 귀의라는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작가는 나무라는 형식을 빌려 자연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연이 작업을 관념적으로 지배하는 상위개념이라고 한다면, 나무는 그 종(種)개념이라 할 수 있다. 
김상구는 나무를 매만지고 느끼며 애무한다. 나무는 구상과 관념 사이로 난 길을 왕래하다 마침내는 해체된다. 즉 구상으로 시작된 나무는 자연의 흔적과 자취를 단지 암시적인 형식으로만 간직하는 관념적인 기호를 향한다. 실제 작업 속에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나무의 구상성(예컨대 나무의자와 거의 면적인 수준으로까지 단순화된 나무형상)과 나무의 본질에 대한 흉내 내기(예컨대 나무의 판면 자체가 진즉에 지니고 있던 고유한 무늬 위에 스스럼없이 덧입혀진 인위적인 줄눈과 칼이 지나간 자리에 그 흔적을 남기는 합판의 찢어진 자국),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기호의 형식을 취하는 나무(이를테면 몇 가닥 안 되는 선묘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나무와 거의 중력을 상실한 채 공간 속에 부유하는 나무)로 드러난다. 이상의 작업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동어 반복적 혹은 메타적 형식을 취한다. 즉 나무라는 형식을 빌려 나무의 본질을 묻는다. 
반면, 나무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 비하면 그 외 여타의 물상들 예컨대 물, 오리, 새, 그리고 이따금씩 등장하는 인물형상 등은 거의 부수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말이 이러한 물상들이 작가의 작업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의미의 약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을 통해 가장 주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자연 혹은 나무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에 이들이 총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이들 물상들이 어우러져 그려내는 총체적인 이미지는 그대로 작가고유의 자연관이 된다. 
그의 작품은 절제되어 있고, 어떤 경지를 느끼게 한다(실제로 롤랑 바르트는 예술가의 절제 혹은 억제를 도의 경지에 비유한 바 있다). 그것은 나무의 숨결을 마치 제 호흡인 양 느낄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의 전념을 통해 이룩해낸 무심의 경지와 관념의 운용, 그리고 무수한 스케치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세계일 것이다. 나무 스스로 자신의 속성을 열어 보일 만큼 나무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그에게 나무가 대상이 됨은 극히 자연스럽다. 그의 칼끝이 나무의 이미지를 표출하는 동안 나무판은 커다란 둥치의 나무로 재탄생 된다. 이렇게 나무로부터 나무에로의 경과 혹은 나무로부터 나무를 떠낸다(각인해 낸다)는 그의 생각과 태도는, 순환적 구조를 띄는 한편 범신론 혹은 물활론적 사고에 그 바탕을 둔다. 일견 자연으로부터 자연을 길어 올린다는 생각이 극히 평범한 듯하지만, 그만큼 자연스러운 경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듯 자연스러운 귀결이 쉽지만은 않은데, 그것은 그의 작업이 다름 아닌 동어반복적인 해석이라는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자연에 대한 평면적 차원의 해석이 아니라 자연 개념을 매개로 한 일체의 담론형식에 대한 구조적 해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 해석은 구조적 형식을 띈다는 점에서 객관성을 획득한다.
그에게서 나무는 단순한 재현이나 구상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소우주의 표현이자 남성의 기표로서, 여성의 기표인 대지의 자궁에 그 뿌리를 드리운다. 음양의 조화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의 단색조 화면에서 대지는 나무를 싸안고, 나무와 나무둥치는 그 속에 빼곡히 들어찬 가지와 물, 오리 따위를 품는다. 여기서 대지는 자궁이며, 물은 양수 즉 생명수(生命水)가 된다. 더불어 생명수인 물을 담고 있는 나무(실제로 나무속에 물 혹은 오리 따위의 묘사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 역시 생명수(生命樹) 혹은 우주수(宇宙樹)가 된다. 여기서 나무는 대지의 표피층에 얇게 의지해 솟은 형국이 아니라, 대지가 그 속에 나무를 품고 있는 모양새로 인해 자연의 내장이 된다. 대지가 나무라는 내장을, 다시 나무가 물이라는 내장을 그 속에 담고 있다는 것은 자연 즉 생명의 순환논리와 관련된다. 이렇듯이 그의 그림에서는 자연의 관념과 그것이 품고 있는 자연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특정 설화나 신화적 담론을 발생시키는 서사구조를 형성한다. 여기에 관자의 해석적 참여를 유도하는 여백이 있다. 이와 함께 대지와 물, 그리고 나무는 수직적 계급구조가 아닌 수평적 혹은 순환적 구조를 띈다. 이 세계는 순환논리에 바탕을 두며, 마찬가지로 순환적 구조를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 이상의 해석이 가능한 것은 서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순전히 그의 자연과 나무에 대한 개념이 동어반복적인 해석구조 혹은 자기 패러디적인 구조(나무를 통해 나무의 본성을 묻는, 아님 자연을 매개로 자연의 본질을 캐는)를 띄는 것에 근거한다. 이를테면 나무로부터 나무를 취한다는 사고의 발상이나 나무가 자연의 요소를(예컨대 물, 오리, 아님 더 작은 나무들) 그 속에 품는다는 발상이 그러하다. 
그의 목판화에서는 소재로서의 나무와 그 속성으로서의 판목성, 도(道) 혹은 신화적 상징태로서의 칼 및 그것의 운용과 수련, 그리고 손의 운용이 하나호 합치된다. 여기서 칼맛과 손맛이라는 중요한 두 개념이 드러난다. 칼맛은 도(道)의 과정과 신의 현현, 그리고 손맛은 자연에 그 바탕을 둔다. 한편 자연은 적나라함, 스스럼없이 드러냄, 있는 그대로 등의 의미를 담보함으로써 진리 개념과 만난다. 곧 진솔한 자기의 드러냄이 작업의 진리가 된다. 최종적으로 그것은 손맛과 만난다. 특히 이 대목이 중요한 것은 손맛이 가해지는 정도와 방법의 운용이 작업의 자연스러운 귀결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결국 칼맛이 조임을, 그리고 손맛이 풀어헤침을 운용함으로써 화면 내에 균형과 조화를 담보해준다. 여기서 균형과 조화는 긴장과 이완, 그리고 질서와 혼돈을 그 하부개념으로 아우른다. 
작가는 요즈음 음각의 묘미에 빠져있다. 그는 기존의 형상에 여타의 요소를 더함으로써 화면을 풍부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형상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들어냄으로써 화면을 더 단순화시키는 생각에 경도돼 있다. 이렇듯이 단순한 화면에 대한 그의 지향은 종래와는 다른 접근방식을 요구한다. 그것은 판화 고유의 평면성과 나무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형식 즉 그 속성을 객관화시키는 판목성(나무의 물성), 그리고 보다 단순한 화면의 구성에 대한 찰나적인 직관의 혼연일체를 요구한다. 단적으로 화면에 대한 보다 압축된 감각과 운용을 요구한다. 이외에도 그는 한국 고판화가 지니는 고유한 맛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이 경우는 특히 우리의 감성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요하는 대목으로서, 판목성에 대한 물활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직관적인 칼의 운용과 자연스런 손맛의 조화, 그리고 고판화가 보여주는 독특한 화면구성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적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의 작업은 소여(所與)된 일체의 것에 대한 절대적 순응을 바탕으로 해서 최소한의 인위성을 더하는 형식을 취한다. 여기서 인위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소여된 일체의 것들, 이를테면 도구로서의 나무와 칼, 혹은 소재로서의 자연과 나무, 그리고 물 따위의 소재가 스스로 그 물성을 드러내게끔 유도하는 정도에 머문다. 
이상과 같이 그의 목판화는 작품으로서의 예술성과 더불어 복수예술의 필연적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상업적 요소, 즉 상품성(특히 상품성 개념은 복수예술의 필수적 가치가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작품의 완결성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작품 고유의 물신성에 연결된다) 역시 결여하지 않고 있다. 그의 작품은 오래도록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다. 그리고 한 개인의 지나친 주관성이 가져다 줄 수도 있는 거북함이 없다. 특히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 자체가 자연을 형상화시킨 것들이기에 더욱이나 그렇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목판화가로서 오랫동안 고심해온 것의 성취와 경지가 아닌가 싶다. 
그는 판화의 양면성, 즉 작품성과 대중성 혹은 상품성 사이를 왕래하며 끊임없이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찾고자 고심해 왔다. 근작에서는 그의 이러한 고민의 추이, 목판화라는 단일 판종에 대한 일관된 자세, 그리고 판화의 정착 및 보급을 위해 쏟은 노력의 행적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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